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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74화 (174/200)

00174  여행길에서(3)  =========================================================================

그날 밤, 낸시는 혼자서 소변을 보러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건 낸시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신이 나서 이야기했던 비욘느가 먼저 낸시에게 칭얼거리듯 말했다.

“같이 가 줘!”

숲에 들어가 볼일을 마치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을 때였다.

눈을 감아도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금방이라도 저 멀리 어디선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불쑥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도 평소라면 꾹 참고 눈을 감은 채 양을 한 마리씩 세기 시작했을 터이지만 오늘은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아가씨...자요?”

낸시의 부름에 비욘느는 금세 눈을 뜨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안 자! 낸시도 잠이 안 와?”

“...그러네요.”

“그럼 뭔가 이야기라도 할까? 아까 하던 이야기 뒷이야기도 있는데...”

“이..이번엔 제가 할게요!”

낸시는 열심히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뜻을 강하게 어필했다.

“낸시네 마을에도 무서운 이야기 있었어?”

있기야 있었지만 낸시는 이야기가 시작되면 대부분 피해 다녔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온전히 아는 것은 좀처럼 없었다.

물론, 알고 있더라도 지금 해줄 생각도 없었다.

“그런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해요.”

“그럼 어떤 이야기?”

“......”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까?

낸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비욘느 아가씨와는 공통 관심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촌에서 자라 매일 빨래하고 심부름 하는 나날을 보낸 낸시와 곱게만 자란 귀족 영애의 관심사에 겹치는 부분이 과연 있을까?

그때, 낸시는 로드리고를 떠올렸다.

비욘느 아가씨는 로드리고 도련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그걸 해드리자.

아가씨께서 기대하시는 그런 멋진 이야기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는걸.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다시 무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말리라.

“로드리고 도련님 이야기 해드릴 게요.”

“정말?!”

헤나로는 눈을 반짝이며 낸시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그래도 좋아. 검은 누구에게 배운 거야?”

“그..글쎄요.”

“낸시도 몰라?”

“몰라요. 저는 도련님이 나무 막대기로 장난치던 것밖에 본적이 없는 걸요.”

“그럼 비밀리에 배웠을 거야. 그렇게 막대기로 장난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 굉장한 고수한테 받은 수련이었던 거지.”

정말 그랬을까?

낸시는 예전에 로드리고가 자신을 막대기로 쿡쿡 찌르며 놀려대던 것이 떠올랐다.

그게 검술 수련이었다고?

어딘가 억울해지는 기분이다.

“정말...그랬을 까요?”

“그럼! 확실해! 검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거든! 내가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어!”

“그..그럼 그런 걸로...”

미심쩍은 표정으로 낸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비욘느는 허공중에 주먹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어쩌면...어쩌면 말이야, 로드리고는 정말로 대륙 10강 중 한 명한테 배웠을 지도 몰라. 어느 날 길을 가던 그 사람이 로드리고를 발견한 거지. 그리고 로드리고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거야. 그래서 곧바로 사제 간의 연을 맺고 수련이 시작되어 버리지. 어때? 굉장하지 않아?”

“그런 가요?”

낸시는 어느 부분에서 굉장한지 몰라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 나도 하루 빨리 그런 기연을 얻었으면 좋겠어! 나도 분명 재능이 있을 텐데...로드리고가 그랬거든. 나 재능 있다고 말이야.”

“도련님이요?”

낸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래. 로드리고가 떠나기 바로 전날에...그렇게 말했어.”

비욘느의 한창 고조되던 목소리가 이내 한풀 꺾이고 만다.

“...바보...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거야...분명 계속 가르쳐 주기로 했었는데...”

낸시는 그런 비욘느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아가씨 말대로 도련님은 바보예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죠. 우리가 찾는 수밖에...”

“...응! 찾아서 반드시 날 다시 가르치게 만들 거야...”

두 소녀의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가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낸시의 표정이 굳었다.

비욘느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물었다.

“왜 그래?”

“뭔가 소리 나지 않았어요?”

“글쎄...난 잘 모르겠는 걸?”

“제가 잘못 들은 걸까요? 부스럭 거리는 소리...방금 난 것 같았는데...”

“바람 소리 아니야?”

“그거랑은 달랐던 것 같아요. 에린 공자님을 깨워야 할까요?”

“흥! 하지만 뭔가 일이 생겼어도 에린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걸? 무지 약하니까. 그래도 뭐...잠깐 시간은 벌어 주겠지. 깨우려면 깨워. 하여간 이럴 때, 잠이나 자고 있다니...”

낸시는 서둘러 에린을 흔들어 깨웠다.

“공자님? 에린 공자님, 일어나세요.”

눈썹이 잠시 꿈틀거리더니 그가 눈을 떴다.

“..으음...무슨 일이요?”

여전히 피곤한 음색으로 그가 묻는다.

“뭔가 이상한 소리가...”

그러나 낸시의 목소리는 다음에 이어진 우악스런 사내들의 웃음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으하하하하! 이런 곳에서 애기들이 불 피워 놓고 뭘 하는 거야? 요즘은 소꿉장난도 야간에 하냐?”

“크..크크큭...혀...형! 그...그거...차..참 재..재밌다! 우..웃겨! 아...아주 웃겨! 크..크크큭...크큭...”

사내들은 어느새 숲에서 튀어 나와 낸시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들거리는 폼이나 경박한 웃음소리가 사내들에 대한 경각심을 더욱 높여 준다.

에린도 대충 상황을 눈치 챘는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형이라 불린 사내가 휘파람을 불고는 말했다.

“아이고 무서워라~! 그런 위험한 장난감은 그만 집어넣어둬라 응?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친절하게 대해 줄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애들은 애들답게 막대기나 가지고 놀면 되는 거란다.”

일렁이는 불빛에 비춰진 사내는 입가에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그 모습에 에린은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낸시와 비욘느를 자기 뒤로 물리며 사내들을 마주한다.

사내는 결국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꼬마야, 우리는 나쁜 사람들 아이야. 그냥 불빛이 보이 길래 인사나 나누려고 다가왔는데 네가 이러면 우리가 얼마나 섭섭하겠냐? 응?”

“마..맞아! 우...우리 서..섭하다~! 아주...서...섭하다!”

동생 쪽은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게다가 지능도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덩치가 무척이나 컸는데 보통 사내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았다.

형 쪽이 빙그레 웃으며 자기 허리에 찬 칼을 풀었다.

그리고 동생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동생도 형과 똑같이 한다.

에린은 더욱 긴장해서 어깨에 가득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사내들의 행동은 뜻밖의 것이었다.

형이 에린의 발 앞에 검을 검 집채로 던진 것이다.

동생도 똑같이 따라했다.

다시 형 쪽이 입을 열었다.

“봤지? 그렇게 겁먹을 것 없어. 뭔가 먹을 것이 남았다면 좀 얻어먹을 수 있나? 응?”

사내들이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모닥불 주변에 앉아 버린다.

마치 여전히 칼을 들고 잔뜩 긴장해 있는 에린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에린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칼을 겨누며 말했다.

“아..아직 당신들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오! 여..여기서 그만 떠나 주시오!”

“그냥 배가 고플 뿐이야. 산에서 예기치 않게 길을 잃어서 말이야. 겨우 불빛을 보고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이렇게 박대해서야 사람도 아니지. 그냥 요기할 것 조금만 나눠주면 돼. 응? 그럼 곧바로 떠날 테니까. 불로 몸도 조금 녹이고 말이야. 그러면 더 있어 달라고 부탁해도 그대로 떠난다니까?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말자고. 응? 그때까지 우리 무기는 네가 맡아두고 있으면 되잖아? 그리고 그 살벌한 쇠붙이 좀 그만 집어넣고.”

에린은 사내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기가 괜히 일을 크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지 신뢰가 가는 형색은 아니지만 먹을 것을 조금 대접하는 것쯤은 그렇게 곤란한 일도 아니었다.

정말로 산에서 길을 잃어 해매다 겨우 빠져 나왔다면 조금 친절을 베푸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는 결국 검을 다시 검 집에 집어넣고, 낸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낸시양, 저들에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만들어 줄 수 있겠소?”

낸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목발을 짚고 절뚝이며 사내들이 앉아있는 불가로 다가갔다.

“절름발이?”

사내는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듯 낸시를 향해 물었다.

낸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던 에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무례하군!”

“뭐가? 저 꼬마 아가씨가 절름발이라 무례하다는 거야? 하지만 그건 저 아가씨도 원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걸로 무례하다고 말하면 불쌍하군.”

“그런 의미가 아니오!”

괜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한 소리에 에린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소리쳤다.

“아아! 그럼 내가 굳이 절름발이라고 말해서 무례하다고 말한 모양이군. 신경 쓰지 마. 내 동생은 바보에다 말더듬이지만 보라고! 항상 웃고, 나름 행복하니까. 일일이 그런 거 신경 쓰지 말자고.”

“흥! 어서 먹고 떠나시오.”

“하하! 음식이 만들어져야 먹고 떠나지. 이것 참 성격이 급하군 그래. 이참에 통성명이나 하지? 나는 콜린, 동생은 피터야.”

“통성명 따위는 되었소.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알려줄 이름 따위는 없으니까.”

“이것 참...평가가 사정없군 그래. 하하!”

“헤헤...펴..평가 사정없다. 헤..헤헤...사..사정 어..없다.”

콜린이 말했던 것처럼 피터는 정말 잘 웃었다.

어느새 스프가 완성되었는지 그녀가 사내들에게 접시를 건넸다.

사내는 순식간에 접시를 비웠다.

그리고는 낸시가 곁에다 놔두었던 목발을 아무런 말도 없이 집어 들고는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낸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돌려달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걸 보고 에린이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이 다가가 소리쳤다.

“뭐하는 거요?!”

“그냥 좀 살펴보는 거야. 헤에...이거 꽤 잘 만들어 졌는데?”

“그만 낸시 양에게 돌려주시오!”

“아, 알았어. 그렇게 열 좀 내지 말라고. 어? 그런데 저거 뭐야? 늑대 아니야?!”

사내가 손가락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하자 에린도 서둘러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억~!

에린은 뒤통수에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한순간 그의 망막에 목발을 휘두른 듯한 사내의 모습이 맺혔다.

다리에 힘이 빠져 나갔다.

정신을 잃기 전 사내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흥! 건방진 꼬마 새끼! 말 한번 싸가지 없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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