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8 여행길에서(2) =========================================================================
이 여자는 대체 뭐야?
로드리고는 불쾌함에 얼굴을 찡그렸다.
뭐 확실히 미인이기는 하다.
그래도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다짜고짜 윽박지르면 외적인 장점은 크게 반감되어버리고 만다.
로드리고도 상대가 보지 말라는 데 굳이 고집을 피울 이유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사내를 찾았다.
조금 전까지 검의 신전에서 개처럼 얻어터지면 수련을 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전부 그놈 때문이다.
어디냐?!
일단 마부석에는 없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는 마차에서 다른 사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도망갈 수 있는 거 아닐까?
빨리 마차를 출발시키면 쫓아 올 수 없을 거야.
그러면 다시 검의 신전에서 그런 미친 짓을 할 필요도 없다.
물론 수련의 필요성은 확실히 느낀다.
그래도 그렇게 무식한 방법은 싫다.
황혼의 기사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현실로 돌아온 지금 몸 어딘가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계속해서 그런 훈련을 참아낼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적으로 버텨낼 재간이 없다.
로드리고는 엘가를 쳐다보고는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엘가는 의문스런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모르는 계집이 문제였다.
“뭐야?! 너 내 말 무시하니?!”
여자가 허리에 두 손을 걸치고 노려본다.
로드리고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그녀의 고함소리는 주변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로드리고를 쥐어 팬 사내가 돌아보았다.
“오호! 드디어 일어났군! 하하! 아주 늘어지게 자던데? 꼬마는 밤에 자야 키가 크는 법인데 그래서야 쓰나? 누나를 지키려면 쑥쑥 커야할 것 아닌가? 하하하!”
나쁜 새끼...아주 비꼬는데 타고 나셨군.
하지만 나는 싸움에 진 개다.
적개심을 가지고 멍멍 짖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몰라.
아직 놈을 이길 자신은 없잖아?
황혼의 기사에게 좀 더 얻어맞으며 배우든가 아니면 적당한 때를 찾아서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쓸데없이 놈을 자극할 필요는 없어.
무조건 놈을 방심하게 만들어야 해.
로드리고는 어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그런가요? 어젯밤 무리했더니...헤..헤헤...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이거 금방 끝날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하하핫!”
뭐가 그리 좋은지 사내는 웃어댔다.
하긴 좋긴 좋겠지.
누가 뭐라 해도 인신매매는 꽤 돈이 된다.
더러운 놈.
좋은 기회였는데 젠장...
로드리고는 원망어린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여자는 삿대질을 해대며 로드리고를 책망하기 시작했다.
“정말 귀염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꼬마잖아?! 내가 마음이 착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네 눈을 파내고 말았을 거야! 발목에 힘줄도 끊어 버리고! 귀족 어려운 줄을 알아야지!”
더럽게 귀족 귀족 해대네.
보아하니 그렇게 높은 신분도 아닌 것 같은데...
어쩌다 운 좋아서 부모가 작은 마을 하나 정도를 맡게 된 모양인데 이렇게 기고만장해서야 원...
오래 못 간다.
분명 어딘가에서 혼 줄이 나겠지.
그리고 엄연히 말하면 나도 족보상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데...‘아렌트’라는 성이 있단 말이야.
물론 지금에 와서는 어디 가서 귀족이라고 말했다가는 비웃음만 사겠지만 그래도 일반 평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억울하긴 하지만 그녀가 거는 시비에 응해봤자 득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만 더 복잡해질 뿐이야.
잘해봤자 볼기짝 몇 대 얻어맞는 장면을 구경시켜주겠지.
엘가 앞에서 그런 창피한 꼴을 반복할 수는 없다.
지켜준다고 무작정 데리고 나왔는데 벌써 듣보잡 사내에게 엄청나게 깨지지 않았던가?
거기에 더해 이젠 여자에게 얻어맞는 꼴까지 보일 수는 없잖아?
맞는 것 보다는 그냥 설설 기겠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배알이 꼴리지만 때로는 고개를 숙여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너무 아름다우셔서 실례했습니다.”
로드리고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하자 지금까지 짜증스런 기색으로 일관하던 여자는 금세 표정이 변했다.
“흥!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하여간 이런 어린애도 내 미모에는 어쩔 수 없구나. 내 마성이 점점 무서워져. 아...몰라...정말 몰라...”
당장이라도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뭐, 너 같은 애가 나처럼 예쁜 레이디를 어디서 봤겠니? 좋아. 한 번 봐주겠어. 샬롯 아가씨라고 부르렴. 어차피 조금 뒷면 헤어져서 평생 못 볼 테지만...그나저나 내 미모에 네가 빠져서 앞으로는 여자들을 전부 추녀로만 볼까봐 조금 걱정이 된단 말이야. 얘, 잘 새겨들으렴. 사람들은 자기 주제를 알아야 하는 거야. 모두 미녀를 얻을 수는 없단다. 돈과 능력, 그리고 명예와 지위가 있어야만 하지. 그중에 하나만 없어도 나는 싫거든.”
때려도 될까?
뒷일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때려도 될까?
안 돼.
참자.
여기서 발광해서 어쩌자는 거야?
로드리고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있는 것을 오해한 것인지 샬롯은 손가락 끝으로 로드리고의 머리를 두어 번 톡톡 두드려 주고는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렴. 내가 나쁜 사람인 것 같잖아? 다 널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니까. 근데 너 이나 벼룩은 없지?”
로드리고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죽방을 날리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기 무릎을 몇 번 두드렸을 뿐이다.
“없어요. 그런 것. 헤...헤헤...”
“그래도 내가 네 머리 만져줬다고 앞으로 머리도 안 감고 그러면 정말 싫은데...머리 감을 거지?”
점점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다음번에는 분명 죽방이다.
이쯤에서 대화를 끊어야만 했다.
그것이 여자에게도 그리고 로드리고에게도 좋았다.
“저..저도 저기 가서 도울게요. 그래야 샬롯 아가씨께서 편하게 여행을 하실 것 같으니까.”
“어머! 얘 하는 말 들었어? 호호호! 하여간 예쁘면 이렇다니까....”
샬롯은 엘가를 바라보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높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옆에서 엘가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물론 한창 수리하는 마차 곁에 가봤자 로드리고가 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 샬롯의 죽방을 날릴 위험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자기 곁으로 다가온 로드리고를 바라보며 호프레는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녀석...
벌써부터 나에게 잘 보이려고 이렇게 용을 쓰는군.
허허...뭐, 그럴 수밖에 없겠지.
내 실력을 보았으니 말이야.
그렇게 똥마려운 개처럼 주변을 빙글빙글 돌지 않아도 전부 가르쳐주마.
너는 분명 다음번 기사왕이 되어 내 검술의 위대함을 세세토록 전하게 될 테니까.
암! 그렇고말고.
호프레는 로드리고가 귀여웠는지 자기가 마차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로드리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서 마차를 붙잡고 있던 기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어? 뭐...뭐야?!”
곧이어 마차 밑에 들어가서 한참 작업하던 사내도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사..살려줘!!!”
호프레도 그리고 로드리고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로드리고는 지금 눈앞의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야? 이 미친?!
호프레는 방금 전 분명히 웃으면서 로드리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로드리고는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자신의 신체나이를 생각해서 딱히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어쨌든 놈은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
고로 기분이 상해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막을 길이 없다.
머리 정도야 뭐...너무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잖아?
그런데 기사의 당황한 목소리에 로드리고는 지금 호프레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달았다.
마차 밑에 분명히 사람이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두 손을 놓아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웃었다.
로드리고를 보면서!!!
마부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제정신이 아니야!
굉장히 위험한 놈이다.
내게 경고하는 거야.
도망가면 이렇게 된다고!
나는 사람 목숨 따위 파리 목숨으로 생각한다고 직접 보여주는 거라고!!!
검의 신전으로 가야 해!
지금 당장이라도...젠장...
물론 호프레도 당황했다.
추호도 이럴 생각은 없었다.
워낙 들은 것 같지도 않아서 이런 일이 초래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다.
그는 얼른 로드리고의 머리에서 손을 치우고 마차를 다시 들어 올렸다.
마차는 거짓말처럼 번쩍 들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차는 그의 가벼운 손짓에 잠시 하늘을 날았다.
쾅아앙~!
마차는 몇 바퀴나 굴러 울창한 숲에 가서 쳐 박혀 버린다.
나무를 몇 개나 쓰러뜨린 후다.
물론 마차도 엉망이 되었다.
도저히 고쳐서 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마차 밑에 깔려 비명을 질러대던 마부도 어느 순간 비명을 그치고 입을 쩍 벌린 채 호프레를 쳐다보았다.
모두가 말을 잃었다.
저게 정말 사람의 힘이란 말인가?
처음부터 저럼 힘이 있었다면 그냥 혼자서 마차를 들고 있었으면 되는 거 아닐까?
왜 굳이 기사와 같이 마차를 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웃으면서 마차를 놔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계속해서 받기 난처한지 호프레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런...마차가 가볍네요. 하..하하하!”
“......”
그러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