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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85화 (185/200)

00185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이보게! 지금 뭘 하고 있는 겐가?! 내 딸아이를 어서 놔주게!”

미하일 경이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자신이 실수를 범한 것을 깨달은 에린이 샬롯을 놔주고는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저는 다 이해해요.”

샬롯은 수줍은 미소와 다소곳한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얼굴에 홍조마저 어려있다.

평소와 다른 딸아이의 모습에 미하일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되었든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는 것은 딸아이보다는 연륜이 있는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해 미하일은 입을 열었다.

“설마 찾고 있다는 친구가 그 소년인가?”

“그렇습니다. 소년의 이름이 로드리고가 맞다면...그리고 방랑왕 호프레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아마 맞을 겁니다.”

“호오~! 그렇다면 그 소년은 역시 호프레님의 제자가 맞는 모양이군. 어찌나 살벌하게 수련을 시키시던지...”

에린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실제로 로드리고는 자신의 스승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내게 말해주기 싫어서 끝까지 모른다고만 했던 거야.

나는 그를 진짜 친구로 생각했는데, 그는...

에린이 쓸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련하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그렇네. 하지만 결국 대련 중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네.”

“다쳤단 말이에요?!”

곁에서 귀를 쫑긋거리며 듣고 있던 낸시가 이례적으로 다그치듯 묻는다.

“기절까지 했는데 멀쩡할 리는 없지. 정확히 상세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호프레님 정도의 실력자라면 큰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겠지.”

하지만 미하일 경의 그런 두루뭉술한 대답은 낸시에게는 충분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데요?!”

“허어!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미하일 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조금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낸시도 입을 다문다.

하지만 얼굴에는 걱정 어린 기색이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그건 비욘느도 마찬가지였다.

곁에서 봤다면서 대체 왜 모른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는 봤다고 할 수 없지!

답답하게 정말...

에린은 더 이상 로드리고의 상세를 물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호프레 님과 로드리고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러나 이번에도 미하일 경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목적지를 어찌 알겠나? 그저 잠시 스쳐지나간 인연일 뿐인데 말이야. 하지만 점심나절이 조금 지나서 헤어졌으니까 저 길로 서둘러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제자가 정신을 잃은 상태니까 무리하게 여행길에 오르지는 않을 걸세. 게다가 일행 중에 여자도 있으니 말이야.”

“여자라고요?!”

드디어 비욘느가 입을 열었다.

미하일 경이 시선을 주자 비욘느가 질문을 다시 반복한다.

“무슨 여자를 말하는 거죠?!”

“그야 여자가 여자지. 꼬마야 너야말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응?”

“아휴~! 정말 아까부터 답답하게 왜 그래요?!”

곁에서 다소곳이 앉아 듣고 있던 샬롯이 살짝 입술을 깨문다.

저 꼬마 계집애가 감히 누구한테 저러는 거야?!

우리 아빠는 자그마치 귀족인데!!!

워낙 못 배워서 저러는 거지!

결국 참지 못하고 샬롯이 비욘느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따악!

“아야!”

비욘느가 맞은 곳을 손바닥으로 마구 비비며 샬롯을 노려보았다.

“넌 또 뭔데?! 너 지금 나 때렸어?!”

“이게 정말!?”

샬롯이 다시 주먹을 쥐고 비욘느를 때리려 했다.

하지만 비욘느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마주 노려보며 소리쳤다.

“또 때리기만 해봐!? 가만 안 놔둘 줄 알아!?”

“뭐라고?! 감히 귀족에게 말투가 그게 뭐야?! 어리고 무식하면 전부 용서될 줄 알아?! 얼굴은 정말 흉측하게 생겨가지고!”

샬롯의 말에 비욘느가 주먹을 꽉 쥔다.

눈썹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귀족!? 나도 귀족이거든!?”

샬롯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표정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호호호! 세상에 너처럼 못생긴 귀족이 어디 있니?! 현실이 아무리 괴로워도 그런 망상은 하면 안 돼! 귀족 사칭은 굉장히 큰 죄니까! 어린애라고 봐주지 않는단 말이야!”

“진짜 귀족이란 말이야! 비욘느 브라우닝이 내 이름이라고! 너는 뭔데?! 어디 가문의 누군데 그렇게 잘난 척이야?!”

“브...브라우닝?”

순간 미하일 경이 말을 더듬었다.

인근 지역에 부강한 영주를 뽑는다면 단연 첫손에 뽑히는 이름이지 않던가?

샬롯도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 번 비욘느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이 꼬마! 어디서 거짓말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한단 말이야?!

그런 거짓말이 통할 줄 알고?!

하지만 이번엔 비욘느도 순순히 맞고만 있지 않았다.

곧바로 샬롯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안면에 그대로 머리를 박아 버렸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샬롯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시 돌아왔다.

코에서부터 쌩한 통증이 느껴진다.

주루룩!

뭔가가 샬롯의 콧구멍에서 흘러 내렸다.

샬롯은 깜짝 놀라 손으로 코밑을 훔쳤다.

붉은 액체가 흥건히 묻는다.

“피! 이거 피!”

샬롯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너! 이 망할 꼬맹이가!”

샬롯이 비욘느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브라우닝 자작의 영원한 근심, 비욘느는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다.

“내가 뭘?! 내가 뭐라고 그랬어?! 또 때리면 가만 안 놔둔다고 했잖아?!”

“아빠~!”

결국 샬롯이 미하일 경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미하일 경은 쉽사리 나설 수 없었다.

만약 정말 브라우닝 자작의 영애라면 어쩌란 말인가?

미하일 경은 에린에게 도와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결국 에린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비욘느 양, 이제 그만 하시오. 귀족의 품위를 지키란 말이오.”

그 말에 비욘느가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품위!? 그럼 이 계집애는 품위가 있어?! 왜 나한테만 뭐라고 하는 건데?!”

“그건...”

차마 에린도 비욘느의 말을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때, 낸시도 비욘느를 말리며 말했다.

“아가씨, 가만 하세요. 예?”

“그치만 이 계집애가 먼저 때렸단 말이야! 낸시도 봤잖아? 응?”

비욘느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낸시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긴 하지만...”

낸시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샬롯은 대화를 듣고 있다고 억울하단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야 나는 귀족이니까 당연하잖아?!”

“나도 귀족이라고! 그런데 넌 무슨 귀족이 그 모양이야?! 응?!”

“그러니까 네 소꿉놀이에나 필요한 망상 따위 그만 두란 말이야!!!”

더 이상 보고 있기 힘들었는지 에린이 소리친다.

“망상이 아니오! 그녀는 틀림없이 브라우닝 자작가의 비욘느 영애요. 사정이 있어 다소 교양 있는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처음과는 다르게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진다.

하지만 그 파장은 갈수록 커졌다.

“저...정말로?”

샬롯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에린을 쳐다보며 묻는다.

에린은 고개를 끄덕여 준다.

그녀는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자기가 머리칼을 틀어쥐고 있는 비욘느를 쳐다보았다.

비욘느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샬롯을 노려보고 있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샬롯이 다시 묻는다.

“저..정말?”

비욘느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계속 그렇다고 말했잖아! 이거나 놔! 아프단 말이야!”

샬롯이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스르륵 비욘느의 머리칼이 샬롯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여전히 한 움큼의 머리칼 뭉치가 그녀의 손에 남아 있다.

샬롯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미하일 경을 쳐다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미하일 경은 한 손을 이마에 얹은 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쩐단 말인가?

비욘느는 자기 머리를 손으로 만져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낸시가 엉켜진 머리를 손질해주자 비욘느가 말했다.

“머리가 한 움큼이나 뽑혔어! 얼굴도 이 모양이고...게다가 로드리고한테 여자도 생겼나봐.”

“하지만 아가씨는 충분히 귀여운걸요?”

“농담 하지 마...”

“농담이 아니에요. 얼굴도 며칠 지나면 붓기가 빠질 거예요. 어쨌든 도련님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보니까 미하일 경도 사정을 제대로 아시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직접 만나보면 아가씨가 걱정하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럴까?”

“그럼요. 다만 크게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로드리고는 강하니까 괜찮을 거야.”

비욘느가 잔뜩 부운 얼굴로 돌아보며 낸시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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