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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사가-196화 (196/200)

00196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너 여기서 뭐하는 거야?!”

로드리고가 손가락으로 낸시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 말에 낸시도 눈살을 찌푸리며 똑같이 소리친다.

“그러는 도련님이야말로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왜 말도 없이 갑자기 떠난 건데요?!”

“나는 일이 있으니까 그렇지!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그랬잖아?!”

로드리고는 그렇게 고함을 지르면서 슬쩍 에린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체 저놈은 왜 여기까지 저 계집애를 끌고 왔을까?

둘이 알콩달콩 하며 내 앞에서 염장을 지르려고 그런 걸까?

더러운 놈!

자연히 시선이 곱지 않게 변한다.

그러나 에린의 눈망울엔 가득 눈물이 고였다.

“로드리고!”

에린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자신을 부른다.

아! 진짜! 뭐 어쩌라고?!

결코 상냥하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보았음에도 시선이 흐릿하게 변해 못 알아 보는 것일까?

에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네가 낸시 양의 후견인으로 나를 지목해 준 것은 정말 고맙지만 나는 제대로 낸시 양을 지킬 수 없었어...처음엔 자작님과 아버지께서...그리고 얼마 전에는 길에서 강도에게...”

갑자기 혼자서 감정이 복받쳤는지 에린은 말을 흐리며 울음을 참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저 새끼 대체 왜 저래?

확실히 잘생겨서 조금 그림이 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찌질해 보였다.

그리고 후견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둘이 나를 떼어놓고 아주 좋아 죽는 분위기던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울려고 하는 에린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 낸시가 호프레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도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야! 너는 언제까지 거기 안겨있을 거야?! 응?! 애가 왜 그렇게 헤프냐?!”

“제가 뭘요?!”

낸시도 꽤나 화가 났는지 꼬박꼬박 말대꾸를 했다.

어떻게 보면 그냥 버려두고 가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낸시 입장에서도 화가 나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튼 내려와! 어서!”

로드리고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호프레의 품에서 낸시를 떼어냈다.

호프레는 싱긋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집착이 심한 편이군. 뭐, 검을 수련할 때는 필요한 성격이기도 하지.”

그 말에 로드리고는 호프레를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나 호프레는 천연덕스럽게 낸시의 이마에 살짝 키스까지 해주고는 물러났다.

낸시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고, 로드리고는 표정이 왈칵 구겨지고 만다.

“거봐! 네가 헤프니까 이런 거잖아?!”

로드리고는 마구 고개를 흔들며 짜증스레 말했다.

그러면서 에린을 돌아보며 살짝 입술을 깨문다.

잠시 멈칫하던 그가 말했다.

“부축하는 건...젠장...에린 네가 해야 할 것 아니야?”

“아! 나는...방랑왕님께서 하시겠다고...”

갑자기 화살이 자기에게 돌아와 당황한 에린이 말을 더듬는다.

“그래도 네가 해야지!!! 너는 좋아하는 여자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냐?!”

짜증스런 로드리고의 고함에 에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건 로드리고에게 부축을 받고 있는 낸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낸시였다.

“왜...왜 그렇게 되는 건데요?! 좋아하긴 누가 좋아해요?!”

로드리고는 이것들이 이미 다 아는 사실을 숨기려 한다는 데 화가 치밀었다.

“누구긴 누구야?! 너네 둘이 그렇고 그렇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하지만 나는 사나이니까 딱히 그런 거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고. 뭐 낸시 이 계집애는 그냥 하녀일 뿐이니까 시원스레 성을 떠나 줬잖아? 그럼 제대로 책임 져야지!”

로드리고가 눈을 부라리며 에린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에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니야. 로드리고, 네가 오해한 거라고! 분명 낸시 양은 매력적이지만 나는 가문이 정해준 여인과 결혼해야 해.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다고.”

그 말에 로드리고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갑자기 부축하던 낸시는 놓아 버린 채 에린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럼 뭐야?! 첩이냐?! 응?!”

로드리고 자기도 첩을 삼을 생각이었으면서 자기는 되고 남은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때, 낸시가 끼어든다.

“첩은 무슨 첩이에요?! 이상한 말은 그만 좀 해요! 창피하게 왜 그래요?!”

로드리고는 여전히 에린의 멱살을 놓아주지 않은 채 낸시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이 상황에서도 이놈 편을 드는 거냐?! 응?! 그렇게 좋은 거냐?!”

어느새 호프레와 엘가는 나란히 서서 셋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도 끼어들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입가에는 미소도 조금 맺혀있다.

“그러니까 아니라니까 자꾸!”

“로드리고, 이것 좀...”

에린이 멱살을 놓아 달라고 부탁한다.

로드리고는 결국 에린을 밀치듯 놓아주었다.

“아무튼 첩은 절대로 안 돼! 제대로 정실로 받든가 아니면 깨끗이 포기하란 말이야! 알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낸시가 목발을 집어 들고 로드리고의 뒤통수를 때려 버렸다.

퍼억!

“무슨 짓이야?! 나는 지금 네 편을 들고 있는 중이라고!”

“제게 창피를 주는 중이겠죠?!”

“뭐라고?! 나는 네가 저 녀석에게 홀려서 헤헤 거리는 와중에도 널 고칠 방법을 찾아서 사방을 헤맸단 말이야! 그런데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어?!”

“절 그냥 버려두고 떠났잖아요?! 그런데 무슨 생색이에요?! 지금도 영문 모를 소리나 하고! 저는 글도 모르는데 편지를 써두고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리고 마을에는 대체 언제 돌아가는데요?”

“그건 버려둔 게 아니지! 깨끗이 물러난 거야! 그 차이를 모르겠냐?! 엄청 다른 거란 말이야!”

“아무튼 이젠 돌아가요! 마을에 가기로 했잖아요?”

“넌...이제 갈 필요 없잖아?”

로드리고는 슬쩍 에린을 쳐다보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낸시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가 제 집이에요! 필요가 있어서 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정말? 돌아간다고?”

로드리고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제가 어딜 가는데요?”

“그렇지만 너....그날 밤에 싫어했잖아?”

“그건...”

낸시도 그날 밤 자신이 주저했던 것이 떠올랐는지 말을 흐린다.

물론, 그때는 에린에게 조금 마음이 흔들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행을 하며 이런저런 이유로 감정이 흩어져 버렸다.

“암튼 지금은 안 가.”

로드리고의 말에 낸시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뭘 하는 데요?! 또 여행? 또 일이요?”

로드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제국으로 널 고치러 가지.”

“거기까진 못가요!”

“아니, 갈 거야.”

“그럼 마을은요?”

“잠시 제국에 다녀온다고 하더라도 마을이 다리가 있어 어딘가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가버리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하지만 주인님과 마님은...”

“됐어. 그런 건.”

“되지 않았어요!”

“이 이야기는 그만 하자. 평생 그런 다리로 살 거야? 이건 기회라고. 언제 마법왕을 만나보겠어? 아버지나 어머니도 네가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걸 더 원하실걸? 전부 회복되면 그대로 우리 집에 있을 수 있어. 다른 집으로 갈 필요 없다고.”

“......”

낸시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래...나는 마을로 돌아가도 금방 떠나야한다.

그렇지만 정말로 다리를 고칠 수 있다면 계속 머물러도 되는 거야.

다시 예전처럼 일도 할 수 있고.

“그럼 결정된 거야. 알았지?”

“......”

낸시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로드리고는 어딘지 이겼다는 표정으로 에린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에린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로드리고의 시선에서 적개심이 사라진 것만 해도 좋은지 밝게 웃었다.

그는 로드리고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지 입을 열었다.

“그보다 방랑왕님이 로드리고의 스승님이었다니...대륙 10강 중 한분일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놀랐어.”

로드리고는 잠시 호프레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야. 딱히 뭔가 배운 적도 없고.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걸.”

“뭐?!”

에린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낸시 다리가 고쳐질 때까지는 제자가 되지 않기로 했거든. 날 원래 가르친 분은 나도 모른다고 했잖아?”

“그럼...그때 말했던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구나!”

“딱히 쓸데없이 거짓말은 안한다고.”

로드리고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에린은 밝게 웃었다.

그보다 대륙 10강의 제자가 되는 건데도 오히려 조건을 걸다니...

나라면 도무지 생각도 못했을 일이야.

역시 로드리고는 정말 대단하구나.

그때, 낸시가 말했다.

“밖에 비욘느 아가씨도 와 계세요.”

“뭐?”

로드리고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에린은 사정을 설명하려 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 결국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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