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8 여행길에서(4) =========================================================================
로드리고는 두 눈을 번쩍 떴다.
이미 날은 밝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가 중천이란 의미는 아니다.
새로 얼굴을 보이는 해와 흐릿한 모습을 남긴 채 마지막 떠날 채비를 하는 달이 동시에 떠있는 시간이다.
로드리고는 우선 자신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간밤에 악독한 호레의 손길이 자신을 더럽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로드리고는 씨익 미소 지었다.
자신감이 생겼다.
검의 신전에서 황혼의 기사에게 충분히 지도를 받은 것이다.
호레는 강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변태일 뿐이고, 황혼의 기사한테는 적수가 되지 못한다.
물론, 그가 직접 와서 호레와 싸워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가르침은 로드리고에게 큰 진보를 가져왔다.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엘가는 구수한 냄새를 피우며 스프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호레와 기사가 각자 몸을 풀고 있었다.
호레는 검집채로 검을 휘둘렀고, 기사는 검을 뽑은 채였다.
그러나 둘이 실력을 겨루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각자 동떨어져 몸을 풀 뿐이다.
그리고 마부는 두 눈을 뜨고는 있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는 힘든지 여전히 누운 채였다.
샬롯은 몸이 멀쩡해 보였지만 눈도 뜨지 않고 있다.
각자 제각각의 행동을 보이고 있지만 역시나 로드리고의 관심을 가장 끄는 것은 호레였다.
로드리고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지금까지 네놈이 보인 그런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행동은 여기서 끝이다.
이젠 내가 네놈을 무릎 꿇게 하고 한껏 비웃어 주지.
하지만 뭐, 급할 것은 없지.
일단은 식사부터 할까?
로드리고는 씨익 웃으며 엘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엘가도 싱긋 웃으며 로드리고에게 처음으로 스프를 떠서 건네주었다.
로드리고가 식사하는 것을 보고는 호레도 몸 풀던 것을 멈추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런...이런...아직 어른들이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먼저 식사를 하면 안 돼지.”
호레는 가볍게 로드리고의 머리를 때렸다.
딱히 아프지는 않았지만 로드리고는 기분이 상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얼빠진 미소를 지어보이며 헤헤 거렸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이미 자신감은 최고치를 찍고 있다.
뭔가 삐딱한 한마디를 톡 쏘아주고 싶었지만 사전에 경계를 하게 해서 좋을 것은 없다.
일단 살짝 어금니를 꽉 깨물고 감정을 삭였다.
“죄송합니다. 아직 몸을 더 푸실 것 같아서...금방 끝나실 걸 알았으면 당연히 기다렸죠.”
로드리고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호레는 웃음을 터트리고는 엘가에게 스프를 받았다.
“그냥 해본 소리다. 많이 먹어라. 그래야 네 맘 때는 쑥쑥 자라는 법이니까.”
그 후로 차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기사도, 그리고 잠만 쳐 자던 샬롯도...
마부에게는 엘가가 직접 그릇을 가져다주고 몸도 일으켜 주었다.
마부는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런데 저놈 챙기는 건 기사나 샬롯이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로드리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딱히 그걸 문제삼아 주제거리로 꺼내 놓지는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그의 앞에 놓여 있다.
로드리고는 호레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식사를 마쳤고, 딱히 뭔가 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 지금쯤이 딱이겠군.
“저기...호레님?”
로드리고가 부르자 호레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뭐냐?”
저 여유...어딘지 열이 받는다.
자기가 절대 강자라고 착각하는 거 아니야?
웃기는군.
어제의 내가 아닌데 아직도 날 그런 약해빠진 꼬마로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크크큭.
“어제는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실력이셨죠. 제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분들 중 단연코 최고라고 할만 했습니다.”
로드리고의 칭찬에 호프레는 기분이 좋아졌다.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올라갔다.
“그..그래? 하..하하하! 뭐, 내가 좀 뛰어나긴 하지. 이것 참...쑥스러운데? 하하하!”
로드리고의 이마에 살짝 혈관마크가 돋아났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데 오늘도 다시 대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어제 대결로 깨달을 것이 있어서 좀 확인해 보고 싶은데...”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뜸을 들이나? 하하하! 당연히 봐줘야지. 아주 유망한 어린 새싹인데 말이야. 하하하하!”
호프레는 생각했다.
놈! 결국 이렇게 해서 내 제자로 들어올 생각이구나.
이런 알량한 녀석! 하하하!
어제까지 고민하던 내 자신이 바보 같군.
이게 제대로 된 수순이지.
이렇게 적당히 대결해 주고 나면 곧바로 내게 무릎을 꿇고 제자를 삼아달라고 빌기 시작할테지.
음하하하하!
하지만 이런 로드리고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엘가가 그의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이미 끝난 일이잖아? 로드리고 너는 충분히 강해. 그러니까...”
로드리고는 엘가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건 꼭 필요한 일이에요. 그리고 걱정하지 말아요. 저는 지지 않으니까.”
“그냥...그냥 하지 않으면 안 돼?”
“걱정 마요.”
로드리고가 엘가의 손을 꼭 한 번 잡아주고는 호레와 마주섰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역시나 로드리고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만히 서있을 뿐인데도 호레에게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에 힘을 준다.
나는 어제와 다르다.
지금은 이길 수 있어.
황혼의 기사를 믿자.
그리고 어제 검의 신전에서 열심히 연마한 내 자신의 실력을 믿자.
그런 둘을 지켜보며 엘가는 눈을 꼭 감고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로드리고가 무사하기를 빌었다.
마부도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괴물 같은 사내와 꼬마가 대결을 한다고?
당연히 말리고 싶었지만 그 못지않게 끼어들고 싶지 않은 마음도 강하게 밀고 올라왔다.
그래도...어린애는 심하게 때리지는 않겠지.
샬롯은 별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가끔 하품도 한다.
기사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저 꼬마는 저 사내의 제자일까?
그렇다면 이걸 통해 조금 더 저 사내의 실력을 살펴볼 수 있을까?
어제 마차를 날려버린 괴력...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자란 말인가?
그나저나 내가 괜히 나설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딱히 이길 자신도 없고...
이번에도 공격은 로드리고가 먼저 시작했다.
딱히 서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호레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로드리고가 직선으로 빠르게 달려들었다.
둘 사이에 있던 공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올곧은 주먹이 호레의 얼굴 정면을 향했다.
어린 아이의 주먹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무서운 파공음이 울렸다.
하지만 호레는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막아낸다.
아니, 막은 정도가 아니라 로드리고의 주먹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한 손이 잡히면 당황할 법도 한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로드리고 그대로 발차기를 날렸다.
호레는 그것도 가볍게 팔꿈치로 막아낸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진 로드리고의 머리 공격에 잡고 있던 주먹을 놔주며 거리를 벌렸다.
“대체 뭘 깨달았다는 말이지? 어제와 달라진 것도 없군. 형편없는 실력이다.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몰라도 얻어맞고 다닐 법한 실력임이 분명해. 보다 뛰어난 스승을 만나야 하겠군.”
호레의 말에 기사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저자는 소년의 스승이 아니란 말인가?
그러나 아직은 제대로 된 사정을 알 길이 없다.
로드리고는 피상적인 공격을 몇 번이고 주고받았다.
호레는 확실히 어제보다 공격이 깔끔해 졌다고 생각했다.
어제의 로드리고가 뛰어난 신체 능력을 기반으로 공격한 것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제대로 된 격투술의 기본을 배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설마 어제의 대련으로 그런 것을 혼자서 터득했단 말인가?
형편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확실히 어제보다 훨씬 나은 실력이다.
그래봤자 호레에게는 별것 아닌 실력임에는 분명하지만...
점점 더 욕심이 나는군.
소싯적의 나를 생각하게 하는 재능이다.
그러나 더 이상 보여줄 것이 없다면 이정도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지.
호레가 서서히 반격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로드리고의 손발이 어지러워진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호프레가 로드리고의 가슴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을 때였다.
호프레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공격이 대련의 끝을 내줄 거라는 걸.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로드리고의 몸이 빨라진다.
호프레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호프레는 경악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