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2 여행길에서(3) =========================================================================
말 한 마리와 노인, 그리고 소녀가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말은 그냥 짐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튼튼해 보였고, 아직 젊었다.
깡마른 노인 하나와 작은 소녀가 등에 탄다고 힘겨워 할리는 없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소녀가 두 번이나 노인을 부른다.
“왜 그러느냐? 응?”
노인은 상냥한 목소리와 인자한 미소로 소녀의 부름에 응했다.
“수도까지는 몇 밤 자면 가요?”
“글쎄다...이대로 가면 얼마나 걸릴지 나도 잘 모르겠구나.”
소녀는 노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어리광을 부린다.
“에이~! 그렇게 말하지 말고요~! 헤나로는 정확한 대답을 원한단 말이에욧! 열 밤? 아니면 백 밤? 응?”
눈을 반짝이며 자기를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빛에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따스해 지는 것을 느꼈다.
자연스레 손을 들어 부드럽게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럼 백 밤으로 하자꾸나!”
“헤헤! 백 밤! 좋아요! 그럼 백 밤으로! 하지만 백 밤은 너무 길지 않아요? 그러다 헤나로가 세는 걸 잊어버릴지도 몰라요.”
소녀는 좋아 했다가 금세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뀌고 만다.
“그럼 내가 알려주마.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헤헤! 정말요? 아무튼 수도에 가면 오빠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어요! 항상 아빠를 따라서 여기저기 가봤다고 얼마나 자랑을 했었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아무리 그런 작은 도시들 가봤자 수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죠? 그렇죠? 수도가 전부 이기는 거 맞죠?”
“그럼. 수도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더 멋지니까 당연하단다. 수도를 가본 우리 헤나로라면 작은 도시 여러 곳 가본 오빠 정도는 무조건 이기지!”
“무조건? 정말 무조건?”
“그럼 무조건!”
“헤헤! 헤헤헤!”
“하하하! 하하하!”
둘이 아주 좋단다.
저 둘은 제페토 노인과 헤나로였다.
제페토 노인은 죽지 않았다.
로드리고가 그날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기를 바라며 노인의 손에 쥐어 주었던 말고삐는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아니, 필요 이상으로 좋았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까?
심지어 로드리고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말은 쉬지 않고 밤새 달렸다.
헤나로는 처음에 겁이 났던 것도 잊고 밤길을 달리는 것에 신이 나서 제페토 노인에게 이것저것 잔뜩 주절거렸다.
그동안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은 덕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던 헤나로는 노인이 자기 이야기를 성의 있게 들어주고 맞장구도 쳐주자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날이 밝아오자 헤나로는 졸기 시작했고, 제페토 노인은 헤나로를 품에 안은 채 말을 독려했다.
말은 피곤할 텐데도 투레질도 한 번 하지 않고 노인의 뜻대로 따라주었다.
그러나 노인은 이맘때만 하더라도 머지않아 마을사람들에게 붙잡혀 다시 마을로 끌려갈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분노한 마을사람들에 의해 노상에서 이대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딱히 그들에게서 자신의 흐릿해져 가는 생명의 불을 지키겠다는 의지는 없었다.
그저 다시 한 번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어린 아이들이 웃고, 박수를 쳐주면 그걸로 좋았다.
그래서 노인은 졸린 것도 모르고 그대로 말을 몰았다.
이미 체력은 한참 전에 한계를 향해 치달렸을 터인데도 노인은 신기하게도 쓰러지지 않았다.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조금 더 움직일 수 있다.
아주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버틸 수 있어.
무척이나 몽롱한 기분이었다.
세상은 어딘가 그가 익히 알던 모습과 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일부는 희미하고 일부는 어그러지고 일부는 무채색이었다.
동화속의 한 장면에 들어온 기분이랄까?
아니, 그것과는 좀 달랐다.
하지만 아주 다르지는 않았다.
그는 꽤 오랜 시간동안 현실과는 상당히 괴리된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인지 아니면 그의 피로와 의식의 아득한 저편에서 기인한 어떤 환상인지는 몰랐지만 딱히 그곳에 있는 것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시간의 흐름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었다.
당시의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하나...바로 수도였다.
왕국의 수도로 가서 마지막 공연을 펼치자.
이젠 저글링밖에 하지 못하는 볼품없고 처량한 구경거리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가장 많은 그곳에서 내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다.
시골 마을을 도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거기에도 어린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이 있고, 웃음소리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지막은 조금 달랐으면 할 뿐이야.
조금 더 화려하고 조금 더 북적거리는 거리를 보고 싶다.
갈 수 있느냐 혹은 갈 수 없느냐의 문제는 일단 접어두자.
그저 발버둥 쳐보자.
내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한 번 힘내보는 거야.
그맘때였던가?
소녀는 다시 눈을 떴다.
살짝 움찔거리며 노인의 품 안에서 기지개를 켰다.
그와 동시에 노인의 몽롱하던 의식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 꿈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노인은 소녀를 데려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알지도 못하는 이곳에 소녀를 내려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세상은 거칠고, 험하다.
평생을 방랑한 노인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 소녀의 오빠라는 녀석이 노인에게 부탁한 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을 벌어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소녀를 납치해 어딘가 먼 곳으로 데려가 달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미 시간은 충분히 벌었으리라.
소녀를 위해서라면 이대로 멈추어야 한다.
아니, 이제는 다시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노인의 시간이 끝난다는 결론도 함께 존재한다.
노인은 마음속에 욕심이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그때, 소녀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노인은 잠시 주저하다가 말했다.
“...수도란다. 사람이 아주 많은 곳. 높고 멋진 건물도 많고, 화려한 것도 많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과일과 채소도 있고, 멋쟁이들도 많지.”
“수도...왕국의 수도요?!”
잠시 동안 그 단어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던 소녀는 마침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는지 번쩍 고개를 들고는 소리쳤다.
“그...그렇지. 수도.”
노인은 소녀의 반응에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거기에는 멋진 기사님도 많고, 왕자님도 있겠죠? 그쵸?”
“그럼. 거기에는 멋진 갑옷을 입으신 기사님들이 참 많지. 날씨가 좋은 날 햇빛에 비춰진 그 은빛 갑옷은 정말 볼만하지. 그리고 왕자님도 있겠지. 왕성이 거기 있으니까.”
“빨리 가요! 빨리!”
“하지만 네 부모님이...”
“아! 맞다! 엄마 아빠...으음...그래도 수도에 가보고 싶은데...”
헤나로는 이내 울상을 짓는다.
노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결국 자신의 욕심과 타협하고 말았다.
“그럼...수도에 들렀다가 다시 마을로 데려다주마. 응? 어떠냐?”
“...좋아요. 잠깐 들렸다 오는 거라면 부모님도 크게 혼내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마을에서 수도에 다녀온 사람은 제가 유일하게 될걸요? 헤헤!”
그렇게 소녀를 데려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던 노인의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되고 말았다.
소녀는 울지도 않았고, 오히려 의욕을 불태웠을 뿐이다.
그러나 노인은 그제야 체력의 한계를 실감할 수 있었다.
급격한 피로감에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말도 쉬게 해주어야 한다.
“일단은 좀 쉬고 가자꾸나.”
“하지만 헤나로는 충분히 쉬었는걸요? 보세요! 아주 쌩쌩해요!”
말 위에서 헤나로는 엉덩이를 비벼대며 자신의 체력을 과시했다.
“하하! 그래 보이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쉬는 동안 망을 봐주렴.”
헤나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요! 저 망보는 거 잘해요!”
로드리고가 알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헤나로의 뒤통수를 수십 대는 때려줬을 테지만 그렇게 헤나로는 수도를 향해 여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