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7 여행길에서(2) =========================================================================
“건드리지 마세요!”
샬롯이 손을 뻗어 로드리고를 만지려고 하자 엘가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에 샬롯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지금 너 나한테 명령한 거니? 정말 어이없네? 자! 만졌다! 어쩔래? 응?”
샬롯은 로드리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찌르며 묻는다.
엘가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어...어떻게 하진 않아요. 그냥...만지지 마세요. 로드리고 아프니까...그러면 좋지 않아요.”
“로드리고? 얘가 로드리고야? 생긴 것도 참 없어보이게 생겼네. 근데...아프다고? 설마?”
샬롯은 서둘러 물러나면서 혐오스런 표정으로 묻는다.
“전염병 같은 건 아니겠지? 아! 나 정말 몰라! 물 없어?! 응? 씻고 싶어! 정말...”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좀 다쳐서...열도 나지 않는 걸요.”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샬롯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놀라게 하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너! 왜 말을 자꾸 중간에 하다 마니? 응? 그게 귀족을 대하는 태도야?! 응?! 우리 아빠는 자그마치 준남작이란 말이야! 이젠 대대로 귀족이 되었는데 그런 건방진 태도라니...다시 한 번 그렇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줄 알아?! 알았어?! 응?! 또 대답 안하지?!”
샬롯이 으름장을 놓으며 엘가를 재촉한다.
엘가는 물론 예의를 지키고 싶었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예의를 지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몹시도 난처했다.
그녀가 어디에서 귀족을 만나보았을까?
그저 주눅 든 모습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샬롯의 기분이 풀려주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의외로 그런 모습이 샬롯의 기분을 한껏 치켜세워준 모양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해야지! 이제야 좀 알아듣네. 아무튼 못 배운 평민들은 꼭 으름장을 놓아야 한다니까? 그보다 너! 이 드레스 어떻니? 응?”
“드...드레스요?”
그제야 엘가는 샬롯이 입고 있는 옷에 시선을 주었다.
“그래! 드레스! 이거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거래. 행상인이 그랬어. 무려 금화 한 닢이나 주었단 말이야.”
“예..예뻐요. 잘 어울리세요.”
하지만 엘가의 대답이 틀린 것일까?
샬롯의 대꾸는 짜증이 가득 섞여 있다.
“아이 정말! 그건 당연한 거고! 내가 입으면 뭐든 예쁘단 말이야. 그보다 하얀색이 더 낫지 않았을까? 나는 하얀색을 사고 싶었는데 아빠가 금방 더러워지니까 굳이 파란색 드레스를 사게 했단 말이야. 이거 좀 너무하지 않아? 네가 생각해도 하얀색이 더 나았을 것 같지? 그렇지?”
엘가는 하얀색 드레스를 본 적이 없다.
애초에 하얀색 옷을 입은 사람을 본적이 없었다.
옷은 어두운 색 계통이 일반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의구심을 곧이곧대로 표현해봐야 좋을 것은 없다.
“하얀색이 더 나았을 것 같아요.”
그래도 오랫동안 사내들의 비위를 맞추어 온 엘가는 눈치껏 샬롯의 비위를 맞추어 주었다.
샬롯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정말 속상해! 깨끗하게 입을 수 있는데...아직도 내가 어린앤 줄 안다니까...나는 절대로 대귀족한테 시집갈 거야. 이름 높은 귀족 집에 안주인이 되는 거지. 그냥 돈만 많은 상인은 아무래도 귀족에게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품격이 떨어지는 짓이잖아? 그러니까 돈만 많아서는 안 돼. 역시나 태어날 때부터 훌륭한 가문이어야만 한단 말이야. 암튼 그러면 입고 싶은 드레스를 얼마든지 잔뜩 살 수 있겠지? 단 한번만 입고 다시는 같은 옷을 입지 않는 거야. 상상이 가니? 아! 정말...몰라. 몰라. 얼마나 좋을까? 나 정도 미모면 충분하니까 꿈만은 아니라고. 남작이나 자작은 별로니까 무조건 백작 이상의 가문에 시집갈 거야.”
샬롯이 눈을 빛낸다.
행복한 꿈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엘가는 느낄 수 있었다.
“......”
그러나 엘가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엘가의 반응이야 어떻든지 샬롯은 자기 주저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 해도 좋은지 신이 나서 계속해서 말했다.
“청혼 받을 때는 정식으로 무릎을 꿇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허락해 주지 않을 거야. 그 상대방이 아무리 대단한 신분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나는 그렇게 값싼 여자가 아니거든. 물론, 왕족이라면 무릎을 꿇지 않아도 좋아. 왕족은 아무래도 대우를 해줘야 하니까. 누가 되었든 그 사내는 내 미모를 한껏 찬양하겠지? ‘오! 샬롯! 밤하늘의 별보다 더욱 빛나는 나의 사랑이여!’하고 말하는 거야.”
샬롯은 두 손을 마주잡고 사내의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그가 내 눈을 바라보고 점점 가까이 다가와. 입맞춤을 하려고 말이야. 그러나 나는 ‘안 돼요! 결혼하기 전에는 허락할 수 없어요!’하고 거절하는 거지. 그렇지만 그 사내의 실망한 눈빛을 보면 상냥한 마음씨를 가진 나는 동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결국 나는 가볍게 그의 입술에 입맞춤을 해주지만 용케 그가 날 잡아채며 도무지 놔주질 않아. 달콤한 키스가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거야.”
엘가는 샬롯의 이야기를 들으며 술 냄새가 가득했던 사내들의 거친 입맞춤을 떠올렸다.
어두운 밤, 욕망에 이끌린 손이 우악스럽게 가슴을 잡아챈다.
입술을 깨물고 잠시 몸을 떨었다.
이젠 아니야. 이젠...
“간신히 그의 입맞춤에서 벗어난 나는 주먹을 쥐고 그의 가슴을 투닥 거리지. 하지만 이런 가녀린 주먹이 가슴을 때려봤자 얼마나 아프겠어? 그는 웃으며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들어. 그 영롱한 빛...아! 몰라...얼마나 클까? 설마 너무 무거워서 손가락에 끼우고 나면 내 가녀린 손으로는 들어 올리지도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럼 주변에서는 천박한 물건이라고 말하며 흉을 볼지도 몰라. 왜 그렇잖아? 여자들의 시샘이란...나도 여자지만 정말 지긋지긋해. 그래도 그 반지를 꿋꿋하게 끼우고 각 사교장을 돌아다니는 것이 훌륭한 교양을 가진 대귀족 가문의 안주인이 해야 하는 의무 아니겠어? 결국은 그런 시샘은 자기가 나보다 훨씬 못하다는 걸 스스로 자인하는 꼴에 불과하니까 말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엘가를 쳐다보며 샬롯이 묻자 엘가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샬롯이 하는 말은 엘가가 따라가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엘가도 꿈꾸어 본 적이 있다.
상황이 여러 가지 달랐고, 그 상상의 배경이 좀 차이가 날 뿐이지만.
사치스런 점과 한껏 고양된 콧대만 제외한다면 엘가도 샬롯이 한 말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꿈꾸어 본 적이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너는...훗! 뭐, 행복이란 다 자기 수준에 맞추어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것 아니겠어? 너도 괜찮은 시골 농부를 만날 수 있을 거야. 다이아몬드 반지는 아니겠지만 꽃반지 정도는 만들어 주겠지. 그래도 술주정뱅이가 아니길 바랄게.”
“...고마워요.”
결혼이란 것을 꿈꾸어도 되는 것일까?
엘가는 스스로에게 잠시 질문해 보았다.
나 같은 것이 그런 것을 생각해도 될까?
행복한 결혼 같은 것은 저 예쁜 아가씨에게나 어울리는 이야기야.
나는 더럽고 천박한 여자일 뿐이지.
그저 빈민가를 떠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커다란 행복을 바래서는 분명히 신의 분노를 사게 될 거야.
내 수준에 맞추어서 생각하자.
언젠가는 로드리고도 떠나게 되겠지.
예쁜 아가씨와 결혼하게 될 거야.
어쩌면 저 눈 앞에 있는 저런 아가씨와 말이야.
나는 그곳을 떠나기만 했지 이후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어.
전부 로드리고에게 의지할 수는 없어.
그는 나를 지키겠다고 무리하다 다치기까지 했고.
우울한 표정의 엘가를 보고는 샬롯은 조금 찔리는 것이 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구리 반지 정도는 얻을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러니까...꿈을 가져...”
엘가는 샬롯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아가씨.”
“뭐, 나는 미모 못지않게 착한 마음씨를 가졌으니까. 그보다 이 꼬마는 왜 다친 거야?”
샬롯이 로드리고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다시 엘가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한다.
“좀 일이 있었어요.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
“네 동생이야?”
“...예.”
엘가가 대답하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는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샬롯을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금방 낫겠지. 뭐. 애들은 원래 잘 다쳐. 그만큼 빨리도 낫고. 너무 걱정하면 손해라고.”
“하지만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걸요.”
엘가는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지 않자 샬롯은 시선을 돌려 마차를 바라보았다.
“나는 저기 가서 좀 보고 와야겠다. 이러다 노숙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좀 더 닦달해야겠어. 귀족이 노숙이라니...어림없지. 아빠는 정말 무슨 생각이람?”
하지만 샬롯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마침 로드리고가 몸을 움찔 거리며 눈을 떴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하아!”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 내린다.
꼬마가 일어난 것을 보고는 샬롯이 시선을 주었다.
엘가는 그런 로드리고의 땀을 옷깃으로 닦아주며 물었다.
“괜찮아? 세상에! 이 땀 좀 봐.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프면...제발 말해.”
듣기만 해도 따스한 목소리였다.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여긴 어디죠?”
로드리고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샬롯을 쳐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한껏 치켜 올리며 말했다.
“무례하긴! 난 귀족이야. 그렇게 쳐다보다간 혼쭐이 날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