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서쪽나들이
조용하던 슈렐리츠 대공가에 지엄한 황실의 명이 떨어졌다.
마침 내 제국이 다시 한 번 그 위 명을 만천하에 떨칠 때가 왔다고.
허니 그대들도 긴 잠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의무를 다할준비를 하라고.
“전쟁이군.”
그래, 어쩐지 요근래 제국이 너무조용하다싶었다.
과한 칼부림은 안 하느니만 못 하다고 하지만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빼앗는 자와 뺏기는 자로 귀결되는 법.
그 과정에서 너무나좋은 명분이 생겼는데, 참고 있을 리가 있겠는가.
“이미 전쟁성이 움직이고 있다고합니다.”
“아무래도황제께서는 이미 이러실 작정이셨던 모양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각하.”
가신의 물음에 제국의 세 대공중 한 명.
켄드릭 글로스터 데 슈렐리츠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가까운 가신이라고 해도, 황실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는 건 부담스럽다.
‘필시 이걸 노리시고 있었겠지.’
일을 저지른 건 서쪽의 왕국 연합이다. 스스로 선을 넘어버렸다.
하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렇게 다짜고짜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터.
그가 보기 엔 황제 가 아주 은밀히 이 번 사태를 유도한 것 같았다.
적당히 압박하고, 적당히 연기하고, 적당히 모르는 척 하여.
연합이 스스로 조급함에 일을 그르치도록 제대로 이끌고야 말았다.
덕분에 이 전과는 다르게 모든 상황이 유리 하게 돌아가고 있다.
제국이 평화를 위해 노력하다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 가.
‘연합놈들도 미련해. 그걸 단 한 건도 성공하지 못 하다니. 그렇다고는 해 도… 아무튼, 여전히 무서우신 분이군. 칼을 든 자보다 권좌에 앉은 자가 백 배는 더 무서운 법이야.’
하E기야,그런 부분이 없으면서 어떻게 이 거대한제국을운영하겠는가.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서는 때로 비열한 사기꾼이, 잔혹한 학살자가 될 수 도 있어야 한다.
칼로 제국을 살찌우고 제국민들의 배를 불려줄 수 있다면, 응당 그리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위 정 자들이 지녀 야 할, 피할 수 없는 숙명 이다.
“전쟁성에서 사람은 왔나?”
“예 . 듣기로 군단들을 곧장 움직 일 거 라고 했습니 다. 거 기 에 마법 병 단까 지 투입한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대규모의 원정은 정말 오랜만이지 않습니 까.”
“우리도늦지 않게 준비해야겠군.서두르게.늦으면 좋아하실 분이 아니니 ” •
슈렐리츠 대공의 말에 가신은 흥분을 숨기 지 못 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 다.
30년이다. 자그마치 30년, 그 긴 세월동안 침묵만 하고 있었다.
제국의 칼이라는 슈렐리츠 대공가의 입장 상 평화 기간에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시간이 너무 길어져서, 혹 대공가의 위세가 기우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자잘한 마찰들이 일어 났다곤 하나 전투라고 부르기 조차 민망한 것들.
하여 슈렐리츠는 침묵에 빠지다못 해 긴 잠에 빠져든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그 걱정은 이제 모두 사라졌다.
남은 건 다시 한 번 제국의 영광과, 슈렐리츠의 위대함을 알리는 것.
모두에게 알려주리라.제국의 칼은 아직도그예기를 잃지 않았음을!
마침내 전장에 그 섬뜩한 빛을 토해 내는 순간 후회 하게 되 리 라!
당장이라도 제국의 군단들을 통솔하여 이동할 거라고 여겼다.
듣자하니 마법 병단까지 동원되는, 거대한 규모의 진군이라고도 했다.
슈렐리츠의 깃발을 휘 날리 며 가장 선두에 설 것이 라고, 그리 생 각했었다.
“사람들을 준비시키게.”
바로 다음날, 슈렐리츠 대공이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I |
“예? 대공 각하. 갑자기 그 무슨….”
“새로운황명이 내려왔다.”
황명이 내려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명이 내려오다니.
더욱 놀라운 일은 그 다음,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출정 준비 중이던 군단들과 마법 병단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었 다.
그 많던 군단 중 오직 한 개 군단만이 슈렐리츠와 함께 이동한다 했던가.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하는 가신들이었다.
하여 슈렐리츠 대공은 갑자기 상황이 바뀐 이유를 조용히 알려주었다.
“서쪽으로 가는행렬에, 존 나센이 같이 하게 되었다.”
“•••예?”
“폐하께서 무슨 수를 쓰셨는지 모르겠는데, 직계 셋이 전부 서쪽으로 향 한다 한다. 하여 우리는 그들과 함께 가기로 계획 이 변경되었다.”
« ” …-
그 말을 들은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고 고개 만 끄덕 였다.
과거 북쪽까지 나아갔던 경험자들이 아직 남아있는 슈렐리츠 대공가다.
덕분에 기억하고 있다. 북쪽, 그 끄트머리에서 어떤 존재들과 싸웠는지.
그곳에서 세상 그 어떤 악몽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이들을 만났는지 말이 다.
‘이거 기대되는군.’
제 가문이 활약할 기회인, 엄청난규모의 전쟁이 틀어졌음에도.
슈렐리츠 대공은 서운하다거나 아쉽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본인이 젊을 적 직접 목도했던 그북쪽 전투종족의 힘을,확실히 기억하고 있기에.
오히 려 그들과 함께 서쪽으로 간다는 게 황제 가 내 려주는 상처 럼 느껴 졌 다.
어차피 연합은 버티지 못 하고 무릎을 꿇을 터이니, 존 나센은 영광을 원하 지 않으니.
대신 당신이, 슈렐리츠가 제국의 승리자가 되어 저들의 항복을 받아오라 고.
이것이 그 긴 세월 기다려준슈렐리츠에 대한포상이라고, 그리 말하는 듯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슈렐리츠 대공 각하.”
그리고 대공은, 얼마 전 있었던 아카데미 반파사건의 당사자를 만나게 되 었다.
“만나서 반갑네. 레아존나센.”
이 여 자가, 바로 그 소문 자자한 그 여 자란 말이 지.
슈렐리츠 대공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레아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지금이야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후배들에게 내어주기는 했지만.
이십년 전만해도 제국의 10강으로서 그무위를 널리 떨치던 자신이다.
비록 흰머리가 가득한 노년이 되 었다지만 아직도 기사 두셋은 문제 없이 상대할수 있다.
괜히 무가武坊하면 가장 먼저 슈렐리츠 대공가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 J-l J-1 ”
…어어.
하지만 그 슈렐리츠 대공도, 레아를 본 순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보통의 기사들은 감히 읽지도 못 할 그 정갈하면서도 끝을 알 수 없는 무 위.
그 너 머 에는 어 지 간한 몬스터 는 기 백으로 눌러버 릴 사나운 기 세 가 숨어 있 다.
대 강의 수준을 파악한 슈렐리츠 대공은 확신을 내 렸다.
지금 제국 10강의 인원들은 눈앞의 이 여인 하나를 상대하기 벅찰 것이다.
못해도둘이서, 넉넉잡고셋은합을 맞춰야 상대할수 있을 정도.
‘내 젊을 적시절과 비교해도 ••.’
무인으로서의 자신감이 있다. 슈렐리츠 대공으로서의 자존심 이 있다.
그 부분들을 전부 고려해도 쉽사리 ‘상대할 수 있겠다.’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성기 때의 자신이라도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아카데 미 반파 사건은 과장이 아니 라 오히 려 축소되 었다는 말이 맞겠군.’
왜 황제가 나서서 급하게 일을 묻어버렸는지 알 것도 같다.
황실의 자존심이 상해서,혹은제국의 위신이 떨어져서,그런 문제인 줄 알 았다.
그러나 알고 보니 엄청난 두려움이 제국에 닥칠까 그것을 막으려 했던 모 양이다.
“이번에 같이 서쪽으로 가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또 신기 한 점은, 그런 무지 막지한 일을 벌였다고 보기 엔 믿 기 지 가 않는다 는 것.
외양이야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자신감이 넘치는모습도 매우보기 좋다.
거 기 에 건방지 다거 나 예의 가 없는 것도 아니 다. 오히 려 무척 참한 여 인이 다.
‘저런 며느리가 있었다면 참좋았을 텐데.’
잠깐이 나마 그런 평 범 한 생 각을 하던 슈렐 리 츠 대 공은 고개 를 내 저 었다.
존 나센과 혼인을 할 경우 황실의 견제를 피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제 가문도 과연 그 여 인을 감당할 수 있을지 의 문이고.
그리고 어차피 아들놈들도 다 결혼해서 아이까지 다 두고 있다.
“오라버니. 여기요.”
레 아가 손짓을 하며 누군가를 부른다.
잠시 후, 기 사 서 넛은 한 손가락으로 제 압할 것 같은 사내 가 나타났다.
“처음뵙겠습니다, 대공각하.”
“•••반갑네. 존 나센 남작가의 후계자군.”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굳은 목소리 가 나와 버린 대공이 었다.
일정 수준의 실력을 지닌 자로서, 강한 상대에게 지니는 자연적인 경계심.
나이를 먹 었음에도 그 습관이 순간적으로 튀 어나온 것이 었다.
“리어존 나센입니다.”
앞서 소개를 한 레아와 비교했을 때, 리어에 대한 감상평은 단하나.
‘미쳤군.’
이 미 레 아만으로도 감탄을 흘릴 지경 인데 오라비 라는 이 남자는 더 강했 다.
심지어 아직 서른도되지 않았다하니 시간이 지나면 보다더 완숙해질 터.
그리 된다면 대체 얼마나 강해질지, 대공으로서는 상상조차되지 않았다.
“•••아카데미로 가야 한다고.”
슈렐리츠 대공의 말에 리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자신과 레 아, 이 둘만 갈 계획 이 었는데 카일을 보니 생 각이 바뀌 었 다.
어느 때고 경험해볼 수 있는 ‘전투’ 가 아니니 경험을 시켜주는 게 좋을 듯 하다.
무엇보다 일단 몸을 좀 제대로 움직 여야 찐 살들이 빠질 것이다.
“알겠네. 이미 황명까지 받았으니 아카데미로 사람을 보내지. 나는 군을 통솔하여 외곽에 머물고 있을 터이니 동생을 데리고 나오게.”
“알겠습니다, 대공 각하. 나중에 뵙겠습니다.”
존 나센 남매와 헤어진 슈렐리츠 대공은 중앙 지역을 벗어났다.
이미 그 근처에는 서쪽으로 향할 군단이 준비를 마친 상태 였다.
원래는 이보다훨씬 더 많은, 대규모의 원정대가 나서야 옳았다.
하지만 갑작스레 계획이 바뀌어 단 하나의 군단만이 움직이게 되었다.
그 군단을 이끄는 것이 제국의 검이라는 슈렐리츠 대공.
그리고 휘하에는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는 검의 형제 기사단도 있다.
제국의 승리, 하면 항상그곳에 있던 대공가와 기사단이다.
덕분에 제국 군단 사이에서 큰 혼란은 일어나지 않는 분위기였다.
“대공 각하. 존 나센 사람들이 탄 마차가 도착했습니 다.”
동생을 데리고 오겠다더니 정말 금방 데리고 왔다.
설명이라던가, 준비를 한다던가, 뭐 그런 것도 없었던 모양.
“흠.”
멀찍이서 존 나센 가문의 막내라는 청년을 본 순간 슈렐리츠 대공은 생각 했다.
그래도 존 나센이 아예 인간의 탈을 뒤 집어쓴 괴물들만 있는 건 아니구나.
저런 이들도 간혹 있어야 인간성이라도 좀 있어 보이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그렇다고 해서 막내가 약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냥그주변에 서있는 형이나누나가 너무 강해서 문제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