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9 여행길에서(4) =========================================================================
로드리고는 호레가 내민 팔을 타고 오르듯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로드리고도 알고 있었다.
호레는 분명 이번 공격을 마지막으로 나와의 대결을 끝내려고 했다.
그만큼 호레가 불쑥 내민 손은 로드리고의 움직임을 봉쇄하기에 시기적절했고, 위협적이었다.
적지 않은 힘이 호레의 손에는 담겨 있었다.
그러나 현재 로드리고의 속도는 지금까지 보인 움직임에 비하면 족히 두 배 이상 빨랐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
호레의 미간이 좁아진다.
그걸 보고 로드리고는 호레가 당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 공격은 틀림없이 먹힌다.
나는 그걸 알 수 있다.
아직도 정식으로 호레와 붙는다면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은 로드리고도 안다.
그럼에도 이미 상대방의 전력을 암묵적으로 정해 놓은 상태에서 호레는 실수를 저지른 셈이다.
로드리고의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눈동자에는 희열의 빛이 맺혔다.
물론, 부담도 있다.
아마 대련이 끝난 후에는 근육통으로 한동안 곤란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인지 능력을 뛰어넘는 스스로의 속도에 두통이 밀려왔다.
그래도 그런 부담을 충분히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다.
내 순결을 위협하는 저 사내에게 나의 능력을 보여 쉽사리 욕망을 채우지 못하게 할 수 있다.
또한 나와 엘가를 노예로 팔려는 생각도 접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만족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내 스스로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
나는 절대로 약하지 않다는 자신감...
휘둘러 치듯 몸의 회전과 함께 힘을 더하여 로드리고의 팔꿈치가 호레의 턱을 노린다.
로드리고는 몸을 비틀며 마지막까지 호레를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다.
호레에게 내 공격이 통하는 그 순간을 말이다.
그러나 로드리고의 공격이 호레의 턱에 닿기 바로 직전 호레의 흔들리던 눈빛이 차갑게 식어 버린다.
그와 동시에 로드리고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래도 지금 와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지척에서 휘둘려지는 공격을 막을 수는 없다.
그가 아무리 강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야.
나는 믿는다.
이번 공격이 성공하리란 사실을!
내 능력을 내가 믿지 않는다면 그 순간 이미 실패이지 않은가?
로드리고는 이를 악물며 그 찰나의 시간에 더욱 가속을 가한다.
그러나 대개 그렇듯 불길함은 들어맞게 마련이지 않던가?
거짓말처럼 호레의 움직임은 로드리고의 공격을 훨씬 상회하는 속도를 보인다.
다 성공했다고 자신만만하던 로드리고의 공격은 호레는 턱을 살짝 비트는 것으로 무위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로드리고는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고?!
그를 지금 지탱해 주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다시 한 번 꼴사나운 모습으로 땅바닥을 굴러야 하는가?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실력은 늘겠지.
그래도...그래도 이기고 싶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는 않다.
나는...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어!
미래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도 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나는...
나는 아직 무너지지 않는다!
아직도 내 몸에는 회전력이 남아있다.
이를 악물며 마지막 발악을 하듯 몸 안에 흐르는 마나를 폭발시켰다.
황혼의 기사가 알려주었던 마나 로드를 타고 규칙적인 경로로 마나는 흘러 나갔다.
그러나 그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양을 상회해 버린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규칙한 길로 치닫는 마나도 존재한다.
심장의 박동이 순간적으로 빨라진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구토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주변의 모든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한다.
두통은 참기 힘들 정도로 심해졌다.
세상이 멈추었다.
물론 로드리고 자신도 멈추고 만다.
다만 스스로의 사고만은 여전히 뚜렷하다.
평소에 느끼기 힘들던 감각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몸 안의 혈류가 톡톡히 느껴진다.
심장의 고동이 아주 느리고 요동치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심장은 채 한 번의 움직임도 다하지 못했지만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얼굴을 스치고 있는 바람과 그 안에서 나부끼는 솜털까지도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그러나 참기 힘든 두통은 그런 감각과 분리되어 로드리고를 괴롭혔다.
느리지만 나는 지금 움직이고 있다.
멈추어 버린 세상...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 것처럼 한없는 우월감을 일순간 느낀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오래가지 못한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호레를 통해 로드리고는 그걸 깨달았다.
자신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 멈추어 버린 세상을 깨뜨려 버린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이젠 지더라도 좋다.
마지막까지 내 최선을 보이자!
나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
내가 꺾이는 때는 포기했을 때이지 졌을 때가 아니야!
하지만 그런 로드리고의 결심에도 현실은 냉혹했다.
로드리고의 공격은 호레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그리고 호레가 내민 주먹에 가슴을 얻어맞고 몇 바퀴나 땅바닥을 굴렀다.
다시 버리적 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던 로드리고는 피를 토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만다.
하지만 이겨버린 호프레도 결코 만족스런 표정은 아니었다.
그는 몹시도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꾹 쥐어진 자신의 주먹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젠장...꼬마를 상대로 진심으로 하고 말았다.
대체 그 움직임은 뭐란 말인가?
한순간 로드리고의 움직임이 빨라진 것만 해도 그를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곧 이어진 로드리고의 움직임은 조금 전의 놀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그건 분명히 시간을 쪼개는 움직임이다.
한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라면 모를까 저런 꼬마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꼬마의 스승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자일까?
아니...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이 되지 않는다.
스승이 아무리 뛰어나도 저런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천재?
나도 천재란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호프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튼 저런 꼬마를 상대로 진심을 내보이면 어쩌자는 거야?
정말 꼴사납군.
이런 건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겠어.
두어 차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호프레는 로드리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쓰러진 로드리고를 엘가가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였다.
호프레가 엘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좀 살펴보지.”
그러나 엘가는 거칠게 어깨를 움직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저리 가요! 저리 가란 말이에요!”
호프레는 좀 더 고집을 부려 로드리고의 상세를 살피고 싶었지만 엘가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런 생각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의 비난하는 시선에 스스로를 향한 자책감이 물밀 듯 밀려온 것이다.
“나...나는...”
뭔가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도무지 무슨 변명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어른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프레는 주저하다가 결국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 결국 뒤돌아 어깨를 늘어뜨린 채, 큼지막한 나무 곁에 가서 주저앉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래서는 제자를 삼지 못해도 할 말이 없겠군.
그러나 정말 욕심나는 녀석이다.
어쩌면 내 검술을 뛰어넘는 새로운 검술을 만들어 낼지도 몰라.
아니...아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나란 놈은 이런 상황에서도 내 욕심만 채우려 한단 말인가?
정말 한심하군. 너무도 한심해!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됐단 말인가?
지금은 내 실수를 반성하고 로드리고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것이 우선이다.
제자를 향한 욕심 따위는 내려놓아야 해.
그때,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호프레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바로 기사 미하일 경이었다.
저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마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 던진 것만 해도 충분히 놀랄만한 것이었지만 방금 전 저 소년과 대련하며 보인 움직임은 그 이상이지 않은가?
물론, 소년의 움직임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내 수준에서는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지만 나 같은 것이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실력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리고 저런 절도 있는 움직임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용병 따위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국 10강 중 하나일까?
좀처럼 정체를 짐작할 수 없군.
그러나 저런 실력자와 인연을 만들어 놓는 것은 나 같은 자에게는 다시없는 행운이다.
기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호프레의 곁에 가서 섰다.
여전히 호프레는 머리를 부여잡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미하일 경이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대련을 하다보면 이런 경우도 있는 것 아니겠소?”
호프레가 고개를 들어 미하일 경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심히 불쾌해 보인다.
꿈틀거리는 미간의 주름이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미하일 경은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괜한 소리를 한 것일까?
호프레가 상당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위로하려 하지 마시오. 그냥 날 내버려 두시오.”
미하일 경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던 말투는 어느새 평대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미하일 경은 그걸 탓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가 정체를 숨기려 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것을 아무래도 좋다는 분위기가 풍겼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좋다.
미하일 경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것이 미하일 경의 발길을 자꾸만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