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3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식사를 마친 일행은 떠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에린은 한 가지 일을 더 했다.
타다만 검은 숯을 들고 콜린이 묶여 있는 나무 위에 큼지막하게 ‘강도’라고 적어 놓았다.
글을 알 것 같지는 않지만 무슨 의미인지 짐작한 탓일까?
콜린이 몸을 비틀며 발광을 해댔다.
입을 움찔거리며 뭔가를 끊임없이 지껄이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입을 가린 손수건으로 인해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린이 마부석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다름아닌 피터였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는 마차 옆에 멀뚱히 서서 바보 같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설마 따라오는 것은 아니겠지?
강도짓이나 하는 녀석과 동행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물론 그가 저 콜린이란 사내를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저 덩치 큰 바보가 강도였다는 사실을 무마해 주는 것은 아니다.
에린이 노골적으로 노려보자 피터는 금세 주눅이 들어 목을 움츠렸다.
“낸시 양, 설마 저자를 데려가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가 돌아보며 물었다.
피터는 혼이 난 개 마냥 낸시에게 시선을 주며 두 손을 비벼댔다.
몹시도 산만해 보이는 행동이었는데 그만큼 초조한 것 같았다.
낸시는 잠시 주저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저 아저씨도 데려가야 해요. 어젯밤에 그렇게 약속했었는걸요. 나무에 묶여 있는 저 사내가 그동안 돌봐주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에린은 낸시의 그런 결정을 따를 수 없었다.
“낸시 양, 이자는 명예롭지 못한 자요. 이자와 함께 한다면 우리도 명예롭지 못하게 된단 말이오.”
“하지만 피터 아저씨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우리는 모두 노예로 팔리고 말았을 거예요!”
“이런 멍청한! 생각해 보시오! 누구 때문에 그런 위험에 처하게 되었던 것인지! 저 콜린이란 작자와 이 피터라는 자가 그 원흉이란 말이오! 이들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곤란한 일 따위는 없었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사내를 돌봐줘야 한다고 말하는 거요?! 비욘느 양을 보시오! 얼굴이 말이 아니오! 나 역시 부끄럽지만 비겁한 공격에 정신을 잃고 말았소!”
비욘느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기 얼굴 이야기가 나오자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자기가 뭔데 내 얼굴은 들먹이고 그래?!
정말 별꼴이네!
하지만 비욘느의 시선이 싸늘하게 변한 것을 아직 눈치 채지 못했는지 에린의 말은 계속 되었다.
“저자의 사정은 우리가 상관할 것 없소. 어제의 일은 그냥 잊고 이대로 떠납시다.”
피터가 고개를 푹 숙이고 쓸쓸히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는 안돼요!”
이례적으로 낸시가 단호한 목소리를 낸다.
에린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로드리고로부터 낸시 양의 안전을 위탁받았소! 명예롭지 못한 일에 자꾸 고집을 피운다면 내 임의대로 할 수밖에 없소! 지금껏 낸시양을 설득하려고 했던 것은 서로 간에 얼굴을 붉히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오!”
에린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고집을 관철시키려 했다.
그때, 비욘느가 입을 열었다.
“웃겨! 정말!”
에린이 얼굴을 찡그리며 비욘느를 노려본다.
“지금 뭐라고 했소?!”
지금 이 순간 깨달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고함을 치는 에린은 무척이나 그의 아버지 크레이머 남작과 닮아있었다.
그러나 비욘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퉁퉁 부은 얼굴로 에린을 향해 소리쳤다.
“로드리고에게 낸시의 안전을 위임받았다고?! 그래서 어제 그냥 기절해 버린 게 안전을 위탁받은 사람이 할법한 일이야?!”
순간 에린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스스로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하는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는 비욘느가 작은 악마처럼 보였다.
“그래서 지금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 아니오?!”
에린은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러나 비욘느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됐어! 낸시도 그리고 나도 스스로의 안전은 스스로 책임질 테니까. 에린 공자님은 더 이상 우리 안전을 걱정하느라 그렇게 노심초사 할 필요 없다구! 뭣하면 에린 공자가 기절해 있는 동안 낸시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비욘느의 말에 에린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걸 보고 당황한 낸시가 끼어들었다.
“그만해요! 그만! 어제 그건 운이 없었을 뿐이에요. 에린 공자님께는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명예가 뭔지 잘 몰라요. 제가 아는 건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피터 아저씨도 데려가고 싶은 거예요. 뭐라 해도 피터 아저씨가 직접 우리에게 위해를 가한 적은 없잖아요? 아저씨는 우릴 도와줬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 대가로 아저씨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도움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거예요. 저는 피터 아저씨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제가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주세요.”
낸시가 에린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자 곁에 서있던 피터도 쭈뼛거리는 움직임으로 고개를 숙인다.
에린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오! 어차피 나는 형편없는 놈일 뿐이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저 모자란 사내가 우릴 구해주겠지.”
비욘느가 화가 난 표정으로 에린의 뒤통수 부근에 주먹질을 해 보인다.
허공을 한차례 지났을 뿐이지만 낸시가 서둘러 비욘느를 말렸다.
마차가 움직인다.
그리고 피터가 마차를 따라 걸었다.
지금까지 주눅 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그는 씨익 웃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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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하늘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미하일은 머리를 긁적였다.
좀처럼 마차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도라 가끔씩 마차가 지나가긴 했지만 모두 짐이 가득 실려 있어 신세를 질 수가 없었다.
차라리 걸어갔다면 지금쯤 가까운 마을에 도착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동이 불편한 마부를 이대로 방치한 채 갈 수는 없었다.
다시 마차 한 대가 다가온다.
미하일은 그리로 걸어가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미하일이 멀어지자 샬롯은 누워있는 마부를 발로 툭툭 차면서 말했다.
“저기, 아까 떠난 그 사내한테 뭔가 받았지?”
“예?”
마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샬롯을 올려다본다.
“그러니까 아까 그 사내한테 돈 받았잖아? 전부 봤단 말이야!”
“아...그렇습니다.”
“그거 생각해 봤는데 나도 조금 받아야 할 것 같아.”
순간 마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마부는 말을 잃었다.
그 틈을 타 샬롯은 계속해서 입을 놀린다.
“여기서 꼼짝 달싹도 못하고 있는 거잖아? 생각해보면 아빠와 나는 걸어서 가면 충분히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당신이 아프니까 이렇게 발이 묶여 있는 거잖아? 그리고 얼핏 봤는데 그 주머니에 들어 있던 거...그거 금화였지?”
“하하...아가씨, 잘못 보신 겁니다. 그렇게 큰돈을 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마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샬롯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봤거든? 직접 이로 깨물어 보기도 했잖아? 햇볕에 반짝이던 그거 전부 봤다고!”
“......”
“치료비라고 해봤자 얼마나 나오겠어? 분명 많이 남을 거야.”
“하지만 원래 치료라는 게 완쾌되기 전에는 돈이 얼마나 들지 알 수 없는 거라...”
“그래서 금화 단위로 돈이 든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건 모르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아니. 나는 알아. 그렇게는 들지 않을 거야. 일단 주머니 꺼내봐. 나 사고 싶은 드레스 있는데 아빠가 안 사줬단 말이야. 그 돈 있으면 어떻게든 될 테니까 일단 꺼내 보라고.”
하지만 마부는 못들은 척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봐!”
샬롯이 눈살을 찌푸리며 부르지만 마부는 ‘아구구구...아이고...아파라...’하고 신음을 흘릴 뿐이다.
“조금만 나눠 갖으면 되잖아?! 그렇게 욕심 부리지 말고! 응?”
하지만 샬롯은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어느새 마차 한 대와 함께 아빠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샬롯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직 끝난 거 아니야.”
“......”
마부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이마에는 가득 주름이 자리 잡는다.
샬롯은 돈을 얻어낼 수 있었던 참에 방해를 받자 기분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자연히 다가오는 마차에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샬롯의 생각은 순식간에 바뀌고 말았다.
마부석에 앉아있는 자기 또래의 소년이 무척이나 미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샬롯은 살짝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