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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80화 (180/200)

00180  여행길에서(4)  =========================================================================

미하일 경은 주저하다가 그대로 호프레의 곁에 머물렀다.

흔치 않은 기회를 이렇게 날려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몸을 단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오. 내 비록 실력은 형편없을지 모르나 지금껏 대련 중에 다친 일로 상대방을 탓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소. 저 소년도 상당한 실력으로 보이는데 분명 그 정도 각오는 서있지 않았겠소? 당신은 소년을 계속 어린아이인 채로 놔둘 생각이오? 그런 것은 성장을 방해하는 행위요. 다쳤더라도 좀 쉬면 금세 나아질 테니...”

그러나 미하일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호프레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고 했지? 날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나? 그만 가라.”

미하일은 그제야 호프레의 곁에 머무는 것이 자신의 의도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조금 전 말투는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걸 책잡아 모험을 강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샬롯이 끼어들고 만다.

“이봐! 당신?! 지금 뭐하는 거야?! 우리 아빠가 정중하게 대해줬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좀 강하다고 기고만장해서는...우리 귀족이거든?! 눈이 있으면 그 정도는 알아야지! 예의를 지키란 말이야!”

호프레는 검지 손가락을 들고 자신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곧 그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맺힌다.

지금까지 자리에 앉아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뭐야?! 한 번 해보겠다는 거야?!”

호프레가 일어섰음에도 샬롯은 조금도 기죽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샬롯을 노려보며 그가 말했다.

“겁이 없군. 그렇다면 가르쳐 주마.”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호프레를 중심으로 엄청난 압박감이 휘몰아 쳤다.

샬롯도 그리고 기사도 순간적으로 사색이 되어 숨을 쉴 수 없었다.

“경고 하지 않았나? 날 혼자 내버려 두라고. 내가 한 일이 잘한 일인지 혹은 잘못한 일인지는 내 스스로 판단한다. 그건 내가 나의 능력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찮은 네 경험의 잣대로 나를 재단하려 하지 마라. 나는 내 스스로의 잣대를 가지고 있다. 반성하는 것도, 후회하는 것도 내가 결정한다. 네 위로가 내 잣대를 흐리게 하는 일 따위는 없다. 물러가라.”

미하일과 샬롯을 옥죄던 기운은 호프레가 등을 돌림과 동시에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에도 미하일과 샬롯은 한동안 제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기운은 단 두 명에게만 집중되었던 듯 마부나 엘가는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자신에게 기운이 집중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부는 몸을 떨었다.

호프레의 말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색이 되어 버린 미하일 경과 샬롯 양의 모습을 보았을 때, 자기가 모르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있다간 이 한목숨 제대로 부지하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적당한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가 쉬고 싶었다.

그러나 부상을 입은 이런 몸으로는 불가능하다.

마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호프레와 로드리고가 대련을 한 것은 아침식사를 마친 직후였지만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점심나절이 되었다.

하지만 엘가는 음식을 만들지 않았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로드리고 곁에서 그의 이마를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답답함을 느낀 것은 샬롯이었다.

딱히 엘가가 만든 음식이 맛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침을 조금밖에 먹지 않아 몹시도 배가 고팠다.

원래대로라면 미하일 경과 샬롯의 식사는 마부가 담당했지만 그는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라 음식을 만들라고 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짐도 대부분 호프레가 마차를 집어 던짐과 동시에 상당히 손상되어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샬롯은 더 이상 호프레에게 불만을 제기할 수는 없었다.

조금 전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공포를 맛보았다.

몸을 옴짝달싹 하지 못할 정도로 겁에 질려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더 이상 그와는 말을 섞고 싶지 않다.

샬롯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결국 샬롯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엘가에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발로 두 번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야! 점심때잖아? 어서 식사 준비를 하도록 해.”

“......”

하지만 엘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로드리고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샬롯의 미간이 좁아진다.

다시 한 번 발로 톡톡 건드렸다.

“야! 야! 안 들려?”

“......”

순간 샬롯의 마음속에 분이 올라왔다.

이거 뭐야?

이젠 이런 천한 것까지 나를 무시하네?

가뜩이나 저 호레인지 뭔지 하는 사내 때문에 심기도 편지 않은데 정말 짜증나게...

이럴 때는 본때를 보여줘야지!

너 잘 걸렸다!

“야! 야!”

“......”

결국 샬롯은 손으로 엘가의 뺨을 몇 차례나 때렸다.

짝!

짜악!

짝!

순식간에 엘가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걸 보고 호프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조금 전 샬롯의 행동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막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미하일 경이 먼저 나섰다.

“샬롯! 뭐하는 게냐?!”

평소 큰 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 그가 딸을 향해 고함을 쳤다.

하지만 샬롯은 자기는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귀족의 말을 무시하는 천한 것한테 예의를 가르쳐 주는 중이에요.”

미하일 경의 시선이 잠시 호프레에게 머문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못한 채였다.

결국 미하일 경이 샬롯의 손목을 붙잡고는 말했다.

“다시 한 번 이런 일을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하지만 샬롯은 오히려 더욱 목소리를 키우며 말했다.

“지금 저를 혼내시는 거예요?!”

“잘못 했으면 혼이 나야지!”

샬롯이 표독스럽게 미하일 경을 노려보았다.

“귀족이 평민을 교육시키는 것이 잘못이라고요?!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 걸요?!”

미하일 경은 난처한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해라!”

“저는 더 해야겠어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미하일 경이 샬롯의 뺨을 후려 쳤다.

짜악!

단 한 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샬롯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하일 경을 쳐다보았다.

“지금...아빠가 날 때렸어?”

심하게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미하일 경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그저 샬롯의 손목을 붙잡은 채로 그녀를 끌고 자리를 벗어났다.

샬롯의 흐느낌이 바람을 타고 일행의 귓가를 간질였다.

하지만 샬롯에게 대여섯 대는 얻어맞은 엘가는 조금도 흐느끼지 않았다.

여전히 로드리고의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호프레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엘가의 곁으로 다가갔다.

말을 걸기 힘든지 뜸을 들이던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오.”

“......”

호프레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오. 나도 당황해서...설마 이런 꼬마를 진심으로 상대하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내 스스로도 부끄럽소.”

“...당신은...나쁜 사람이에요. 이제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둬요. 제발 그만 괴롭히고...”

엘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가 더 이상 호프레를 무시하지 않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이렇게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서는 여전히 곤란하다.

호프레는 자기는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그저 대련을 했을 뿐이고 뜻하지 않게 이런 결과가 나왔지만 나 역시 무척이나 반성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미 한 말이지 않은가?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엘가가 보았을 때, 호프레 자신은 나쁜 사람이 맞았다.

이런 건 확실히 곤란하다.

차라리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기사단을 상대로 혼자서 싸우는 편이 훨씬 낫다.

우선은 솔직하게 말하자.

지금은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뭐라 해도 내가 잘못한 것은 사실이고, 그걸 나 역시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변명하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여자가 날 용서해 주길 바라는 것뿐이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뛰어난 기사요. 제자를 찾아 오랫동안 세상을 편력했소.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마음에 드는 인재를 얻을 수 없었지. 그러다 어제 운이 좋게도 로드리고를 발견했소.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가씨의 동생은 상당한 재능이 있소. 아니, 그건 재능이라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범주의 것이오. 그래...천재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지. 아무래도 난 좀 흥분했던 것 같소. 마음도 급해졌고.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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