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9 여행길에서(2) =========================================================================
마차는 낡아 있었다.
값어치로 따지면 그리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는 노상이지 않은가?
당장 마차가 없으면 곤란하다.
그럼에도 기사 미하일 경과 딸 샬롯은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다.
처참하게 망가진 마차도, 그리고 부상을 입은 마부도 그들의 입을 꽁꽁 붙들어 매서 뻥끗도 못하게 만들었다.
호레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는 부상으로 바닥에 누워 끙끙 앓고 있는 마부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부는 아파서 손을 내밀고 싶지 않았다.
마차의 무게를 맨몸으로 전부 받아냈는데 아픈 것이 당연하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 더 그대로 누워 있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손을 내민 채 기다리는 호레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마부는 새색시마냥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호레는 순식간에 힘을 주어 마부를 일으켜 세웠다.
마부는 통증에 비틀거리며 팔로 가슴을 에워쌌다.
“으윽...”
참으려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 나왔다.
“아픈가?”
호레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마부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죽고 싶을 만큼 아팠지만 아프다고 했다가는 진짜 아픈 것이 뭔지 가르쳐 주겠다고 할까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괘...괜찮습니다.”
“흐음...잠시 살펴보겠네.”
호레는 마부의 가슴팍을 탁탁 손으로 몇 번 쳤다.
그때마다 마부는 계집애마냥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탁탁!
“여긴 아픈가?”
움찔!
“괘..괜찮습니다.”
탁탁!
“그럼 여긴?”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흐읍!...괘...괜찮습니다...”
이를 악물며 참았다.
미하일 경에게 도와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미하일 경은 헛기침을 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엄청난 배신감이 밀려왔다.
아랫사람에게도 항상 예의를 지키는 자라고 생각하며 내심 존경했는데 그런 기대가 산산 조각나고 만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참자!
어떻게든 참자!
그러나 서러움이 밀려왔다.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걸까?
나는 돈도 없고, 그저 마차 밑에 들어가서 고장 난 곳을 고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저자의 타겟이 된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아마 여기에서 가장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겠지.
억울하다.
“흐...흐흑....흑흑...”
사내는 참으려고 했지만 결국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봐? 왜 이러나? 괜찮나? 응?”
호레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재차 묻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부러 통증을 유발하던 자가 이렇게 자상하게 묻는 것이 더욱 무섭다.
곁에서 지켜보던 로드리고는 지금 저 마부의 모습이 자신이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게다가 로드리고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자인 모양이다.
꽤 유명한 용병이지 않을까?
저런 자라면 굳이 인신매매 같은 걸 하지 않아도 충분히 원하는 수입을 얻을 수 있을 텐데 굳이 엘가와 나를 팔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자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이미 보지 않았던가?
저놈이 하는 행위에 이유 따위는 없어!
이런 걸 일부러 즐기고 있을 뿐이야!!!
로드리고는 마부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굳이 나서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용사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다.
심지어 기사도 아니다.
저기 기사 차림의 사내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나서는 것도 우스운 일이야.
그래서 로드리고는 기사가 나서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기사는 마부의 시선을 무시한 것처럼 로드리고의 시선도 무시해 버렸다.
“그럼 이쪽을 한 번 만져 볼 테니까 아프면 말하게.”
호레는 끈질겼다.
로드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난다.
왜 마부를 괴롭히는 걸까?
그리고 현 상황을 수수방관하는 기사의 모습은 뭐란 말인가?
호레가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마부를 충분히 괴롭힌 후에는 어차피 누구든 그 다음 타겟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로드리고 자신이나 엘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내가 어떻게든 해보자.
결심은 섰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나서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만큼 호레가 보여준 힘은 굉장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마부의 신음을 들은 후에야 로드리고는 입을 열었다.
“저기...”
호레는 시선을 돌려 로드리고를 쳐다보았다.
선량한 표정이다.
정말로 마부를 걱정하다가 누군가의 부름에 시선을 돌린 그런 표정이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믿지 않았다.
“왜 그러나?”
“일단 우리 마차에 실어 가까운 마을이나 도시로 데려다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흐음...”
호레가 물끄러미 로드리고를 쳐다본다.
그 시선에 담겨있는 뜻이 무엇인지 로드리고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다음 타겟이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살며시 주먹을 쥐면서 생각했다.
잠시지만 검의 신전에서 황혼의 기사에게 수련을 받았다.
조금 전보다는 실력이 나아졌을 거야.
뭣하면 공격한다.
식은땀이 등허리를 적신다.
그럼에도 로드리고는 호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팽팽한 긴장감을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었다.
“뭐, 의식도 분명하고, 이렇게 움직이기도 하니 그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군.”
호레는 싱긋 웃어보이고는 로드리고의 머리를 싹싹 쓰다듬었다.
마치 마부를 이렇게 만들기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미하일 경과 샬롯은 마차를 같이 타고 가는 것을 사양했지만 호레는 막무가내였다.
“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나를 경우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그가 격정어린 표정으로 말하자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미하일경과 샬롯은 짐마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짐칸에 넷이나 타게 되자 공간이 부족했다.
결국 로드리고는 어쩔 수 없이 호레와 함께 마부석에 앉게 되었다.
“이것 참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호프레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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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칸에 앉은 일행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미하일 경은 한 짓이 있어서 그런지 마부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마부는 끙끙 앓는 신음 소리를 한 번 흘렸을 뿐이다.
그래도 미하일 경은 마부를 탓하지 않았다.
샬롯은 엘가에게 시선을 주었다.
엘가는 마부석에 앉은 로드리고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샬롯은 엘가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너희 아버지야?”
샬롯은 입술을 엘가의 귓가에 가져다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엘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절대 아니에요!”
역시나 엘가도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근데 왜 같이 여행하는 거야? 아무튼 서로 아는 사이일거 아니야? 잘 말해서 우리는 그냥 보내 줘.”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구요.”
“그런데 같이 여행한단 말이야?”
“저 사람이 로드리고를 때려 눕혔어요.”
“저 꼬마를?”
샬롯이 로드리고의 뒤통수를 한번 곁눈질 하고는 다시 엘가를 쳐다본다.
“예. 그리고는 막무가내로 로드리고 대신에 자기가 마차를 몰겠다고 했어요.”
“...그럼 산적이나 뭐 그런 걸까?”
“...몰라요.”
“설마 나한테 반한 건 아닐까? 아니겠지? 아...나는 왜 이렇게 예쁘게 생겨서 난리람...”
“...그..글쎄요.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엘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샬롯이 노려보며 물었다.
“너 그거 무슨 의미야?!”
“예?”
“나한테 반한 게 아닌 거 같다는 거 말이야!”
“저는 그냥...”
“너 정말...혹시 샘하는 거니?”
“예?!”
“됐어! 예쁜 내 잘못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