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1 여행길에서(4) =========================================================================
호프레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라면 충분히 로드리고를 훌륭한 기사로 만들 능력이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보다도 더욱 자격이 된다고 자부한다.
지위도 약속할 수 있다.
쉽사리 머리를 숙이지 않고 당당히 살아가는 명예롭고 존경받는 자리를 약속한다.
물론 로드리고의 누나인 아가씨의 생활도 보장하겠다.
원한다면 훌륭한 혼처를 알아봐 줄 수도 있다.
지금 평민의 신분이라던가 재산이 적은 것 따위는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다.
내가 후견인이 되어 준다면 아가씨를 데려가고자 하는 훌륭한 사내들은 줄을 설 것이 분명하다.
분명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실수다.
나 자신을 변호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
다만 어떻게든 사과하고 싶다.
아가씨가 나를 용서해 준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더 가벼워 질 것 같다.
정말 미안하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묵묵히 듣고 있던 엘가는 고개를 저었다.
“사과를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제자가 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도 제가 아니고요.”
“그렇군. 하지만 아가씨에게도 사과를 하고 싶어.”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이제 내가 동생을 살펴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지 않겠나? 염치없는 부탁인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무척이나 걱정이 된다네. 아무래도 내가 진심으로 공격했으니 말이야. 실력이 뛰어난 의사와 비교하면 형편없는 수준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의학적 지식을 알고 있어. 일단은 내게 기회를 줘.”
엘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만 그날 밤 있었던 릭과 한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하지만 저 남자는 지금 사과를 하고 있어.
그리고 대련은 로드리고가 제안한 것이었다.
그건 엘가도 곁에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그래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도무지 감정적으로는 수긍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이렇게 로드리고 곁에서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말이야.
그리고 이것이 로드리고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아.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저 사내에게 맡기자.
마침내 엘가가 자리를 내어주자 호프레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로드리고 곁에 앉았다.
엘가는 멀리 가지 않은 채, 곁에 서서 호프레와 로드리고를 지켜보았다.
호프레는 로드리고를 내려다보았다.
소년의 가슴이 오르내렸다.
다행히 호흡은 규칙적이다.
로드리고의 몸에 손을 대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순식간에 로드리고의 몸 구석구석으로 마나가 침투해 들어갔다.
동시에 호프레의 머릿속에 로드리고의 내부가 그려진다.
로드리고의 마나로드 일부가 찢겨져 있었다.
과도한 운용을 한 탓이다.
기초가 되는 건 누군가에게 배웠던 모양이지만 시간을 쪼개는 기술을 완전히 습득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 기술을 제대로 습득하려면 재능 있다는 자들도 적어도 몇 년은 걸린다.
물론 나는 두어 달 만에 그 극의를 깨달았지만 적어도 저런 소년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내가 그걸 습득한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이지 않던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무리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걸 무의식적으로 운용해 내다니...
도무지 이 꼬마 녀석은 어떻게 되어 먹은 것인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이 소년은 몇 백년간 이어져 온 대륙 강자의 체계를 깨뜨려 버릴 지도 모르겠군.
더 이상 대륙 10강이란 용어는 적합하지 않겠어.
홀로 우뚝 서서 다른 강자들을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오만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겠지.
호프레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 자신도 젊은 시절 꿈꿔본 일이다.
결국 시대를 대표하는 절대 강자가 되긴 했지만 최고가 되진 못했다.
충분히 결코 낮지 않은 경지에 들었지만 그래도 항상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아쉬움이 있었다.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러나 내 꿈은 끝난 것은 아니야.
내가 할 수 없다면...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이 소년의 스승으로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가르쳐 보고 싶군.
내 검술을 계승할 자를 찾았던 것인데 이래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스스로 그 한계에 실망하게 되겠군.
그래도 확실한 것은 현존하는 강자들 중에 이 소년을 제대로 가르칠 자는 많지 않다.
그리고 나 이상으로 잘 가르칠 자는 아마 없을 거야.
설령 있다 해도 나와 비슷한 정도가 고작이다.
이 소년을 가르침으로써 내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다.
대륙 10강의 한 사람이 아니라 대륙 최강자의 스승으로 말이야.
그 정도라면 나쁘지 않군.
호프레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다행히 마나 로드의 일부가 찢겨져 있긴 하지만 이정도 부상은 한동안 요양하면 완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돕는다면 그 시간은 상당히 단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내 공격으로 상처를 입은 곳을 살펴보자.
다시 호프레는 마나의 흐름에 집중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부상의 정도가 너무 미미하다.
오히려 로드리고 스스로 마나를 잘못 운용해서 받은 타격보다도 더욱 미미한 정도다.
물론, 충분히 정신을 잃을 정도의 부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진심으로 했던 공격이지 않던가?
그런데도 겨우 이정도 부상밖에 입지 않았다는 말인가?
소년은 겨우 갈비뼈가 한 대 부러지고, 약간의 내상을 입었을 뿐이다.
혹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내 공격이 약했던 것일까?
당황해서 착각했단 말인가?
아니, 아니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
내 공격의 경중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호프레는 다시 자신의 마나를 거두어 들였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녀석의 몸은 비정상적으로 마나의 농도가 짙다!
호프레는 다시 한 번 마나를 로드리고의 몸에 흘려 넣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다르게 내장이나 근육, 혹은 마나로드에 집중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소년의 마나가 어디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를 살폈을 따름이다.
보통 심장이나 복부 둘 중 하나에 마나를 모으는 것이 일반적인 수련법인데 비해 녀석은 두 곳 모두에 마나의 핵이 자리 잡고 있다.
두 곳을 중심으로 훨씬 유기적이게 마나가 소통하고 빠르게 반응한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누가 이런 것을 가르쳤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상대방에게 노골적인 질투의 감정이 치솟아 올랐다.
아마 자신이 했던 공격도 로드리고가 수련한 마나로드가 가진 특수한 효과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물론, 호프레는 그러한 특수한 효과가 무엇인지 모른다.
마나의 핵을 두 개 운용하는 것은 모든 무인들에게 있어 미지의 영역이다.
그 이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모두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수많은 도전이 이루어 졌지만 실제로 그걸 성공시킨 사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심하면 폐인이 되고, 운이 좋아도 몇 년 치 마나를 잃었다.
결국 모두가 하나같이 말했다.
두 개의 마나 핵을 갖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리고 호프레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이 소년의 몸에는 믿어지지 않지만 두 개의 마나 핵이 존재하고 있다.
머리가 복잡해 졌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머리에 자리 잡았다.
소년의 스승은 대체 누구인가?
설마...모두가 도전했고 실패했던 그 일을 해냈단 말인가?!
아니다.
절대로 그럴 리 없어!
그렇지만 눈앞에 증거가 있다!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가 없다.
설마...그 자가 나보다도 더 고수인건 아니겠지?
호프레는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소년을 제자로 삼을 수 없다는 말인가?
호프레가 심각한 표정을 짓자 엘가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뭔가 잘못 되었나요?”
호프레가 시선을 들어 엘가를 쳐다보았다.
“아니...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곧 정신을 차릴 거야. 그런데 아가씨, 한 가지만 물어보고 싶은데 괜찮겠나?”
엘가는 별로 대답해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혹시 로드리고를 치료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인지도 몰라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리고는 누구에게 수련을 받았지?”
“예?”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엘가가 반문한다.
“동생을 가르친 자 말일세. 가능하다면 꼭 듣고 싶은데 말이야. 나에겐 꽤나 중요한 일이네.”
“...하지만 저는 몰라요. 그런 건...몰라요.”
호프레는 한동안 똑바로 시선을 맞추어 엘가의 눈을 쳐다보았다.
엘가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그녀의 눈빛을 보면서 호프레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결국 로드리고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알 길이 없다는 이야기군.
과연...나는 이 녀석을 제자로 삼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