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9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호프레는 마침내 마을에 들어섰다.
도시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규모이지만 그래도 보통 이상의 크기는 되는 마을이었다.
입구에 큼지막하게 ‘메리나’라고 쓰여 있었다.
이 정도 마을이면 의사가 완전히 돌팔이는 아닐 것이다.
호프레는 지나가는 사내에게 여관 위치를 묻고는 곧장 그리로 향했다.
그리고는 마차에서 내려 직접 로드리고를 업고 여관에 들어섰다.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로드리고의 팔을 보며 뒤따르던 엘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호프레가 주인에게 방을 달라고 하자 주인이 물었다.
“그럼 4인실 방이면 되나?”
“4인실?”
호프레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여관 주인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여관에 3인실은 없소. 1인실, 2인실, 그리고 4인실이지. 최대가 8인실이고. 뭐, 8인실은 그냥 싸구려 방이니까...그래도 여자가 있는데 8인실에서 재울 건 아니잖소? 응? 뭐, 애는 8인실에 집어넣고, 2인실 얻는 것도 나쁘진 않지. 헤헤헤...”
곁에 서있던 엘가의 눈이 가늘게 변하자 호프레는 헛기침을 하며 손을 저어 보였다.
“험험! 아니오! 우린 그런 관계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오!”
“젠장...그럼 8인실? 모르는 여행객과 방을 같이 써야 하오. 소지품 없어져도 책임지진 않고.”
“8인실이라고 말하진 않았소.”
호프레가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그는 엘가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아무래도 여성이고, 여행하며 피로도 꽤 쌓였겠지.
게다가 의도치 않게 동생을 구타한 셈이 되어 버려 경계심도 높은 편이다.
이참에 내가 그녀를 푹 쉴 수 있게 개인실을 얻어주고, 로드리고와 함께 2인실을 사용하며 간호까지 해준다면 그럭저럭 나에 대한 그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2인실 하나, 그리고 1인실 하나 주시오.”
“하! 역시 사나이군! 내가 당신은 꽤 괜찮은 사람일 줄 알았지. 여관 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보고 그냥 알았다니까!”
그냥 좀 더 비싼 방을 사용하겠다고 했을 뿐인데 어느새 괜찮은 사나이가 되어 버렸군.
방 열쇠를 받고, 금액을 지불한 호프레는 조금 전 여관주인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라 질문했다.
“혹시 2인실이나 개인실에서 물건을 분실하면 보상해 주는 거요?”
그러자 여관 주인이 깜짝 놀라서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그런 일은 없어! 절대로 없다고! 없어지면 그냥 없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귀중품은 꼭 가지고 다니라고! 문단속 잘하고! 여관은 잠자는 곳이지 전당포가 아니란 말이야! 이거 알 만한 사람이 그런 헛소리를 하고 그래?!”
기대했던 대답이었다.
호프레는 딱히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호기심에 물었을 뿐이다.
“그럼 의사나 불러 주시오. 보다시피 환자가 있으니까.”
“그냥 골아 떨어 진 것이 아니고?”
“의사를 부르시오, 주인양반. 딱히 사정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호프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방에선 곰팡이 냄새가 났지만 심하지는 않았다.
침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구석이나 창틀도 제대로 청소되어 있었다.
창문을 열자 가벼운 바람이 불어 들어와 곰팡이 냄새를 몰아내 주었다.
호프레는 침대에 로드리고를 눕혔다.
엘가는 이불을 펴서 로드리고의 목까지 정성껏 덮어주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금방 일어날 테니까. 그 예쁜 얼굴도 좀 피고 말이야. 응? 모든 여자들은 자고로 웃는 모습이 염려하는 모습보다 더 예쁜 법이라오.”
하지만 엘가의 표정은 조금도 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는데 어떻게 걱정을 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런 농은 걸지 마세요. 지금은 그런 기분이 아니니까.”
“험험!”
민망했던지 호프레는 헛기침을 하고는 창으로 비춰 들어오는 황혼에 잠시 동안 시선을 두었다.
엘가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이 사내에게 너무 했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분명히 건장한 체격임에도 어딘지 쓸쓸하고 초라해 보였다.
그래. 그는 나를 위로해 주려고 했을 뿐인데 일부러 뾰족한 말투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었어.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부러 그랬던 것도 아닌 듯 하고.
“아저씨도 이제 그만 가보세요. 조금 전에는 제가 죄송했어요.”
하지만 엘가의 말에 호프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다른 방으로 간단 말이오?”
호프레가 엘가에게 눈길을 주며 묻는다.
“예? 그야 당연히 쉬셔야 하니까...방을 두 개 얻지 않으셨나요? 아래층에서 봤는데...”
엘가의 말에 호프레는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 이거 오해를 하셨군. 개인실로 하나 더 얻은 방은 아가씨의 방이오. 여자의 몸으로 여행은 힘든 법이지. 피곤했을 테니 개인실에서 푹 쉬시오. 들어올 때 보아하니 바로 앞방이더군. 자, 여기 열쇠요.”
하지만 엘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왜 개인실을 쓰나요? 저는 여기 있을 거예요.”
“여긴 내가 있는 다니까 그러네. 아가씨, 이 사내의 마음을 이렇게 민망하게 할 셈이요? 어서 가서 쉬시오. 뭣하면 목욕도 좀 하고. 따뜻한 물을 올려달라고 하면 주인이 알아서 해줄 것이오. 비용은 내가 지불할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응?”
“싫어요!”
엘가는 주저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런 말은 실례라고 생각하지만...그래도 제가 어떻게 아저씨를 믿어요?”
“뭐?!”
호프레는 굉장히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가를 쳐다보았다.
엘가는 왜 호프레가 이렇게까지 반응하는지 몰라 조금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호프레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나 굉장한 기사고...그러니까 명망있고...또 유명하고...강하고...집도 꽤 부자고...암튼 그런데...”
“하지만...그건 전부 아저씨가 혼자 그렇다고 말한 것에 불과하잖아요? 제 입장에서는...그게...”
“동생을 팬 남자에 불과하다는 거요?!”
“......”
엘가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호프레는 시선을 돌리며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것 참...
이 호프레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분명 명망있는 기사라고 충분히 설명했는데...
잠깐!
그러고 보니 나는 내 정체를 완전히 밝힌 것은 아니었군.
내가 방랑왕 호프레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러니 저 아가씨는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사내를 신뢰할 수 없는 것이고 말이야.
이런...이런...호프레야,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지 않느냐?
어차피 로드리고가 내 제자가 되면 다 밝힐 생각이었으니까 저 엘가라는 아가씨에게 말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
게다가 잠시 후면 로드리고는 정신을 차릴 테니까.
딱히 좀 더 대접을 받기 위해 정체를 밝히는 것은 아니야.
이건 어디까지나 저 아가씨에게 내 정체를 밝히는 것이 예의에도 맞고, 믿음을 줄 수 있는 방편으로다가...험험!
“이거...이거...정말 어쩔 수 없군.”
호프레는 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리며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에 앞머리가 나부끼도록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엘가가 의심스런 표정으로 그런 호프레를 쳐다보았다.
“내가 실수를 했소이다. 아가씨가 날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건 내 정체를 몰라서라고 생각하오. 맞소?”
엘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내는 왜 이렇게 당연한 말을 하는 걸까?
낯선 이를 경계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특별히 아가씨에게 내 정체를 밝히기로 했소. 놀라지 마시오! 내가 바로....”
“?”
“호프레요.”
“누구요?”
엘가가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호프레의 조금 당황했지만 곧바로 마음을 추스르며 생각했다.
뭐, 이름까지는 모를 수도 있지.
뭐라 해도 칼 밥을 먹고 사는 기사들과는 동떨어진 아가씨이지 않은가?
틀림없이 타이틀까지 밝히면 알아 줄거야.
암..그렇고 말고!
“방랑왕 호프레란 말이오! 하하하!”
“바...방랑왕이요?”
엘가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어째 예상했던 반응과 조금 다른다.
“그러니까 대륙 10강의 방랑왕이란 말이오. 알지 않소? 대륙 10강?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들 10명. 모르오? 설마 모른단 말이오?!”
“저도 대륙 10강 정도는 알아요!”
엘가는 기분이 상했는지 조금 뾰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호프레는 그녀가 안다고 하자 드디어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며 활짝 웃었다.
“하하! 그렇지! 대륙 10강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려고? 하하하! 그러니까 조금 전에도 밝혔듯 내가 방랑왕 호프레요. 예전엔 기사왕이었지. 이제 내 정체를 밝혔소. 이젠 날 믿을 수 있지? 그렇지 아가씨?”
하지만 엘가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더 못 믿겠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제발! 아저씨라면 믿겠어요?”
“그...그게...”
이상하다.
미하일 경이란 기사에게 정체를 밝혔을 때는 금방 믿는 눈치였는데 왜 이 아가씨는 믿지 않는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