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2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결국 엘가가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호프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여기에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을 수도 없으니 이젠 슬슬 움직이는 편이 좋겠군. 로드리고에게도 지붕이 있는 여관방이 더 나을 테고 말이야.”
“그럼 저도 준비할게요.”
엘가는 주변에 아직까지 방치된 물건들에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점심은 먹지 않아도 괜찮겠나?”
“별로 배고프지 않아요. 하지만... 배고프시다면 만들어 드릴게요.”
호프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지만 그래도 시선을 피하며 엘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호프레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다지 배가 고프지는 않군.”
둘이 짐을 정리하는 것을 보고 멀리에서 지켜보던 미하일 경이 다가왔다.
호프레가 시선을 주자 미하일 경은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떠날 생각이오?”
“그렇소. 조금 전에는 미안했소. 내가 흥분해서 무례를 범했소이다.”
호프레의 사과에 미하일 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나야말로 주제넘은 짓이었소. 그보다 딸애가 버릇없이 굴어 정말 미안하오.”
“이미 잊은 일이오. 그러나 가능하다면 엘가 양에게는 직접 사과를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호프레가 엘가에게 잠시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그러나 미하일 경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소. 내 딸아이가 무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도무지 지금으로서는 내 말을 따라줄 것 같지 않아서 말이오. 잔뜩 화가 나서 나와는 말도 나누려고 하지 않소. 너무 오냐오냐 키웠던 게지. 아내가 죽고 나서 도무지 딸은 어떻게 키워야 좋을지 몰라 응석을 너무 받아 주었소. 사내아이라면 훨씬 쉬웠을 텐데...”
호프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내아이라고 꼭 쉬운 것은 아니라오. 아무튼 아이들을 대하는 건 어려운 법이지. 어쨌든 미하일 경도 떠날 채비를 하시오.”
“우리 일행은 여기에 남겠소. 마음 써주는 것은 고맙지만 그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소.”
“하지만 환자도 있고...”
호프레가 마부에게 시선을 주며 말을 흐렸다.
“괜찮소. 뭐, 가도니까 좀 기다리다보면 지나가는 마차가 있겠지. 알아서 얻어 타고 가겠소.”
“그래도...”
“괘념치 마시오. 정말 괜찮으니까.”
“아무튼 이래저래 미안하군. 마차도...나 때문에 그렇게 되어버리고...”
“하하! 그럼 나중에 어디서 보게 되면 술이나 한 잔 사시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미하일 경 곤란한 일이 있으면 한번쯤 도와주겠소.”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도움을 청한단 말이오?”
“하하! 방랑왕.”
호프레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미하일 경의 눈에 경악감이 떠오른다.
“정보길드든 도둑길드든 어디든 좋으니까 기별을 넣으시오. 그들은 알아서 날 찾아올 테니까. 비용도 내가 직접 지불하겠소.”
“실례를 범했습니다!”
미하일 경이 고개를 푹 숙여 보인다.
하지만 호프레는 곧바로 그의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이미 다 지난 일이오. 피차 부끄러운 일을 했으니 서로 다 잊읍시다.”
미하일 경은 동경어린 시선으로 호프레를 바라보았다.
그 반짝이는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호프레는 미하일 경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고는 자리를 피했다.
호프레는 마차를 타고 떠나기 전에 아직도 바닥에 누워있는 마부에게 다가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마부가 의문어린 눈빛으로 호프레를 바라보았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내가 마을까지 데려다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일행과 떨어지게 할 수도 없으니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 주시오.”
마부는 얼떨결에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렇게 호프레와 미하일 경은 헤어지게 되었다.
더 이상 호프레가 모는 마차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마부는 주머니를 살짝 열어보았다.
거기에는 금화 10개가 들어있었다.
마부는 어쩌면 자기가 저 사내를 오해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금화 하나를 꺼내 살짝 깨물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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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지막한 나무에 한 사내가 꽁꽁 묶인다.
그 사내가 소리쳤다.
“이런 씨발! 이거 풀지 못해?!”
하지만 소년이 그 사내의 명치에 주먹을 박아 넣자 기침을 해대며 이내 잠잠해 진다.
소년은 품을 뒤져 손수건 하나를 꺼내더니 사내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 모습을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한 소녀가 지켜보고 있었다.
소녀는 얼굴이 퉁퉁 부어있어 말이 아니었다.
“조금 더 때려주도록 해!”
“비욘느 양, 이미 충분히 때렸소. 더 때리려면 직접 하시오.”
“하지만 몇 대 때리고 나니 손바닥이 부었단 말이야. 아프다고...”
입술을 삐죽 내밀며 비욘느는 자기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직도 따끔따끔한 통증이 있다.
물론, 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더 때려서 분한 마음을 풀고 싶은데 손바닥이 아파서 더 이상 때리지 못하자 도리어 더욱 분해진다.
다시 에린에게 시선을 줘보지만 그는 휙 고개를 돌려버린다.
비욘느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에린의 뒤통수를 노려보지만 그래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치...로드리고라면 내 대신 더 때려줬을지도 모르는데...
한편 낸시는 한창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곁에서 피터는 군침을 흘리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어느덧 완성됐는지 그릇에 가득 담아 건네자 피터는 호호 불면서 꿀떡꿀떡 스프를 삼켰다.
그렇지만 충분히 식히지 않은 모양인지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며 몹시도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또 입에 스프를 부어대는 피터.
낸시가 식혀준다고 말하며 다시 그릇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피터는 완강히 그걸 거부했다.
오히려 낸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결국 낸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스프 냄새는 꽤 고소했다.
비욘느는 분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발로 땅을 툭툭 걷어차고 있다가 콧구멍을 벌렁 거리며 낸시 곁으로 다가왔다.
“...배고파...”
울상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낸시는 서둘러 스프를 건넸다.
낸시 옆에 털썩 주저앉아서 입에 스프를 한술 떠 넣었지만 이내 괴로운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눈에 가득 눈물을 맺히고는 낸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입안이 쓰려...저 나쁜 놈 때문에 완전히 찢어졌어. 피 맛도 나고...욱신거려서 못 먹겠어. 배고픈데...못 먹어...흑...흑흑...”
낸시는 손을 들어 그런 비욘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비욘느는 바닥에 그릇을 내려놓고 낸시의 품에 와락 달려들어 엉엉 울었다.
어느새 자기 것은 전부 다 먹어 치웠는지 피터는 비욘느가 내려놓은 그릇을 잽싸게 집어 들더니 조금 전과 같은 일을 똑같이 반복하며 빠르게 먹어 치웠다.
에린은 인상을 찌푸린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낸시는 비욘느를 달래다 말고 에린에게 말했다.
“에린 공자님, 어디가세요? 이리 와서 식사하세요.”
그러나 에린은 고개를 저었다.
“됐소. 배고프지 않소. 잠시 산책이나 다녀오겠소.”
잠시 걷고 나자 더 이상 낸시도, 비욘느도 그리고 그 악한들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에린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젠장!
정말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
어젯밤 일을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려 왔다.
로드리고에게 면목이 없어.
저런 형편없는 녀석에게 당해 정신을 잃고, 낸시 양과 비욘느 양을 위험에 빠뜨렸다.
이래서는 기사는커녕 남자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에린을 비참하게 만든 사실은 낸시 양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자기가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여자에게 구함을 얻다니...
나중에 로드리고를 만나게 되면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창피한 마음에 굴이라도 있다면 당장 숨어버리고 싶다.
분명 정식으로 붙었다면 절대로지지 않았을 거야.
그런 비겁한 행동이나 하는 녀석에게 내가 질 리가 없다.
놈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로 나를 속인 거야.
그러니까 그건...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래도...그래도...젠장...
아무리 스스로 변명해 보려고 해도 자기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다.
다시 일행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낸시 양은 날 탓하지 않겠지.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비욘느 양처럼 나를 사정없이 질타하는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하아...형편없는 내 모습이 정말 싫구나.
내가 차라리 여자였다면 이런 무거운 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왠지 낸시 양의 품에 안겨 엉엉 울던 비욘느가 부럽다고 생각하는 에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