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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76화 (176/200)

00176  여행길에서(3)  =========================================================================

콜린은 피곤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코를 골며 잠들었다.

피텨는 그 후에도 소리를 죽여 어린애처럼 훌쩍였다.

그의 커다란 어깨가 간간이 들썩이는 모습을 낸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어떻게 될까?

낸시는 차마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없었다.

라몬에게 당했던 그날 밤의 일이 떠오른다.

머리를 흔들어 보아도 그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도 비욘느 아가씨와 에린 공자님은 정신을 잃고 있다.

‘내가 어떻게든 해야 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두 손은 묶여 있다.

하지만 손이 자유롭더라도 내가 저 사내가 하려는 일을 과연 막을 수 있을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저자가 굳이 내가 보는 앞에서 피터라는 사내를 때린 건 나를 협박하기 위해서다.

솔직히 두렵다.

그래도 나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저기...아저씨?”하고 낸시는 피터를 불렀다.

하지만 피터는 자기를 부른다고는 생각지도 않았는지 고개를 들고 좌우를 살폈다.

누군가 여기에 온 것은 아닌지, 혹은 콜린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아..아무도 없잖아? 노..놀리면 화낸다.”

피터는 입술을 불퉁 내밀며 볼맨 소리를 냈다.

“놀린 거 아니에요. 아저씨를 불렀을 뿐이에요.”

“내...내가 아저씨?”

피터는 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낸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텨는 자기가 아저씨라고 불려서 좋은지 아직도 눈가에 물기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드러내 보이며 씨익 웃었다.

“헤...헤헤..왜 부...불렀냐?”

“이거 풀어주면 안 돼요?”

낸시는 자기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피터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혀..형한테 혼난다. 나..나는 혀..형 없으면 모..못산다. 구..굶어 죽는 다고 해..했다.”

낸시는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굶어 죽지 않아요. 제가 먹을 걸 계속해서 만들어 줄게요.”

“네..네가 만든 음식...마..맛있다.”

“그래요. 맛있는 음식 계속 해줄 거예요. 그러니까 굶어 죽지 않아요. 아저씨 혼자서도 충분히 살 수 있어요.”

“나..나 혼자서도?”

피터는 미간을 좁히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지금까지 무조건 참이라고 생각했던 사실이 낸시와의 대화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점점 복잡하게 변하는 그의 표정을 지켜보던 낸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배고프지 않아요? 조금 더 먹고 싶지요?”

피터의 표정이 금세 밝게 변했다.

“머...먹고 싶다.”

낸시는 자기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럼 이걸 풀어줘요.”

“그...그래도...혀..형이 알면...”

피터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한다.

“하지만 먹고 싶잖아요? 그렇죠?”

“머..먹고 싶다. 하...항상 뭔가 먹고 싶다.”

“그럼 이걸 풀면 되요. 아까 먹은 것보다 훨씬 맛있는 걸 먹게 해줄게요.”

“더..더 맛있는 걸?!”

피터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입가에는 침이 흘러 내렸다.

“자요! 어서 먹고 싶지요?”

낸시는 자기 손을 흔들어 보였다.

피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낸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낸시 곁에 쪼그리고 앉아 묶여있는 줄을 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지 금세 울상을 짓고 만다.

“아..안 돼...크윽...나는 또...아..안 돼...”

입술을 뒤틀며 울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낸시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다독였다.

“이건 매듭이 복잡해 보여요. 저라도 쉽게는 풀 수 없을 것 같은 걸요. 어른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렇게 속상해 하실 필요 없어요.”

“그..그럼 내 잘못 아니야?”

“그럼요. 누구 잘못도 아니에요. 그보다 힘들면 뭔가 줄을 끊을 수 있는 걸 찾아보는 것이 어때요?”

“그...그렇지! 나..나도 그러려고 했다. 저..정말이다.”

“알아요.”

“헤..헤헤...너..너랑 이야기 하는 거...차...참 좋다. 헤...헤헤...”

“저도 좋아요.”

“!!!”

피터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고개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그러고도 제대로 진정이 되지 않는지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워한다.

“크으으...피터 가...가슴이 마구...쿠...쿵쾅 거린다. 여기...여기가 좀 이...이상하다.”

피터는 자기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제 손을 풀어주면 뭐가 잘못 되었는지 봐드릴게요. 어때요?”

“자...잠깐만 기다려라.”

피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콜린 근처에 놓여있는 무구를 발견했다.

전부 세 개였는데 하나는 피터 본인의 것이었고, 다른 두 개는 콜린과 에린의 것이었다.

피터는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자기 검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본인의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컸는지 낸시와 검을 쳐다보고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더니 에린의 검도 같이 집어 들었다.

마치 자기가 생각한 것이 맞는지 낸시에게 허락을 구하듯 그가 에린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이...이게 좋을 것 같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낸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피터는 자신감이 넘치는 듯 밝게 웃었다.

피터는 곧바로 낸시를 포박하고 있는 끈을 칼로 잘라냈다.

큰 손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조심스런 손짓이었다.

낸시는 손이 자유로워진 후에도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피터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댄 것이었다.

피터는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가만히 앉아서 낸시의 말을 기다렸다.

그의 가슴은 무척이나 힘차게 뛰고 있었다.

낸시는 가만히 손바닥 끝에서 전해져 오는 그의 고동을 느꼈다.

“이상한덴 없어요.”

“하...하지만 여기 이...이상하다. 펴..평소랑 다르게 뭐...뭔가 가..간질간질하고...또...또....암튼 이상하다.”

“심장은 힘차게 뛰는 걸요. 아주 건강해요. 이런 건 잘 모르지만 분명 그렇다고 생각해요. 일단은 뭐라도 먹을 걸 만들어 드릴게요. 그럼 이상한 게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피터는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게 좋겠다.”

“좀 더 나무가 필요해요. 주어다 줄 수 있어요?”

“이..이런 거?”

피터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들고는 물었다.

“예. 이런 거면 되요.”

“무...문제없어.”

그렇게 피터는 숲 속으로 사라졌다.

다행히 에린 공자의 칼은 그대로 바닥에 놓여 있었다.

낸시는 칼을 품에 안은 채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서 움직임을 멈추고 콜린의 반응을 살폈다.

잠시 동안 멈추었던 그의 코고는 소리가 다시 울린다.

낸시는 한숨을 내쉬며 에린과 비욘느 곁으로 다가갔다.

우선 둘의 밧줄을 끊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에린을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에린은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낸시는 마음이 급해지는 걸 느꼈다.

조금 있으면 피터가 돌아올 것이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커다랗게 고함을 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콜린은 순식간에 눈을 뜨고 화를 내며 폭력을 행사할 것이다.

자신의 멀쩡한 다리에 시선이 머문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발...제발 일어나요...제발...

깊게 숨을 들이쉬며 스스로를 달랬다.

괜찮아...괜찮을 거야.

나쁜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야.

곧 에린 공자님도...그리고 비욘느 아가씨도 정신을 차리고, 이곳에서 몰래 도망가면 돼.

하지만 내가 제대로 도망갈 수 있을까?

목발을 짚고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피터는 지금 어디쯤일까?

벌써 돌아오는 중은 아닐까?

하아...하아...하아...

피터가 말했던 것처럼 낸시도 자기 가슴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숨이 멎을 것처럼....지금 잠에 취해 있는 콜린이 자신의 커다란 고동 소리를 듣고 번쩍 눈을 뜰 것만 같다.

무서워...그날처럼...너무 무서워...

그녀가 혼란스런 정신을 수습하려고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뭐야?! 너 왜 손이 풀어져 있어?!”

어느 샌가 콜린의 코고는 소리는 멎어 있었다.

낸시는 고개를 돌렸다.

자다 일어나서 그런지 벌겋게 충혈된 것 같은 눈으로 콜린이 낸시를 노려보았다.

낸시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콜린은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씨발! 피터 병신 새끼는 어디 간 거야?! 아...진짜...짜증나게...”

콜린은 낸시 곁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그녀의 뺨을 올려쳤다.

짜악~!

낸시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얼굴을 땅에 처박았다.

하지만 그걸로 그의 폭력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습냐?! 응?! 우스워?! 내가 병신이라 특별취급 해줬지?! 응?! 그런데 이년이 날 배신해?! 응?!”

퍽! 퍼억!

콜린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낸시는 몸을 둥글게 말고 그의 발길질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무서웠다.

이 폭력이 끝나고 나면 또 다른 폭력이 이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앉은뱅이가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두려움에 소리죽여 울었다.

갑자기 또 다른 고함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하...하지 마~~~!”

쿠웅!

낸시가 고개를 들자 피터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곧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낸시를 때리고 있던 콜린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처박혀 몸을 가누지 못한다.

낸시의 시선을 받자 피터가 두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채 중얼거렸다.

“내...내가 아니야...나...아니야...크흑...자..잘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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