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0 새벽이 오면 어둠은 물러간다 =========================================================================
한편 로드리고는 에린 때문에 자기 여동생에게 버림받은 줄도 모르고 호프레를 따라 쉬지 않고 제국으로 향했다.
덕분에 3달 만에 제국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국의 수도는 확실히 대단했다.
왕국의 수도를 본적이 있는 로드리고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화려함과 웅장함이 넘쳐났다.
엘가와 낸시도 마찬가지였다.
호프레는 저택으로 일행을 이끌었다.
처음엔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경비 덕분에 당황했지만 곧 신분이 확인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호프레는 원래도 잘 웃는 편이었지만 저택에 들어서고 나서는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런 호프레의 웃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리지고 말았다.
왜 아내가 마중 나오지 않는지 묻는 그에게 집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가 몸이 좋지 않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호프레는 서둘러 그녀가 쉬고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얼떨결에 로드리고도 그를 따라가게 되었다.
호프레가 문을 벌컥 열자 생각보다 조촐한 방이 드러났다.
그녀는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호프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찻잔이 하나 들려 있었는데 호프레가 가까이 다가가자 사정없이 그걸 집어 던졌다.
호프레는 그 찻잔이 순식간에 낚아채더니 허공에 가득 비산했던 찻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시 찻잔에 받아 내었다.
“대체 6년이나 어디를 싸돌아다닌 거예요? 콜록! 콜록!”
그녀는 고함을 치고 나서 힘에 부쳤는지 곧바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호프레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그녀는 확실히 많이 아파보였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기침도 폐부 깊숙이에서 부터 들려오는 느낌이다.
입술도 말라서 생기가 없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요? 응? 나한테 연락을 넣었어야지! 이런 바보 같은...”
“바보는 당신이에요! 보기 싫으니 어서 나가요!”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디를 가란 말이요?”
“내가 보기 싫어서 나간 걸 모를 줄 알고요?”
“그렇지 않소! 내가 왜 당신을 보기 싫어한단 말이요?”
“몰라요! 사람들이 내가 늙어서 당신이 저한테 흥미를 잃었다고 수군거리던데요?”
“대체 누가 그딴 소리를 했단 말이요?! 당장 그놈을!”
“황제 폐하께서도 그러시더군요.”
“......”
“흥!”
“화..황제여도 뭐 별거 있나? 내가 가서 아주 따져야겠어! 내가 못할 것 같냐?! 응?!”
“그럼 가서 따지던가요?”
“진짜 간다!”
“그러라니까요?”
“지..진짜 간다니까?!”
“흥! 또 말만...”
“나 오랜만에 돌아왔잖아?! 그런데 정말 이러기야?!”
“그렇죠! 너무~! 너어무~! 오랜만에 돌아왔죠! 그보다 저 애는 누구에요?! 설마?”
호프레는 아내가 로드리고에게 관심을 보이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설마가 맞아.”
아주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진 아내의 고함에 호프레의 표정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미쳤어! 기어코 저질렀구나! 저질렀어! 밖에서 계집질 한 거죠?! 그렇죠?! 나가! 어서 나가!!!”
그녀는 기침을 해가면서도 멈추지 않고 주변에 보이는 물건을 마구 집어 던졌다.
호프레는 열심히 피해가며 말했다.
“오해야! 아니라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며 로드리고는 호프레가 조금은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어찌되었든 얼마 후 오해는 풀렸다.
다만 아내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일부러 날아오는 물건을 맞아준 호프레의 이마에 큼지막한 혹이 하나 생겼다.
로드리고가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상냥한 미소를 띠우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한 말이 결코 심상치 않았다.
“우리 애 대신 네가 고생이구나. 미안하다.”
“험! 험험! 예전이랑은 다르게 가르칠 거야.”
호프레가 서둘러 로드리고를 방 밖으로 내보내며 말했다.
로드리고는 그 와중에 살짝 오한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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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호프레는 로드리고와 낸시를 데리고 마법왕 마나우스를 만나러 갔다.
꼬장꼬장한 노인네를 상상했지만 실물은 아직 중년의 잘생긴 사내였다.
다만 호프레처럼 탄탄한 몸이 아니라 호리호리한 몸이었다.
호프레와는 꽤 친한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가 아내의 병세에 대해 말하자 마나우스는 조만간 한 번 들려보겠다고 말했다.
낸시는 꽤 초조한 표정이었다.
목발을 짚고 서서 입을 굳게 다문 채 자주 발밑을 쳐다보았다.
로드리고는 그녀를 팔로 툭 치고는 말했다.
“야, 걱정하지 마. 무조건 낫는다니까.”
“...걱정 안 해요.”
“그럼 얼굴 좀 펴!”
“원래 이래요.”
삐졌는지 낸시가 퉁명스레 말했다.
“하여간 위로해줘도 이 모양이라니까. 에린이 말했으면 달랐겠지.”
“에린 공자가 뭘요?”
낸시가 로드리고를 슬쩍 노려보자 그가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이죽거리듯 말했다.
“너 걔 앞에서는 얼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잖아? 아니야?”
“그런 적 없어요.”
“있거든?”
“없어요!”
“있거든?!”
“없어요!”
“이제 긴장 좀 풀렸어?”
“...원래 긴장 같은 거 안 했어요.”
“그럼 그렇다고 치던가?”
“하여간!”
“하여간 뭐? 너무 멋있다고?”
“호호! 호호호!”
갑자기 낸시가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의도대로 낸시의 긴장이 완전히 풀린 것 같긴 하지만 로드리고는 울컥 하고 기분이 상했다.
“야! 갑자기 왜 웃는데?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호호!”
“으~! 열 받아!”
그때 마침 마법왕 마나우스가 다가왔다.
“낸시라고 했던가?”
“예!”
“일단 여기에 누워보렴. 다리 좀 살펴봐야 하니까.”
낸시는 그의 말대로 했다.
마나우스가 낸시의 치마를 걷어 올리려고 하자 로드리고가 서둘러 그를 말리며 말했다.
“그건 제가 할게요.”
하지만 낸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걸 왜 도련님이 해요? 제가 하면 되지!”
“아니...나는 그냥...”
마나우스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아무나 상관없으니까 치마를 좀 걷어 올려라. 치료하려면 필요하니까.”
은근슬쩍 로드리고가 손을 뻗었지만 낸시가 손으로 짝 소리 나게 치고는 스스로 치마를 조금 걷어 올렸다.
마나우스는 꼼꼼히 다리의 곳곳을 눌러보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손에서 환한 빛이 번쩍였다.
그가 낸시의 다리에 다시 손을 대자 빛이 닿는 부위의 뼈가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마나우스는 곧 빛을 거두더니 말했다.
“요즘은 집중적으로 연구하던 것이 있어서 많은 시간을 낼 수는 없단다. 하지만 이런 치료는 원래 틈틈이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좋지. 한 두어 달 이곳을 오가며 치료를 받거라. 그럼 예전처럼 걸을 수 있을 테니까.”
낸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고칠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마나우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낸시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정말...고맙습니다.”
그 후로 로드리고가 두 달 동안 매일같이 낸시를 데리고 호프레의 저택과 마나우스의 저택을 오갔다.
무슨 치료를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나우스는 매일같이 주문을 외워주었고, 어떤 빛이 낸시의 다리에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로드리고와 낸시, 그리고 엘가는 제국에 머물게 되었다.
낸시는 두 달 뒤에 마나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목발 없이 스스로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듯, 호프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를 잃었다.
그는 대륙 10강이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아내를 붙들고 엉엉 울었다.
그걸 보는 로드리고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호프레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주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그런 일은 주변의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해주었다는 것이다.
장례식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많이 왔다.
그리고 거기에서 로드리고는 처음으로 제국의 황제를 보게 되었다.
호프레가 로드리고를 불러 황제에게 자신의 제자라고 소개하자 황제는 뚫어져라 로드리고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호프레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게 자네가 떠돈 6년의 성과인가? 실망스럽군. 정말 실망스러워. 이런 어린애는 내게 말만 했다면 수백 명이라도 구해주었을 텐데 말이야. 아무튼 지나가 버린 일을 어떻게 하겠나? 앞으로 더 열심히 해주길 바라겠네. 이제 농땡이는 그만 피우고 현역으로 복귀하게.”
호프레는 고개를 저었다.
“이 아이는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제폐하께서 못 알아보실 뿐이죠. 폐하께서 모르신다고 이 아이의 가치가 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6년이라면 상당히 싼 값이었습니다.”
황제는 입술을 비틀더니 곁에 선 사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하! 오랜만에 들어보는 멍청한 소리군. 알폰소,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로드리고는 그의 이름을 듣고 그가 기사왕 알폰소라는 걸 알았다.
호프레가 쾌활한 호남이라면 알폰소는 무척이나 엄격한 사내처럼 보였다.
하지만 알폰소가 뭔가를 말하기 전에 호프레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 이 답답한 녀석이 뭘 알겠습니까?”
“여전히 무례한 녀석이군.”
알폰소가 호프레를 노려보며 말했지만 호프레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폐하, 저는 현역에 복귀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내 장례식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도 않고요.”
“난 자네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어. 이건 명령이네. 흑사자 기사단 단장 자리가 비어있어.”
“하지만 거긴 필립소 경이 맡고 있는 줄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부단장이 되었지.”
“그는 단장으로서의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충분한 것은 필요 없네. 나는 최고를 원하니까. 어린애와 하는 소꿉장난은 그만 두게나. 시간을 내서 틈틈이 저런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은 허락해 주지. 그러나 장난감에 너무 정신이 팔려 버리면 제국의 황제로서 나는 그 장난감을 망가뜨릴 수밖에 없네. 그걸 원하나?”
“......”
“사흘 뒤에 궁에 들게나. 임명식을 거행할 테니까. 기사들의 기대가 아주 커.”
황제가 떠난 후, 호프레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황제새끼...젠장...”
로드리고가 눈치를 보다가 쭈뼛거리며 물었다.
“저는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요?”
“가긴 어딜 가?! 너도 흑사자 기사단의 평기사로 들어오는 거지!”
“제가 기사요?”
미심쩍은 표정으로 로드리고가 물었지만 호프레는 고개를 흔들며 더 이상 답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 작품 후기 ============================
1부 완결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뜬금없는 완결이지만 더 이상은 희망이 보이질 않아 여기서 글을 맺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2부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딱히 계획이 없습니다.
2달간 꽤 성실연재를 해보았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악플...지우는 것도 지치고...벌이도 시원치 않고...
저도 좀 더 글을 재밌게 써보고 싶지만 원래 사람들에게는 재능이나 그릇 같은 것이 있나 봅니다.
이번 ‘로드리고 사가’는 그동안 제가 썼던 글 중에는 가장 성과가 좋았지만 그래도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지루한 글임에도 꾹 참고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200편까지 쓸 수 있었습니다.
다음번에는 이렇게 성급하게 쓰지 말고 좀 더 사람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글을 써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