00166 여행길에서(2) =========================================================================
콰아앙!
“으윽!”
로드리고는 피를 토했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통증에 잠시 동안 의식이 희미해진다.
힘없이 무릎을 굽히고 만다.
곧이어 머리도 바닥에 박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다.
곧바로 공격이 이어졌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에 힘을 주고 겨우 바닥을 굴렀다.
조금 전까지 그가 누워 있었던 바닥이 폭발하듯 비산한다.
이런 상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일어나게. 언제까지 바닥을 구를 생각인가? 엄살은 그 정도로 되었네.”
로드리고는 울고 싶었다.
이게 엄살이라고?!
나를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저번 훈련은 분명 고됐다.
그러나 이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뭔가 체계가 잡혀있던 훈련이었는데 지금은 대체 뭐란 말인가?
“잠깐! 기사님! 잠깐만! 저는 이런 훈련을 원한 게 아닙니다. 이래서는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무척이나 다급한 목소리다.
하지만 여전히 별것 아니라는 투로 황혼의 기사가 말했다.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충분히 조절하면서 하고 있으니까. 이곳을 나가면 멀쩡할 거야. 나를 믿게나.”
답답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말이 많군!”
다시 황혼의 기사의 권격이 쏟아졌다.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수백 개의 주먹을 고스란히 얻어맞고 만다.
어떻게 피해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가 사정없이 곤두박질쳤다.
이번에는 제대로 신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황혼의 기사도 더 이상은 공격하지 않고 로드리고 옆에 털썩 주저 않더니 말했다.
“자네 말을 들어보면 그 사내는 지금의 자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실력자일 테지. 이런 공격에 익숙해져야하네. 그러지 못하면 노예로 팔리는 수모를 당해야 할 테니까. 나는 그걸 인정할 수 없네. 어찌 황혼의 기사에게 가르침을 받은 자가 실력이 부족해서 자유를 구속받게 된단 말인가? 다시 일어나 보게. 그리고 하나라도 피해보려고 노력해 보게. 틀림없이 놈을 이길 수 있게 해줄 테니까 말이야.”
말은 잘한다.
그러나 이건 어떻게 보아도 그동안 검의 신전을 찾아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분풀이가 다분히 섞여있다.
로드리고는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비척거리는 것이 막 태어난 송아지와 다를 바 없다.
그래! 해보자!
난 혼자가 아니니까.
엘가를 생각해서 어떻게든 이겨내야 해.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어!
반드시 그 자식 날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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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레는 한창 무료함속에 마차를 몰았다.
곧 자신의 제자가 될 꼬마 놈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놈은 계속 잠을 자고 있다.
지구력이나 맷집이 부족한 것일까?
물론 그런 오점은 내가 가르치면 순식간에 사라질 테지만 말이야.
음하하하하하!
무료함을 달래 보려고 엘가에게 말을 걸어 보지만 찬바람만 쌩쌩 불어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뭐, 좀 무료하면 어떤가?
어차피 얼마 전까지는 혼자서 여행하고 있었는데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얼마나 마차를 몰았을까?
길 저만치에 마차 한 대가 서있다.
제국에서 보아온 화려한 마차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하지만 그래도 마차에 문장은 박혀 있다.
드레스를 입고 팔짱을 낀 채 발을 톡톡 거리는 레이디가 눈에 띠었다.
아직 거리가 있어서 생김새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몸매는 착했다.
어쩌면 코르셋으로 무리를 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올 곳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가 있다.
헤...헤헤...
입가에 바보 웃음을 지으며 호프레는 좋아했다.
역시 여자는 코르셋으로 허리를 있는 힘껏 조여서 개미허리를 만들어야 해.
그러면 저절로 가슴도 강조되고 아주 예쁘단 말이야.
마누라가 여전히 코르셋을 입어주었다면 그도 제자 따위를 찾아 여행하는 짓 따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니, 여행은 했을 것이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한번쯤 더 고민했으리라.
그러나 마누라에게 코르셋 이야기를 꺼내면 마누라는 자기 나이가 몇인데 코르셋을 입느냐고 화를 내곤 했다.
‘그거 입으면 얼마나 힘든지 아냐?’ 혹은 ‘날 죽이고 새 장가를 가려는 거냐?’등의 이야기로 이어지면 보통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렇게 가녀리기만 하던 마누라가 언제부턴가는 호랑이가 되어 버렸다.
슬픈 일이다.
그래도 오늘은 마누라의 잔소리도 그리워지는 구나.
헤헤...그나저나 소싯적 우리 마누라 몸매도 저것 못지않았지.
어느새 호프레는 서있는 마차 곁에 거의 다가와 있었다.
눈으로 상대방의 얼굴 생김새를 어렵지 않게 식별할 수 있는 거리다.
멀리서 보았던 레이디는 15살 혹은 16살 정도 되었을까?
꽤 미녀다.
하지만 한 성깔 하는지 좁혀져 있는 미간이 호프레를 식겁하게 만든다.
여자가 인상을 쓰고 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조심하게 된다.
지금까지 그녀만 바라보고 있어서 몰랐는데 마차를 수리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마부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가 얼굴이 빨개져서 마차를 들어 올리면 마부가 서둘러 뭐가 잘못됐는지 살피는 것 같은데 아직 제대로 문제점을 발견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이...이봐...그만 나와...”
기사가 똥을 참는 목소리로 말하자 마부가 몸을 비비적거리며 빠져 나온다.
“찾았나?”
“죄송합니다. 좀 더 봐야 할 것 같은데...”
“...하아...좀 더 서둘러서 보란 말이야. 하아...하아...”
둘이 소곤소곤 말하고 있지만 호프레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무튼 그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만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예쁘장하게 생긴 레이디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호프레가 모는 마차를 막아섰다.
호프레는 어쩔 수 없이 마차를 세우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봐! 곤란하던 참인데 잘 되었어. 우리를 좀 돕도록 해.”
“......”
호프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명령하는 레이디를 바라보았다.
저런 싸가지 없는 계집을 보았나?
내가 지나가는 나그네로 보이냐?
이래 봐도 기사 중의 기사, 기사왕 호프레였단 말이지.
지금은 방랑왕이지만 아무튼 대륙 10강인데 그런 말투는 좋지 않지.
그가 막 한마디 하려고 했을 때였다.
조금 전 앓는 소리를 내며 마차를 들어 올리고 있던 기사가 다가와 레이디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얏!”
레이디는 짧고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샬롯! 뭐하는 게냐?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할 때는 좀 더 정중하게 해야지!”
“그치만 우린 귀족이잖아요?”
뭔가 억울하다는 듯 레이디가 인상을 쓰며 반문한다.
아마도 기사의 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의 신분을 너도 모르지 않느냐?”
“딱 봐도 그냥 평민인데 뭘요? 옷도 낡았고...용병이나 뭐 그런 거겠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귀족이든 평민이든 예의를 차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야.”
“정말...아빠는...!”
기사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며 말했다.
“미안하게 되었소. 나는 미하일 토르문트라 하오. 보다시피 기사요. 얼마 전 모시는 주군께 작은 영지를 하나 받게 되어 그곳으로 가고 있는 중이오. 하지만 마차가 고장이 나서...”
호프레가 보았을 때는 딱 봐도 형편없는 실력의 시골 기사였다.
아마 준남작이나 뭐 그런 걸로 승작되었겠지.
그래봤자 별 볼일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매사에 예의를 차리는 것을 보면 고생고생해서 지금의 자리에 앉게 된 모양이다.
호프레의 눈빛에 무시하는 빛이 조금 떠올랐지만 상대방도 그리고 주변에서 지켜보는 자들도 그걸 눈치 채지는 못했다.
이대로 무시하고 가버려도 상관없었겠지만 그래도 딸내미 앞에서 기사에게 창피를 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호프레는 마부석에서 내렸다.
“저는 호레라고 합니다. 실력이야 별 볼일 없지만 곤란하시다면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호프레가 말했다.
“그럼...좀 부탁하지. 내가 앞쪽을 들테니 자네가 뒤편을 맡아주게나.”
아무래도 호프레가 귀족 같지 않자 기사도 말을 놓았다.
그렇게 사내 셋이서 마차를 고치려고 힘을 쓰고 있을 때, 기사의 딸은 심심했던지 짐칸에 앉아 있는 엘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얘! 내려와 봐.”
“예?”
엘가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자 기사의 딸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꾸 두 번씩 말하게 할래? 너 바보야? 알아들었지? 그런데 왜 또 묻는데? 거기서 내리라고! 응? 내리라는 말 몰라?”
“죄...죄송해요.”
당황한 엘가가 무릎에 올려두었던 로드리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짐칸에서 내렸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다가 로드리고에게 시선을 준 기사의 딸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