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화〉허락된단하루, 치팅데이
“보아하니 티샤랑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도대 체, 여 자들은 남자들 속마음 파악하는 능력 이 라도 있나?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어쩜 저리 콕콕 짚어내는지.
속으로 연신 포커페이스 유지 ! 를 외친 카일은 엘가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요?”
“당신이 표정 연기를 잘하면 뭐해요. 저쪽은 그럴 생각이 없는데.” 웃으면서 어느 한 곳을 가리 키는 엘가.
아, 내 가 문제 가 아니 라 티 샤가 문제 였구나.
자꾸그렇게 애잔한눈길 보내면 티 다 난다고요.
어서 가요, 가! 이러다가 다 말하게 생겼네!
“뭐했는지 더 캐묻고 싶은데, 아쉽게도 그러지 않기로 약속해서.”
“합의를 잘봤다니 다행이네요. 여러모로.”
“다들참좋은사람이에요.황녀 저하는… 음,그분은빼고. 티샤나성녀님 은확실히 좋은 심성을 지니고 있죠.그걸 자극해서 좋을 건 없거든요.”
요컨대 착한사람 건드려서 타락하게 하는 건 안좋다, 이건가.
아주 바람직 한 생 각이 다. 적 절하다고 볼 수 있다.
티샤랑 성녀는 정말 어지 간하게 건드리 지 않는 이상 우군으로 둘 수 있을 터.
‘그런데 거기에 황녀는못 꼈네.’
아무래도 엘가에겐 요주의 인물로 단단히 낙인이 찍힌 것 같다.
임시로 합의를 보거나 양보까지는 해도, 완벽한 우군은 안 된다.
카일이 보기에 엘가는 이미 그렇게 결론을 내린 듯했다.
“자. 그 이 야기는 이 제 그만. 다른 여 자 이 야기로 보내 기 엔 너무 아쉬워 요.
직접 가지고 온 최고급 차와 아주 잘 어울리는 경관을 볼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며.
티샤와 마찬가지로 카일의 손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엘가였다.
어째 오늘은 하루 종일 끌려 다닐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카일은 얌전히 가자는 대로 따라갔다.
“오.”
“어때요? 매일 단련하는와중에 틈틈이 살펴둔 곳인데.”
존 나센에서 지낸 게 몇 년이더라? 나름 짧지는 않았던 세월이었던 것 같 은데
그 시간 속에서 왜 이런 곳이 있다는 걸 몰랐을까 싶다.
엘가가 찾은 장소는 남작령의 일부와 그 뒤로 펼쳐진 평원, 산과구름.
마지 막으로 이 제 막 얼굴을 드러낸 햇살까지 , 모두 맞이할 수 있는 곳이 었 다.
“표정을 보니까 처음이라는 얼굴 같네요.”
“부끄럽게도 그래요. 여기에서 지냈으면서 이런 곳을 몰랐다니.”
“부끄러워 할 필요까지는 없어요. 그만큼 카일, 당신이 스스로를 갈고 닦 으며 끊임 없이 노력했다는 증거잖아요?”
물론 감탄은 계속 해주었으면 좋겠고요. 미소를 지으며 덧붙이는 엘가.
그에 카일은 고개를 끄덕이고 몇 번이나 계속 감탄했다.
일부러 그러는게 아니라, 엘가가선정한이 자리는 정말경치가좋았다.
‘나중에 여기서 운동하면 더 잘될 것 같… 아이씨.미쳤나.’
눈치 없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존 나센 의지만 뺀다면.
“자. 집사장한테 부탁해서 겨우 얻어온 찻잎이에요.”
쪼르륵-.
찻잔에 차가 채워지자 향긋한 냄새가 확 퍼진다.
“무척귀한건가보네요.”
“귀 하죠. 제국 동쪽의 끄트머 리 에 서 만 나는 물건이 에요. 원 래도 귀 한데 , 요즘 들어서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중앙으로 들어오는 양이 절반 이하로 확 줄었다고 해요.”
잠깐만. 중앙으로 들어오는 사치품의 양이 확 줄었다?
뭔 가 수상한 냄 새 가 난다. 사치 품이 끊기 면 높으신 분들이 바로 반응할 것 이다.
그걸 제국 동쪽의 사람들도모를 리가 없을 텐데,해결이 안된 건가?
“카일도 저랑 똑같은 생각인 것 같네요.”
“네. 최고급 차라면 사치품중에서도최상일 텐데, 양이 줄었다니 좀 이상 하잖아요.”
“내게 정확한상황을 묻는 건가요? 난 여기 두 달이나 있었는데요?”
엘가의 말을 들으니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고개를 든다.
아. 혹시 괜히 부른 건가? 이제 갓 후계자가 된 엘가 입장에서 ….
“참고로, 괜히 부른 건가 생각한다면 관둬요. 안 불렀다면 방학 끝나고 당 신 멱살이 라도 잡을 생 각이 었으니 까. 바로 불러줘 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요.”
그리 말해준다면 고맙고요. 속으로 중얼거린 카일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는 맛보다는 향이라더니, 확실히 최고급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향이다.
차에 관심도 없고, 별로 마셔본 적도 없는 카일이지만.
그럼에도 지금 마시는 이 차가 보통 차는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 였다.
“•••갑자기 드는 예감인데요.”
“뭔가요, 카일?”
“어째 방학이 끝나고 나서, 동쪽으로 갈 것 같단 말이죠.”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이유? 실망할까그렇다.
방학이 끝나고 다시 즐거운 아카데미 생활을 생각하고 있을 엘가.
그런데 카일이 갑자기 동쪽으로 간다고 하면 반응이 굉장히 안 좋을 것이 다.
미리 말해준다고 해서 그게 엄청 나아진다거나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마음의 준비 정도는 조금이라도 할 시간이 있지 않겠나 싶어 하는 말.
“대충 예상은하고 있어요.그래서 찻잎 이야기도 먼저 꺼낸 거고요.”
한데 엘가는, 이미 카일보다 한 수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어제 접한소식이에요. 동쪽 국경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라고 한다면….”
“적당하게 교역 좀 해주면 알아서 고개를 숙이던 유목 부족들. 한데 이번 에는 협조가 아니라, 제국에 대한궐기를 결정한 모양이에요.”
그러고 보니 책에서 얼핏 봤던 기억이 있다.
과거 제국에게 있어 상당히 난처했던 적들.
서쪽으로는 왕국 연합, 남쪽으로는 각 섬의 독립 영주들.
북쪽에는 전투만을 아는 사람들, 그리고 동쪽에는 유목 부족.
그 중 북쪽의 사람들은 진작 존 나센이 되 어 제국과 화해했다.
서쪽 왕국 연합은 얼마 전 완전히 친 제국으로 돌아섰다.
남쪽도 마찬가지 다. 그쪽은 아예 복속까지 하겠다고 밝혔다나.
.
‘남은 건 동쪽 하나인데,거기서 문제 가 터졌다고.’
아주 돌아가면서 지랄이구나, 지랄이.
서쪽,남쪽,이제는동쪽까지.온사방다돌게 생겼다.
순회 공연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고.
“내가 예상하기로, 제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려던 부족이 실각하고 강경 파부족들이 들어선 것 같아요.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나올 수가 없겠죠. 그리고….”
“잠시 만, 잠시 만요. 엘가님. 그전에.”
어지간해서는 상대의 이야기를 끊었던 적이 없는 카일이다.
그런 그가 말을 자르고 들어오니 엘가가 두 눈을 깜빡거린다.
“이런 이야기도 좋지만, 이래도 되겠어요?”
“뭐가요?”
“더 개인적인 이야기해도 돼요.괜히 제가궁금해 해서 그러는 거면….”
“뭐라는 거예요.”
살포시 미소를 지은 엘가가 차를 한 모금 마신다.
“이 거 야말로 나만이 지닐 수 있는 강점이 에요. 당신이 다른 누구를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겠어요? 티샤? 성녀님? 황녀 저하?”
“•••셋다아니겠죠.”
“나도 달콤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싶죠. 하지만, 당신에게 알려주어야 할 게 있다면 그것부터 말할 거예요. 셋 어느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자세하게, 나는 알 수 있으니 까요.”
엘가, 그녀가 어느 가문의 사람인가. 리토리오 대공가다.
황실을 제외하면 온갖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는 곳이다.
율리카의 경우 황녀이자 본인이 10강이니 원한다면 정보를 받을 수도 있 다.
그러나 괜한 경계를 살 수 있고 무엇보다 본인 자체 가 그런 일에 관심 이 없 다.
때문에 이런 일은 오직 엘가만이 카일과 논할 수 있을 것이 었다.
“자,그래서. 어떤가요?”
“•••이번에도큰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동쪽,유목부족이라.”
“어째 말하는 걸 보아하니 거부할 것 같지가 않네요.”
“싸우는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야하는 게 존 나센이라.”
그 말에 엘가가 아핫!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요두달존나센에서 지낸 결과,저게 거짓이 아님을 아는것이다.
“그리고요?”
“항상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네요.”
말로만요?” 들고 있던 찻잔을 내 려놓고 앞으로 슥, 하고 다가온다.
뭐 라고 해야 할까. 티샤와 황녀, 그 둘을 적절히 섞은 것 같다.
훅 치고 들어올 때를 알면서 또 영리하게 잘 빠져나간다.
강약을 조절할 줄 안다. 그래서 황녀처럼 거칠게 대할 수가 없다.
어쩌면 엘가도 그런 카일의 속내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해서 이리 당당하면서도, 또묘하게 야릇한느낌을 내는것일터.
“혹시원하는 거라도.”
“별 거 없어요.그냥 이렇게, 내가원하면 나와서 말상대를해주고. 내가필
요로 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주고. 또….”
뭐 가 좋을까요. 흐음, 뭐 가 좋을까. 연신 고민하는, 아니.
연신 고민하는 ‘척’을 하는 엘가다. 원하는 게 확실히 있다.
“지금은 일단이렇게 하죠.아까티샤랑했던 거,내게도 그대로해주기.”
“상대방이 무엇을 했든 알려고하면 반칙 아니라고했던 거 같은데요.”
“난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어요. 그냥 똑같은 거 그대로 해달라고만했죠.”
그게 그거 같은데,또 어떻게 잘하면 허점이 많긴 하다.
이 여자, 이것까지 계산하고서 협상을 주도했던 것 같다.
역시 미래의 대공다운 여자다. 수 계산이 워낙빠르다.
“다음에도 이렇게 도와줄게요. 솔직히, 카일 당신도 좋잖아요? 당신은 이 곳 분들처럼 단련 하나에 만 매진하는 사람은 아니 니까. 궁금하잖아요. 나름 신경도 쓰고 싶고.”
“아니라고는말못하겠네요.”
“계약 성립이네요.그러면, 일단 계산부터 받아볼까요?”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이 려나 궁금한데.
아무리 황녀와 비슷하다고 하지만 엘가는 황녀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티샤보다도 더 무르다.
“흐봅?!”
바로 지금처럼.
“??”
지금 자신이 무엇을 당하고 있는지조차 실감이 안 나는 것일까.
제 입술 위에 카일의 입술이 포개어진 걸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엘가의 그 멍한 표정은 카일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기까지 계속되었다.
“자.계산 끝.”
“아.아으에, 에?”
“티 샤랑 저 랑 했던 거 그대 로 원 한다면서 요. 해 드렸으니 까 계 산 끝입 니 다.
깜빡깜빡-.
계속해서 맞은편에 앉은 카일을 바라만보던 엘가.
그러다가 어어, 하고 탄식을 흘리더니 겨우 입술을 뗀다.
“나, 나는… 그냥 볼에다만한 줄 알았는데 …?”
그 반응에 이번에는 카일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공녀님, 아닌 척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순둥이시네.
티 샤를 얕보지 마세요. 그 여 자, 괜히 마녀 가 아니 랍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