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3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로드리고는 눈을 떴다.
흐릿하던 시야에 형상이 또렷해진다.
낯선 곳이다.
낯선 침대, 낯선 천장, 낯선 창문...
여긴 어디지?
젠장할!
검의 신전을 오가다보니 좀처럼 기억이 제대로 이어지질 못해!
놈에게 져서 형편없이 바닥에 쳐박히고...
그리고 여기로 옮겨진 건가?
로드리고는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여전히 몽롱한 기분이 든다.
오랫동안 누워있어서 그런지 허리도 쑤시고, 가슴에는 붕대까지 둘러져 있다.
압박하는 느낌이 몹시도 불편하다.
익숙한 것이라고는 침대 맡에서 졸고 있는 엘가밖에는 없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그 진동을 느낀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가가 눈을 떴다.
그녀는 로드리고가 깨어난 것을 보고는 그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녀의 반응에 로드리고는 얼굴을 조금 붉히며 말했다.
“이번엔 꼭 이길 줄 알았어요. 아니, 이기지 못해도 한방 먹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아...정말 꼴사나워...”
엘가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정말 꼴사나워!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상대방은 어른이야! 너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경험도 많아! 지는 게 당연하지! 이기면 뭘 어떻게 할 건데? 응?”
“하지만 지키려면 이겨야 해요!”
로드리고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바보 같은 소리야. 사람은 지게 되어 있어. 결국 언젠가는 진단 말이야. 매일 이기는 사람은 없어! 그냥 내 곁에 있어! 그거면 되니까! 날 혼자 놔두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렇지만 나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엘가는 더 이상 로드리고가 변명하는 것을 듣지 않겠다는 듯 그의 말을 끊고는 다그치듯 말했다.
“약속 못해요! 이번엔 졌지만 다음번에는 제가 반드시 이길걸요? 그가 저보다 더 덩치가 크든, 경험이 많든 그런 건 상관없어요! 저한테 있는 건...이젠 이것밖에 없으니까...”
엘가는 눈꺼풀도 깜박이지 않고 로드리고를 노려보았다.
강렬한 눈빛이었지만 곧 눈물이 흐를 것처럼 보였다.
“그럼 난 더 이상 너를 따라가지 않겠어.”
“엘가!”
로드리고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난 이미 이런 일로 릭을 잃었어. 쓸데없는 고집 때문에 말이야. 그곳에서 날 데려와 준 것은 정말 고맙지만 그렇다고 네가 하자는 대로 전부 할 수는 없어. 특히, 그 일이 다시 한 번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잃는 결과로 끝날 것을 뻔히 아는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내 눈으로 다시 한 번 죽음을 보느니, 이대로 너와 헤어지는 편이 더 나아!”
“전 죽지 않아요!”
“지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죽지 않는 사람도 없어! 그리고 넌 이번에 거의 죽었었고! 제대로 정신도 차리지 못했고, 갈비뼈도 부러졌다고! 알고 있어?! 나는 제대로 누군가에게 뭔가를 배워본 적은 없어. 그래도 사람은 배우게 돼! 뭔가 실수를 하든 혹은 칭찬을 받든 배운다고! 이런 일을 겪고도 배우지 못한다면 너는 바보야!”
“그는 위험해요! 저는 그에게서 당신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바보가 아니라 사나이라고요!”
“아니! 너는 바보야! 그리고 넌 사나이가 아니라 어린애야!”
“저를 어린애라고 하지 말아요!”
“그럼 더 이상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
“...약속해!”
“...알았어요. 더 이상 그와 싸우지 않겠어요. 당분간은...”
“...절대로!”
“그건 싫어요. 그런 약속은 하지 않을 거예요.”
“고집부리지 마!”
“엘가! 여기까지가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약속이에요. 이 이상은 거짓말이란 말이에요! 그런 걸 원하는 거예요?”
“...그런 걸 바랄 리가 없잖아?!”
“아무튼 제가 할 수 있는 약속은 여기까지예요.”
“고집불통!”
엘가는 단단히 화가 났는지 고개를 돌려버린다.
로드리고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엘가, 절 생각해 주는 거 잘 알아요. 걱정을 끼쳐서 정말 미안하고요. 그래도 그는 위험하니까...”
“나도 그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어! 먼저 겨뤄보자고 한 것은 너잖아?! 그는 그저 너를 제자로 삼고 싶어 하는 것뿐이라고!”
로드리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제자요?”
“그래! 그가 자기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했어!”
대체 무슨 소리야?
로드리고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엘가가 주저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리고 뭐요? 뭐든 괜찮으니까 말해보세요.”
“나는 믿지 않지만...자기가 방랑왕 호프레라고 말했어.”
“!!!”
호프레라고?!
방랑왕 호프레라면 대륙 10강 중 하나잖아?!
만약 그게 사실이면 내가 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 하나니까.
그럼 딱히 내가 약했던 것도 아니고...
“그는 지금 어디 있죠?”
“맞은 편 방에 있어. 사기꾼 같기는 하지만 널 여기까지 옮겨온 것도 그 사람이고, 치료비도 내줬어. 만약 정말로 제자를 삼으려고 하는 거라면 더 이상 싸우지 말고 그의 제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로드리고는 침대 등받이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그가 진짜로 방랑왕이라면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오히려 로드리고가 바라는 일이었다.
황혼의 기사에게 배운다면 분명히 강해지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인지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밑에서부터 하나하나 해나가야 한다.
하지만 방랑왕 호프레라면 이미 기반이 있지 않은가?
명성뿐이 아니다.
호프레는 제국의 후작이다.
그의 제자가 된다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로드리고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그라면 다른 대륙 10강과의 친분이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정보길드에서 받은 명단을 보면 낸시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으로 치유왕 테레사, 마법왕 마나우스, 그리고 법왕 라파엘까지 3명이나 포함되어 있지 않던가?
다른 두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들을 만난다고 낸시를 확실히 치료해 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대륙 10강에 포함된 사람이라면 이런 의심은 거둘 수 있다.
방랑왕이라면 이들 중 한명에게 부탁해서 낸시를 온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겠소.”
자신을 방랑왕이라고 주장한 사내의 음성이었다.
로드리고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사내는 로드리고가 깨어난 것을 보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신을 차렸군. 정말 다행이야.”
로드리고는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반응에는 관심 없다는 듯 사내는 로드리고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몸은 괜찮나? 그때는 미안했네.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상대하고 말았어. 이미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네만 나는 방랑왕 호프레네. 딱히 내 소개를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하겠네. 갑자기 이렇게 말한다고 덜컥 믿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실일세. 제자를 찾아 몇 년간이나 대륙을 좁다 생각하고 떠돌았지. 그리고 드디어 제자를 삼고 싶은 인재를 찾았어. 하지만 자네는 이미 누군가에게 수련을 받았더군. 그가 누군지 말해줄 수 있겠나? 자네의 몸은 무척이나 특별해. 마나 핵이 두 개나 있더군. 그런 경우는 처음 보았네.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한 자가 대체 누구지? 꼭 만나보고 싶네.”
로드리고는 답답함을 느꼈다.
황혼의 기사는 딱히 소개해 줄 수 있는 스승이 아니었다.
그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로드리고뿐이다.
그리고 혹 믿어준다고 하더라도 사실을 밝히고 싶지도 않았다.
“제가 수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누군지는 모릅니다. 다만 며칠간 제게 마나로드를 전수해 주고 검술도 지도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떠나버렸죠. 이름도 나이도 출신지도 밝히지 않고 말이죠.”
호프레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 참 안타깝군. 그럼 자네 몸을 다시 한 번 살펴봐도 되겠나?”
“제 몸이요?”
“그래. 할 수 있다면 내상 치료도 같이 하고 싶네만...그리고 갈비뼈도 부러졌으니 내가 마나를 인도해 주면 낫는 시간이 단축될 걸세.”
“제 몸은 멀쩡합니다. 전부 다 나았어요.”
“하하! 뼈가 부러졌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않나? 내상도 꽤 심한 편이고. 그냥 살펴볼 뿐이네.”
“그럼 그렇게 하죠. 하지만 여기저기 막 만져보는 것은 아니겠죠?”
로드리고가 주저하는 어투로 물었다.
“그저 한 부위에 손만 얹으면 충분하네. 딱히 아픈 것도 아니고.”
그 말에 로드리고는 잠시 동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검의 신전에서 겪었던 고통이 기억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