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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90화 (190/200)

00190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왜 믿지 않을까?

내가 분명히 호프레인데...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정체를 밝히면 모든 일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잘해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물론, 어쩌다 진심으로 꼬마 녀석을 상대해서 이런 꼴로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까지 했으면 조금쯤은 나의 노력과 배려에 대해 고마워해도 좋지 않을까?

아주 허접한 놈이 대륙 10강이라고 이야기하면 당연히 믿을 수 없겠지.

아마 나라도 그런 경우에는 그럴 수 있겠다 하고 생각할 거야.

그런 건 사기꾼이라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는 거야.

하지만 나는 조금쯤은 믿어도 좋을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지 않았느냔 말이야?

마차도 번쩍 들고, 꼬마와 상대할 때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휙휙 했는데...그랬는데...

그래...뭐, 결과는 좋지 않았지.

나도 알아.

나도 안다고...

마차도 결국엔 던져 버려서 망가져 버리고, 꼬마도 조금 아프게 되어 버렸고.

그래도 그 마차 원래부터 낡아 있었다고.

그리고 꼬마는 원래 다치면서 크는 거 아니야?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거뜬한 것이 어린앤데...그런데...

혼자만의 생각이 깊어져가자 호프레의 마음속에 좋지 못한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혹시 이 여관을 반토막내면 믿어주지 않을까?

파박해서 파바박하면 순식간인데 말이야.

놀라서 입을 쩍 벌리겠지.

대륙 10강이란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만...젠장...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아무리 내가 제국의 기사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지만 아직도 나는 제국의 귀족이다.

그런 짓을 해서는 국제 분쟁이 되고 말거야.

황제는 또 나를 불러서 잔소리를 해대겠지.

마누라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아들놈은 눈길도 주지 않겠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이야.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에게는 좀 더 그럴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아내가 눈물지으며 내게 안겼으면 좋겠고, 아들놈이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도 보고 싶다고!

그러려면 여기서 여관을 반토막 내는 짓 따위 하면 안 되는 거야.

그런 게 아무리 쉽고, 효과가 있을 것 같아도 욕망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개돼지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이야?

참자.

그래, 참자.

이래 봐도 대륙 10강인데...

나 굉장하잖아?

가장 강한 사람 10명 중에 한 명이라고.

그중에 두 놈은 무력을 가진 것도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가장 강한 8인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아.

그런 사람이 이만한 일로 여관을 산산조각 낼 수는 없지.

그럼 이대로 그냥 넘어가야 할까?

순간 호프레는 말문이 막혔다.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그건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그러다간 화병이 생기고 말지.

화를 너무 많이 내는 것도 좋진 않지만 그래도 꾹꾹 참기만 해서는 오래 살지 못해.

조금...아주 조금만 따끔하게 훈계를 하자.

저 아가씨가 울기 바로 직전까지만.

그 정돈 괜찮잖아?

딱히 여자를 울렸다고 비난받을 필요도 없어.

왜냐면 울기 바로 전까지만 혼냈으니까 말이야.

딱 한마디만...

그래 딱 한마디만...

이 아가씨에게도 그러는 편이 좋겠지.

나중에 로드리고가 내 제자가 되면 괜찮은 집안에 시집을 보낼 텐데 거기에도 어른이 있을 테니까 참고 배려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어.

그것이 시집살이를 덜하게 되는 첩경이 될 거야.

굳이 귀족과 평민의 입장을 부각시켜서 억지로 내 말에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존경.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올바른 모습이지 않던가?

암! 그렇고말고.

그래서 결국 호프레는 마음속에 일렁이는 단 한마디를 목청껏 외쳤다.

“내가 방랑왕 호프레라니까!!!!!!”

고함은 무척이나 컸다.

잠시 동안 여관 건물이 흔들렸던 것은 절대로 착각이 아니다.

엘가는 호프레의 고함에 겁이 났는지 몸을 움츠렸다.

젠장...이런 게 아닌데...

뭔가 민망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절대 겁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냥 조금 훈계할 생각이었을 뿐인데 완전히 강도나 다름없지 않은가?

뭔가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만 해!

신이 그의 절규를 들었는지 마침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프레는 신이 나서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고 후다닥 방문을 열어 제켰다.

후줄근한 노인이 큼지막한 가방 하나를 들고 호프레를 쳐다보며 말했다.

“의사 불렀소?”

“그렇소! 하하! 마침 잘 왔네. 아주 잘 왔어! 자! 들어오시오!”

노인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늙은 의사가 침대에 누워있는 로드리고에게 다가갔다.

딱 봐도 환자는 침대에 누워있는 꼬마였기 때문이다.

호프레는 무조건 건강해 보였고, 엘가도 한창 나이의 아가씨다.

엘가가 비켜주자 의사는 조금 전 방으로 들어올 때처럼 다시 한 번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는 침대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로드리고의 감겨있는 눈꺼풀을 손으로 벌려보았다.

그리고는 몸 이곳저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쿡쿡 누르고 어디는 잡아 당겨 보기도 했다.

곁에서 그 하는 모양새를 지켜보던 호프레가 말했다.

“저기, 일단은 내상을 좀 입었고, 갈비뼈도 부러졌는데...”

하지만 의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의사는 나요. 일단 불렀으면 진단도 처방도 내게 맡기시오. 그게 싫으면 직접 하던가.”

호프레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뭐라 참견하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실력이 되든지 간에 한평생 이 노인이 해온 일이다.

노인이 원치 않는 이상 옆에서 훈수를 두는 행위는 동일하게 한 가지 분야에 열심히 정진해온 자신이 할법한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맡기자.

자신이 있으니까 전적으로 맡기라고 하는 것이겠지.

노인은 딱히 증세가 어떻다고 말하지도 않고, 가슴을 손가락으로 몇 번 톡톡 두드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정신을 잃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로드리고는 꿈틀꿈틀 몸을 움직였고, 신음도 토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통증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악스럽게 로드리고의 가슴팍에 힘을 주었다.

동시에 ‘뚜둑!’하고 맑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가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두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호프레는 그녀의 겁에 질린 모습에 손가락을 몇 번 꿈틀거리더니 슬며시 엘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기사라는 직업에 종사하다보니 습관처럼 여자가 겁에 질리면 도와줘야 할 것 같아서 그랬을 뿐이다.

절대로 사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역시나 무의식적으로 품에 안은 것은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엘가가 두 손으로 호프레를 밀어 버렸다.

호프레는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는데 엘가의 눈빛만 조금 더 싸늘하게 변했을 뿐이다.

노인은 가방에서 천을 꺼내더니 압박하듯 로드리고의 가슴을 단단히 감았다.

그리고는 가방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치료비는 은화 1개요.”

호프레에게 굳은살이 가득 박혀있는 손을 내밀며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호프레는 돈을 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보시오, 내상도 치료를 해야지. 뼈만 맞추면 어쩌란 말이오? 마저 치료하시오.”

그러나 노인은 돈을 받으려는 손을 여전히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이 사람아, 난 내상은 잘 못 봐. 이 꼬마가 당한 것은 내 실력으로는 완치를 약속할 수 없소. 오히려 잘못 건드리면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지. 지금까지 이 나이까지 살면서 내가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건 자기 실력 이상의 객기를 부리지 말라는 것이오. 더구나 사람 목숨이 달려있는 일에는 더욱 그렇지. 섣불리 도전할 생각은 없소. 내가 일한 만큼의 대가나 어서 지불하시오.”

호프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은화 2개를 꺼내서 노인의 손에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다시 물었다.

“그럼 이 마을에 내상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는 없소?”

“그런 건 없어.”

노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면서 다시 은화 1개를 호프레에게 건네며 말했다.

“내가 한 일은 은화 한 개면 충분하오. 그 이상은 아니야. 완치시킨 것도 아니고.”

“이건 그냥 성의일 뿐이오.”

호프레가 받으려 하지 않자 노인은 더 이상 실랑이하기 싫은지, 은화 하나를 로드리고가 누워있는 침대 위에 대충 던져두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럼 마을에 포션을 파는 신전은 있소?”

“이런 데에 신전이 있을 턱이 있나? 적어도 도시는 가야 하지 않겠소? 작은 제단은 있지만 신전은 무리지. 당연히 포션도 없다오.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는데 뭣 하러 그런 것이 있겠소?”

노인은 그렇게 방을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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