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9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다음날 아침, 비욘느와 에린, 그리고 피터는 프레사를 향해 출발했다.
낸시가 비욘느에게 부탁하자 그녀가 흔쾌히 피터를 돌봐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에린은 주저하다가 로드리고에게 헤어지기 직전에 말했다.
“로드리고, 나에게도...편지를 보내줬으면 하는데...”
로드리고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분위기상 알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에린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에린과 비욘느를 배웅하고 나서 조금 후에 나머지 일행도 호프레를 따라 제국으로 향했다.
마차는 에린이 몰았고, 비욘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짐칸에 타고 있었다.
하지만 둘은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
피터도 두 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머리만 긁적이며 터덜터덜 따라 걸었다.
무료한 시간이 바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느릿하게 흘러갔다.1
한 시간쯤 갔을까?
저만치에서 말을 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에린은 긴장했다.
비욘느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들의 방어구에 브라우닝 가문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욘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지척으로 다가오자 아버지께서 로드리고를 찾으러 가는 일행의 책임자라고 소개해 주었던 베드렘이란 기사가 보였다.
비욘느가 아는 척을 하며 신분을 밝히자 베드렘은 유심히 그녀를 살폈다.
옷차림도 엉망이고, 얼굴도 부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지만 비욘느 아가씨가 맞았다.
베드렘이 곧바로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부하들이 일사분란하게 피터를 둘러쌌다.
손에는 장검을 들고 피터를 겨눈다.
피터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다.
비욘느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베드렘이 대답했다.
“아가씨, 고초가 심하셨던 모양이군요. 이제는 이 베드렘이 왔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이 악한은 편하게 죽을 수 없을 겁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서 베드렘은 나무에 묶여 있던 사내에게 들었던 사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욘느는 듣다말고 베드렘의 말을 끊어 버렸다.
“그런 게 아니야! 나쁜 놈은 그놈이란 말이야! 날 때린 건 바로 그놈이라고! 설마 풀어준 거야?”
비욘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베드렘은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프레사로 보냈습니다. 돌아가시면 지하 감옥에서 직접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그놈을 왜 봐?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그..그렇죠.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제가 책임지고 놈이 편히 죽을 수 없게 하겠습니다.”
“됐어. 어서 피터나 풀어주라고. 겁먹었잖아?”
베드렘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피터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같은 자리를 서성댔다.
“영주님께서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나도 알아. 화 많이 나셨어?”
“...글쎄요...”
“무슨 대답이 그래?”
비욘느는 걱정이 되는지 괜히 베드렘에게 핀잔을 주고는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제페토 노인과 함께 말에 타고 있던 헤나로는 에린을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흘낏 훔쳐보는 것도 아니고 아주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왕자님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역시나 왕자님은 계셨다.
항상 꿈꿔오던 모습 그대로다.
단정한 이목구비와 입가에 잔잔하게 맺혀있는 미소.
맑은 눈동자.
매끈한 콧대.
에린도 그 시선을 눈치 챘는지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소녀를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헤나로의 표정이 조금 더 풀어졌다.
심장의 두근거림도 한결 빨라진다.
얼굴은 홍조를 띠우고, 입가엔 침이 고였다.
우리 오빠와는 완전히 달라.
로드리고가 들었다면 사정없이 볼기짝을 때려주었을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을 때, 베드렘이 둘을 소개했다.
“아! 이쪽은 제 원래 임무였던 로드리고 군의 할아버지와 여동생입니다.”
그러자 에린과 비욘느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둘에게 시선을 주었다.
“로드리고의?”
에린이 관심을 보이자 헤나로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헤나로예요.”
“아! 이런 실례를...저는 에린 크레이머입니다.”
에린이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로 자기를 소개했다.
헤나로의 자기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걸 느낀 제페토 노인이 혹시 헤나로가 말에서 떨어질세라 서둘러 어깨를 잡아 주었다.
에린이 더 말을 걸어주기를 바랬지만 이번엔 비욘느가 입을 열었다.
“정말 네가 로드리고의 동생이야?”
헤나로는 명백히 귀찮다는 표정으로 비욘느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말했다.
“오빠가 또 뭔가 잘못했어요? 그보다 낸시 언니도 함께라고 들었는데...”
“아! 낸시는 로드리고를 만나서 제국으로 가게 되었어. 거기에서 다리를 고치기로 했거든.”
“제국이요?! 거긴 엄청 먼데 아니에요?”
“멀지만 편지 준다고 했어.”
“그런 게 아니라...되게 멀리 갔네...할아버지, 제국에 가면 제가 왕국 수도에 가 봐도 별것 아닌 거 아니에요?”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왕국의 수도보다 더 큰 도시는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란다. 그러니 그렇게 기죽을 것 없어요. 거기 가면 항상 보고 싶다면 멋진 기사님들도 보게 될 테니까...”
그 말에 베드렘의 얼굴이 조금 굳었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헤나로는 제페토 노인의 말에 조금도 위로를 받지 못한 것 같았다.
오히려 얼굴을 붉히며 슬쩍 에린을 훔쳐 보고는 말했다.
“하..할아버지는 내가 언제 기사님들 보고 싶다고 했다고 그래요? 그..그런 적 없단 말이에요...”
제페토는 헤나로의 시선이 자꾸만 에린을 향하는 것을 보고는 무슨 일인지 짐작했는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내가 착각을 했군 그래. 허허! 이거 늙으니까 자꾸 허언을 하게 되는 구먼.”
“...모...몰라요.”
그런 헤나로에게 에린이 말했다.
“헤나로 양, 저는 로드리고 군의 친구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쁘군요. 그보다 이곳에 어떻게 오시게 된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저..저는...그게...그러니까...”
자기를 ‘헤나로 양’이라고 불러주자 적응이 안 되는지 헤나로는 말을 더듬었다.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뭔가 말해야 하는데...뭔가...
“오..오빠 찾으러 왔는데...제국에 가버렸으니까..”
“아니, 그렇게 멀리 가진 않았을 겁니다. 서두르신다면 로드리고를 만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미 로드리고 따위는 헤나로의 머리에서 저 멀리 떠나 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로드리고 찾으러 온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에린 오빠는 어디로 가시는 데요?”
“오...오빠?”
에린이 자기에게 붙은 호칭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우리 오빠 친구라고 했으니까...오빠라고 불렀는데...”
금세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변하는 헤나로.
하지만 헤나로의 설명을 들은 에린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다!
나는 로드리고의 친구고, 그 증거로 그의 동생이 날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하! 그렇군요. 그럼 저도 그냥 헤나로라고...”
하지만 헤나로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냥 헤나로 양이라고 불러 주세요!”
너무 단호한 말투라 차마 거절은 허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예...헤나로 양...”
“헤헤...그것보다 어디로 가시는지 말해 주세요.”
“저는 일단 프레사로 돌아갑니다.”
“프레사로요? 그..그럼 저도 프레사로...”
헤나로는 슬쩍 제페토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제페토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럼 여기서 이만 헤어져야겠구나. 안 그래도 헤나로 너를 수도까지 데려가는 것에 걱정이 많았는데 차라리 잘 되었어. 그럼 기사님, 죄송한 말이지만 이 아이를 집까지 책임지고 데려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페토가 베드렘에게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말입니까? 하하!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프레사로 돌아가 영주님께 허락을 받아야...”
베드렘의 입장에서는 영주에게 로드리고의 동생에 대해 보고해야 자신의 성과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제페토 노인은 헤나로와 헤어져 홀로 수도로 향했다.
그리고 에린 일행에 합류한 헤나로는 베드렘이 자기 앞에 태워준다는 제안도 거절하고 비욘느와 함께 에린이 모는 마차에 올라탔다.
헤나로의 시선은 도무지 에린의 뒤통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작품 후기 ============================
다음편이 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