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8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여관 식당에서 일행은 모두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로드리고와 엘가, 그리고 낸시는 호프레를 따라 제국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에린과 비욘느는 다시 프레사로 돌아가야 했다.
에린은 로드리고를 따라 제국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제대로 된 명분이 없었다.
낸시는 이미 로드리고와 합류한 상태다.
더 이상 그녀의 후견인으로서의 역할을 내세울 수 없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프레사를 떠났다.
단단히 화가 나 계시리라.
이래서는 가문에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다.
분명 돌아가게 되면 심한 꾸중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이번 짧은 여행을 통해 자신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참에 보다 수련에 힘쓰고, 노력하며 로드리고의 친구로서 결코 부족하지 않은 자신을 만들고 싶었다.
비욘느도 로드리고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은 같았다.
그러나 그녀도 돌아가야 했다.
애초에 가출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얼떨결에 세뇨르 선생을 피해 숨다보니 일이 꼬여서 여기까지 오게 된 셈이다.
아버지께서 굉장히 걱정하고 계실 것이다.
비록 로드리고에게 검술을 배울 수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대로 집에서 멀어질 수만은 없다.
어쨌든 로드리고를 만났고, 섭섭했던 마음도 많이 풀렸다.
한편 낸시는 피터에게 음식을 챙겨주며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보며 로드리고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그냥 혼자 먹게 놔둬! 뭘 그렇게 일일이 참견 하냐? 자기가 먹고 싶은 거 먹게 해줘야지. 어린애도 아닌데 참...너 그런 거 오지랖이야. 알아?”
“알아요. 하지만 자꾸만 흘리니까...”
“흘리면 좀 어때? 세상엔 이런 저런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거든? 음식을 바른 자세로 조금도 흘리지 않고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럽게 질질 흘리면서 먹는 사람도 있는 거야. 똑똑한 사람과 멍청한 사람,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부자와 거지 모두 같은 맥락이지.”
“그런 게 같은 거라고요?”
낸시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깊게 따지고 들면 결코 자기에게 유리할 것 같지 않자 로드리고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강한 어조로 말한다.
“일일이 따지지 말고 그냥 혼자 먹게 놔두라고! 정 신경 쓰이면 다 먹고 나서 흘린 거 닦아주면 되잖아? 아니면 뭐야? 너 저 아저씨 좋아하냐? 네 취향이야?”
“왜 말이 또 그렇게 되는 건데요?”
“부인하지 않네?”
“너무 어이없으니까 그렇죠!”
그 모습을 보더니 에린이 끼어들었다.
“낸시 양, 로드리고의 말처럼 저런 치를 자꾸 챙겨줄 필요는 없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내도 아니고, 혼자서도 충분히 먹고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저는 그저...”
“야! 그냥 알았다고 하면 되지! 나뿐만 아니라 에린도 그렇다고 하잖아? 응?”
“알았어요!”
낸시는 기분이 상했는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로드리고는 그녀의 행동을 보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얘가 또 뭘 이런 걸로 그렇게 삐지고 그래? 하여간...”
“하여간 뭐요?”
낸시가 다시 로드리고에게 시선을 주며 노려보자 로드리고는 말하다 말고 멈추었다.
“아니, 뭐 됐어. 그냥 이쯤에서 그만 두자. 딱히 싸우려던 것도 아닌 게 그렇게 감정적으로 나오면 내가 당황스럽지.”
“누가 감정적인데요?!”
“......”
이번에는 로드리고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걸 보고 호프레가 헛기침을 하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됐어. 됐어. 사이좋게 아웅다웅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너무 심해지면 기분이 상하게 마련이니까 그만 두는 편이 좋아.”
“아웅다웅하는 거 아니에요.”
낸시는 조금 입술을 삐죽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부럽다는 듯 쳐다보던 비욘느는 눈치를 보더니 로드리고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제국에 가면...나한테 편지할거야?”
“편지요?”
로드리고는 잠시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의 머릿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했는지 이내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해야죠! 비욘느 아가씨께서 말씀해 주지 않았다면 제가 먼저 부탁드렸을 겁니다. 헤헤...”
“...하지만 결국은 내가 먼저 꺼냈잖아...”
섭섭한 표정으로 비욘느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로드리고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시 하면 되죠! 비욘느 아가씨, 제가 아가씨께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답장해 주지 않으시더라도 상관없지만 저는 꼭 아가씨께 편지를 하고 싶습니다. 물론, 아가씨께 폐가 되지 않는다면...”
“...몰라!”
비욘느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 입술은 자기도 어쩔 수 없는지 웃고 있었다.
그걸 보고 에린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프레는 빙그레 웃다가 엘가를 향해 말했다.
“엘가 양, 동생이 아주 인기가 많은데 뿌듯하겠소. 하하!”
엘가가 채 말을 받기도 전에 낸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동생이요?”
그리고 의문어린 표정을 짓는 것은 에린과 비욘느도 마찬가지였다.
로드리고는 음식을 집다 말고 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거 맛있네! 낸시 너 이것 좀 더 먹어!”
낸시의 접시에 로드리고가 음식을 덜어주자 그녀는 방금 전의 의문도 잊고 말했다.
“저도 제가 그냥 알아서 먹을 거예요. 괜한 오지랖이라고요.”
“맛있으니까 좀 먹어보라는 것뿐인데 왜 이리 까칠해? 하여간 옹졸해서 뒤끝 있다니까.”
“뭐가 어째요?”
“아니야. 그냥 혼잣말.”
“다 들리게 하는 혼잣말이 어디 있어요?”
“계집애가 전부 들었으면서 또 묻는 저의는 뭐야?”
“됐어요!”
“아무튼 먹어 봐. 응? 맛있으니까.”
“왜 이래요? 그냥 제가 먹는다니까...”
어찌되었든 엘가에게 향했던 의문을 유야무야 돌려버린 로드리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로드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보니 마치 그녀의 존재를 창피해하는 것 같은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엘가는 그런 로드리고를 향해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로드리고는 조금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란해 졌을 뿐이다.
미묘한 시선이 둘 사이에 오가는 것을 보고 곁에 있던 비욘느가 볼을 부풀리며 취조하듯 말했다.
“그런데 둘은 어떤 사이야?”
애써 방향을 돌렸던 화살이 다시금 엘가와 로드리고에게 향하고 만다.
로드리고는 입술에 몇 번 침을 발랐다.
그런 로드리고를 보던 엘가가 침착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로드리고가 도와줬어요. 이렇게 나이 차이가 나니까 그 후로 누나라고 불렀고요.”
“그래? 여행 중에 만난 거야?”
좀 더 알고 싶다는 듯 비욘느가 다시 묻는다.
“아니요. 저는 프레사 출신이에요. 여러모로 곤란하던 중에 로드리고가 여행에 데려와 줬어요.”
“그래? 내가 비욘느 브라우닝인데...”
“알고 있어요. 아가씨. 브라우닝 자작님이 훌륭히 다스려 주셔서 항상 감사해 하는 걸요. 프레사는 살기 좋은 곳이죠.”
“헤헤. 뭐 그렇지.”
딱히 비욘느를 칭찬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금세 기세등등한 표정을 지으며 에린을 쳐다보았다.
에린은 그대로 시선을 돌려버렸지만 그럼에도 비욘느의 표정은 밝았다.
그때, 호프레가 입을 열었다.
“호오! 그런 것이었군. 나는 영락없이 친남매인줄 알았지. 엘가 양이 로드리고를 워낙 걱정해서 말이야.”
“죄송해요. 딱히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엘가가 사과하자 호프레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 뭐 책망하려던 건 아니야. 딱히 그런 걸로 곤란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게다가 내가 보였던 모습을 보면 조금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에린은 방금 전 호프레의 말로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로드리고 몸은 괜찮은 거야? 미하일 경이 말하기론 크게 다쳤다고 했었는데...”
로드리고는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거뜬해. 아무렇지도 않다고. 엘가 누나가 열심히 간호해 줬거든. 미인이 간호하면 원래 금방 낫지. 헤헤.”
비욘느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좁혔지만 딱히 불평을 하진 않았다.
그렇게 점심 식사는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
저녁식사도 비슷했다.
다만 점심때보다 손님이 많아져 식당이 붐볐다.
특이할 일이라면 비욘느가 엘가에게 프레사에서 무슨 일을 했었느냐고 물었는데 당황한 로드리고가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엘가는 비욘느에게 삯바느질을 했었다고 대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