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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95화 (195/200)

00195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호프레는 여관 입구 앞에 서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제자를 구했다.

6년에 걸친 방랑이 끝난 것이다.

녀석이 조건이랍시고 말한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조금 불법적인 일이라도 들어줄 생각이었다.

아픈 사람의 치료라면 무엇이 어려울까?

그런 부탁이라면 한명이 아니라 십여 명이라도 들어줄 수 있다.

6년을 떠돌며 얼마나 집이 그리웠던가?

하지만 제자를 구해가지 못하면 말 그대로 그냥 하릴 없이 방랑한 것이 된다.

그런 상태로는 절대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체면이 서질 못한다.

마누라의 잔소리는 당연하고, 황제의 핀잔도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제자를 구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처음엔 멋모르고 이런 저런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몇 년 만 지나면 녀석의 재능으로 볼 때, 제국의 새로운 신성으로 떠오를 것이 분명하다.

그럼 그 누구도 내가 하릴없이 방랑했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마누라도, 황제도 조금은 나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지 않을까?

뭐, 딱히 다른 눈으로 보지 않더라도 한심한 눈으로는 보지 않겠지.

그래. 그 정도면 되었다.

그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마차 한 대가 여관 앞에 섰다.

자연히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소년이 마차를 몰고, 짐칸에는 소녀 둘이 타고 있다.

마차 옆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덩치 큰 사내가 서있었다.

호프레는 흔치않은 조합이라고 생각했다.

소녀 둘이 짐칸에서 내리는 걸 지켜보는데 한 소녀가 목발을 짚는다.

그 녀석이 고쳐주려고 하는 소녀도 저런 모습이겠지.

여관 계단을 올라오는 것이 힘들 텐데 내가 좀 도와줄까?

호프레는 그렇게 생각하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룰 수 없었는데 마차를 몰던 소년이 막아섰기 때문이다.

“무슨 일입니까?”

꽤나 의젓하게 말한다.

하지만 경계하는 것이 역력하다.

호프레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도우려는 거네. 계단을 혼자 오르기에는 힘들 테니까 말이야.”

“필요 없는 도움입니다. 일행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하! 여행 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나는 그냥 도우려는 것뿐이야.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좋아.”

에린은 호프레의 웃는 모습이 얼마 전 일행을 기습했던 콜린의 웃음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그런 일을 겪을 수는 없어.

한번은 실수이지만 두 번은 무능이다.

애초에 알지도 못하는 우리를 도울 이유도 없고 말이야.

게다가 저 사내의 허리에 차여져 있는 검이 신경 쓰인다.

어투에 퉁명함과 불쾌함을 섞어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하하! 알겠네. 알았어.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네.”

호프레는 그렇게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에린은 자꾸만 웃는 그가 신경 쓰였다.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얼마 전 있었던 일로 말미암아 생긴 자격지심의 일환이었지만 에린은 그걸 구별할 능력이 없었다.

“왜 자꾸 웃는 겁니까?!”

어느새 에린의 손도 검 손잡이에 가있다.

그걸 보고 호프레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애써 표정을 풀며 말했다.

“내가 사과하지. 꼬마 도련님, 가던 길을 가시게.”

호프레는 에린과는 다르게 두 손을 펴 보이며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인다.

그때, 비욘느가 끼어들며 말했다.

“괜히 이상한 곳에서 기운 쓰지 말고 어서 와!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어서 로드리고나 찾잔 말이야!”

에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차례 호프레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호프레가 그런 에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로드리고를 찾는다고?”

세 쌍의 시선이 동시에 호프레를 향한다.

호프레는 그 중 다리가 불편한 소녀에게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그럼 여기 있는 꼬마 숙녀가 혹시 낸시 양인가? 응?”

낸시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에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방랑왕 호프레님이십니까?”

호프레는 에린의 물음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나를 알지? 우리가 만난 적이 있던가?”

“영광입니다!”

에린은 호프레의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크레이머 남작가의 에린 크레이머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브라우닝 자작가의 비욘느 양이고요. 마지막으로 이쪽이 방금 알아보신 낸시 양입니다. 길에서 만났던 미하일이란 기사가 로드리고가 방랑왕님과 같이 있다고 말해주어서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하하! 그 기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입이 가볍군. 아참! 자네 앞에서는 웃으면 안 되는데 내가 또다시 실례를 범하고 말았네. 용서해 주겠나?”

그 말에 에린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말했다.

“죄..죄송합니다. 저야말로 주제넘게 실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호프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농담이네. 그렇게 사색이 될 필요는 없어.”

둘의 이야기를 듣던 낸시가 끼어들었다.

“도련님은 여기에 계신가요?”

호프레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지. 2층 숙소에서 쉬고 있네.”

“다쳤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고요?”

“그게...지금은 멀쩡해. 나도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멀쩡하네.”

조금 미적지근한 어투로 호프레가 답했다.

“그렇다면 로드리고를 만나 봐도 되겠습니까?”

에린이 눈치를 보다가 끼어들었다.

호프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자 올라가세. 꼬마 아가씨는 내가 안는 편이 더 낫지 않겠나? 응?”

낸시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혼자 할 수 있어요.”

호프레는 거절하는 낸시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번쩍 그녀를 안아 들며 말했다.

“그래도 이 편이 더 낫지. 로드리고가 꼬마 아가씨의 걱정을 많이 하더군. 나한테 아가씨의 다리를 고칠 수 있게 마법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

낸시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에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마..마법왕!”

“처음 인상과는 다르게 꽤나 부산스런 친구군.”

호프레가 에린을 향해 눈을 찡긋 거리고는 성큼성큼 걸어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걸 보고 에린도 서둘러 여관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옷깃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돌아보니 비욘느였다.

“왜 그러시오?”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비욘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나는...들어가지 않을래.”

“또 왜 그러는 거요?!”

에린이 짜증스레 묻는다.

비욘느는 시선을 피하며 뜸을 들였다.

물론, 로드리고를 만나고 싶다.

왜 갑자기 말도 없이 떠난 것인지 묻고도 싶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검을 가르쳐 줄 거냐고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얼굴은 꽤 부어있는 상태였다.

이런 모습으로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방랑왕 호프레가 일행 중 가장먼저 알아본 것은 낸시였다.

자기가 아니고 낸시다.

어딘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랑왕에게 자기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속상하다.

그런 비욘느를 지켜보던 에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들어가기 싫으면 들어가지 마시오. 하여간 전부 제멋대로군.”

에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비욘느가 잡고 있는 옷깃을 거칠게 빼내며 여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비욘느의 곁에 남은 것은 피텨 뿐이었다.

피터는 그런 비욘느를 바라보며 헤헤 하며 바보 같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비욘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발로 땅바닥을 툭툭 두드려 댔다.

하지만 좀처럼 심란한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간 호프레는 노크도 없이 덜컥 문을 열어 젖혔다.

로드리고와 엘가가 시선을 주자 그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누가 왔는지 봐라! 하하하!”

로드리고는 호프레의 품에 안겨있는 낸시를 보고는 말을 더듬었다.

“왜...왜 여기에...?”

낸시의 시선이 결코 곱지 않다.

그리고 호프레의 뒤편에 얼굴을 내미는 소년이 있다.

에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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