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8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나으리! 저는 정말로 결백합니다! 전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제발 저를 이대로 보내주십시오!”
처절하게 콜린이 외쳤다.
그런 콜린의 행동이 통했던 것일까?
기사는 조금 전 고함을 치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말투로 말했다.
“딱히 자네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네. 그러니 너무 그렇게 겁낼 필요는 없어.”
그 말과 동시에 콜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나!”
불길함이 느끼며 콜린의 표정이 금세 굳어지고 만다.
“예?!”
“자네의 말을 전부 믿을 수도 없는 일이지. 나는 브라우닝 자작가의 평기사 베드렘이다. 비욘느 아가씨께서 의문의 실종 상태라 추격대를 이끌고 있다. 그만큼 사안이 중요한 바, 작은 일이라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네. 그러니 자네는 일단 프레사로 후송되어 거기서 잠시 머물도록 하게. 모든 정황이 밝혀지고 나면 떠나도 좋으니까.”
그러나 전부 거짓말로 일관한 콜린에게 이보다 더 위험한 제안은 없었다.
게다가 그 계집애가 브라우닝 자작가의 아가씨라고?!
완전히 거지꼴이었는데 말이야?
정말 미치겠군.
사실이 밝혀지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어떻게든 여기에서 빠져나가야 해!
그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기사님! 베드렘 기사님! 용감무쌍하고 자비로우신 기사님! 절대로 안 됩니다! 저는 어머님의 약을 구하러 가는 참이라 제가 늦어지면 늙으신 우리 어머니께서 돌아가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틀림없이 죽습니다요! 제발...그러니 제발...”
누가 보더라도 그 모습에 거짓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만큼 콜린의 연기는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베드렘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이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던 걸까?
“허나...”
여전히 기사는 콜린을 이대로 놔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흑흑...불쌍하신 우리 어머니...제가 아이들을 생각해서 당해주지만 않았어도 돌아가시지 않으셨을 것을...제가 베푼 선의가 이렇게 어머님의 죽음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기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내의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자신은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 된다.
그냥 보내주는 편이 더 나을까?
마침내 베드렘 기사도 조금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
그걸 곁눈질로 눈치 챈 콜린은 고개를 돌리며 씨익 웃었다.
그럼 그렇지.
이 콜린이 여기에서 이대로 죽을 줄 알았더냐?!
크크큭.
하지만 어느 상황에나 복병은 있게 마련이다.
이번 복병은 헤나로였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아저씨 돈 있어요?”
“뭐?!”
콜린이 불쾌한 표정으로 헤나로를 쳐다보자 헤나로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치만 어제 그 사람이 돈은 그냥 놔두고 갔어요? 노상강도는 길에서 돈 빼앗는 사람 아닌가요? 할아버지,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아니란다. 노상강도는 길에서 돈 빼앗는 사람이 맞지. 아주 정확히 알고 있단다. 우리 헤나로는 똑똑하기도 하지!”
“헤헤! 그럴 줄 알았어!”
뭐가 그리 신나는지 헤나로가 허공중에 주먹을 쥐어 보이고는 한차례 흔들어 보인다.
“도..돈은 당연히 다 빼앗겼지! 그렇지만 어머니를 걱정하는 마음만 있으면 돈 따위는 어떻게든...”
“헤에~!? 그렇게는 안 되죠! 우리 낸시 언니도 돈이 없어서 다리를 절게 되었단 말이에요! 다 큰 어른이 돈의 소중함을 그렇게나 몰라서야...쯧쯧쯧...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답니다.”
저 계집애가 정말!
다 잘되어가고 있었는데 왜 괜히 끼어들고 지랄이야?!
하지만 헤나로의 말에서 베드렘 경은 해결책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어차피 자네가 약을 구하러 가는 노정도 그리 짧지만은 않을 것 같네. 그러느니 내 말에 따라 프레사로 후송되는 편이 나아. 내가 영주님께 편지를 보내 사정을 설명하겠네. 그럼 영주님이 자네의 어머니께 의사를 보내주실 거야. 혹 치료비가 꽤 나온다고 하더라도 우리 영주님이시라면 비욘느 아가씨께서 신세를 진 자네를 매몰차게 대하시진 않을 걸세. 그러니 내 말을 듣게.”
“그...그래도 제가 직접 가는 편이...그게...아무래도...”
“더 이상은 고집부리지 말게.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그리고 난 더 이상 자네에게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브라우닝 영지의 기사로서 명령하는 것이네!”
“예에...따...따르겠습니다...”
젠장...아~~~! 젠장!
이러다 사실이 밝혀지면 단두대에서 목이 댕강 하고 떨어져 버리겠군.
어떻게든 프레사로 가는 길에 도망쳐야겠어.
저 얄미운 꼬마 계집애,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가만두지 않겠다!
베드렘 경은 헤나로와 제페토 노인 문제는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했다.
이들을 데리고 간다면 노정이 늦어지게 된다.
그리고 현재 콜린이란 저 사내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가씨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는 상태다.
노정을 늦출 수는 없어.
하지만 로드리고 군과 관계가 있는 사람을 이대로 지나칠 수도 없는 일이다.
아가씨의 안전 확보가 최우선이지만 로드리고의 신변까지 확보할 수 있게 된다면 출세 길이 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비록 로드리고는 아니지만 그 여동생을 확보한다면 그건 자작님이 꽤나 흡족해 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도 이들을 억지로 프레사로 보낼 수는 없다.
혹 이들이 내게 함부로 취급받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오히려 일을 더 망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영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런 게 아니야.
베드렘이 고민하는 사이, 헤나로가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베드렘의 갑옷을 손으로 톡톡 두드려 본다.
“아저씨! 아저씨!”
“아! 뭐냐?”
“아저씨, 정말 기사님이에요?”
“그렇지. 나는 평기사 베드렘이다.”
“흐응?”
뭔가 자기 기대와는 다른 것일까?
헤나로는 도무지 수긍이 가지 않는 표정이다.
“뭐가 문제지, 꼬마 아가씨?”
베드렘은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상큼한 미소가 아니라 푸근한 미소다.
헤나로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다.
“그렇지만 왕자님처럼 생기지 않았는걸요.”
“뭐?!”
베드렘이 잘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댄다.
대체 왜 내가 왕자님처럼 생겨야 한단 말인가?
그보다 왕자님이 어떻게 생겼더라?
본적이 없으니 당연히 모른다.
“기사님은 엄청 멋있고, 잘생기고, 힘도 쎄고, 정의롭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아저씨는 그냥 아저씨잖아요?”
여전히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베드렘은 자신의 마음 일부분이 심하게 상처 입은 것을 느꼈다.
“사실은 기사님 아니죠? 그렇죠?”
헤나로는 두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울먹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도 어린 소녀의 꿈이리라.
절대로 이해할 수 없고, 또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리고 그것이 설령 아저씨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동반한다 해도...
그래도...악의는 없지?
아마 없겠지.
하지만 악의가 없다는 것이 더욱 슬프다.
“나는...”
베드렘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자신의 입을 바라보며 헤나로라는 소녀는 두 손을 꼭 마주잡았다.
기도하는 모습이다.
이게 과연 기도까지 할 필요가 있는 일일까?
베드렘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피땀 흘려 훈련 받던 시절이 떠올랐다.
손에는 진물이 흐르고, 입안엔 단내가 풍겼다.
심장은 한계를 향해 치닫듯 쉬지 않고 쿵쿵거렸다.
노력했지만 동료에게 졌을 때, 느꼈던 분한 마음...
그리고 마침내 동료를 이겼을 때, 느낀 그 성취감...
그런 것을 전부 견디고 나서 마침내 도달한 자리.
그것이 기사이지 않던가?
그런데 소녀의...이 자그마한 소녀의 꿈을 위해 나는 기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나는...
“난 기사다!”
베드렘의 외침에 헤나로는 다시 물었다.
“그럼 늙은 기사죠? 젊어서는 잘 생겼었죠? 그렇죠? 예?!”
나...아직 젊은데...
그렇게 늙은 거 아닌데...
아직 장가도 가지 않았는데...
지금껏 딱히 못생겼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는데!
하지만 이건 어떻게 보아도 내가 피땀 흘려 이룩한 것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지 않을까?
말 그대로 생긴 것!
태어날 때부터 어떻게 생겼느냐 그것과 관련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서는 기사의 자존심을 내걸 수 있는 여지도 없다.
대답하기 난처하다.
아니,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때, 제페토가 헤나로를 부르며 말했다.
“헤나로, 기사님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된단다.”
“하지만...”
“자, 이리 오너라. 우리도 이만 출발해야지.”
“예~! 근데 수도에 가면 잘생긴 기사님들 많이 있죠? 젊고 잘생긴 기사님이요. 그렇죠?”
“그럼~! 아주 많지.”
여기도 하나 있잖아?!
베드렘은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말이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