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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189화 (189/318)

“다녀왔습니다, 대공 각하.”

“어서 오거라.”

리토리오 대공이 웃으면서 엘가를 가볍게 안아준다.

이전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다. 엘가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후계자는 정해졌고 이제 남은 건 그 후계자를 대우하면서 가신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주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대놓고 사랑과 관심을 보여도 아무 문제가 없다.

다시 방에 틀어박힌 둘째 아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이게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 두 달 동안 별 일 없었고.”

말하는 느낌은 어째 별 일이 있었으면 하는 눈치다.

일단 서로 엮이기만 한다면 확실하게 카일을 붙잡을 명분이 생기지 않는가.

무엇보다 카일 또한 제국에서 머물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말이다.

“네. 별 일 없었습니다.”

하지만 엘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

그에 대공은 미묘한 웃음을 띠고서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며 몸을 돌렸다.

“공녀님.”

방으로 돌아가던 엘가는 복도에서 레토와 마주쳤다.

원래라면 같이 북쪽으로 가야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따라가지 못 했다.

대신 대공가에 남아 엘가에게 필요할 정보들을 모두 모아 보내주고 있었다.

“레토. 그동안 잘 지냈죠?”

“예. 그리고 죄송합니다. 제가 따라가야 했는데.”

“괜찮아요. 오히려 당신이 여기 남은 덕분에 정보를 받는 게 편했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레토가 일 처리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제 주군이 원하는 것, 필요한 것 전부 파악하고서 도움을 주었으니까.

동쪽의 찻잎부터 그쪽 소식을 전달한 것도 레토였었다.

“두 달 전 떠나시기 전보다 더 좋아 보이십니다.”

“그래요? 나 어때요? 카일처럼 근육이라도 생겼나요?”

그리 말하면서 얍, 하고 팔에 힘을 줘보는 엘가.

확실히 조금은 더 건장해진 느낌이 있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존 나센에 있던 두 달 내내 엄청난 노력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두달 내에 카일처럼은 절대 될 수 없다.

아니, 카일은 고사하고 존 나센의 어지간한 여인조차도 불가능하다.

그곳 사람들이 말하기를, 여인들은 남자보다 근육 가꾸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남자와 여자의 몸은 다르고 당연히 그 차이로 인해 격차가 벌어진다.

거기에 두 달은 그 격차를 좁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못 한다고도 했었다.

“좋아 보이십니다.”

레토 또한 ‘카일 정도는 절대 아닌데요.’ 라는 말을 둘러 표현했다.

그 대답에 엘가가 입술을 삐죽이고선 장난이라고 투덜거린다.

“혹시 내가 돌아오는 동안에 다른 소식이 온 건 없나요?”

“음… 자세한 바는 모르나 슈렐리츠 대공가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세 대공가 중 무력 쪽에서 특출한 모습을 보이는 슈렐리츠 대공가.

개전의 나팔이라는 이름이 있을 정도로, 그 가문이 나서면 필히 무력 충돌이 일기 마련.

그 슈렐리츠에서 움직임이 보였다는 건 보통 소식이 아니다.

“다만, 그 움직임이 정말 개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쪽 가문 내의 경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필이면 집안 경사와 겹쳐버려서 말입니다.”

“그쪽에 대한 건 아무래도 아버지께 가서 여쭤봐야겠네요.”

“제가 보기에도 대공 각하께서 그 건으로 공녀님을 부르신 것 같습니다.”

보다 정확한 상황 파악은 필수다. 그래야만 이쪽의 위치도 공고해진다.

정말로 황실이 전쟁을 감수하기로 했다면 슬그머니 눈치를 주어야 한다.

어디에? 어디겠는가. 당연히 서쪽 왕국 연합과 남쪽의 독립 영주들이지.

그런 식으로 옆구리를 찔러두면 두 세력은 늦지 않게 제국에 협조를 할 수 있다.

일정량의 식량을 댄다던가. 아니면 운송을 대신 맡겠다던가.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해서 제국의 황실과 사이를 공고히 만들면 당연히 이득이다.

겸사겸사 미리 눈치를 준 리토리오 대공가와도 가까워지고 말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그러시죠. 아, 북쪽에 가신 일은 어떠셨습니까.”

“유익한 시간이었죠. 여러 모로.”

단순히 카일 하나만 노리고 간 것은 절대 아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맞겠지만,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들도 있었다.

작게는 카일의 가족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받는 것.

그리고 크게는 존 나센 사람들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주는 것 등.

해서 이를 악물고 두 달을 기어코 견뎌낸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미리 카일에게 트레이닝을 받지 않았다면.

보다 그 전에 기사단의 지지를 위해 일부러 체력을 길러두지 않았다면.

장담하건데 한 달도 채 버티지 못 하고 그대로 실려 나왔을 게 분명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막 방으로 향하려던 엘가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돌린다.

“카일이 이 말 꼭 전해달라고 하던데.”

“카일님이요? 무슨 말이었습니까?”

씨익-.

엘가가 미소를 짓는다. 굉장히 예쁜 웃음이다. 예쁜데….

흠칫!-

왜 그걸 보고 갑자기 몸이 떨리는 건지, 레토는 알 수가 없었다.

“감히 일이 있다는 핑계로 존 나센에 안 왔다고.”

“…예?”

“개학해서 아카데미에서 만나면 각오하래요.”

“자, 잠시만! 공녀님! 저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잖습니까!”

“그렇죠. 해서 말했는데, 카일이 또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절로 마른 침이 넘어간다. 잔뜩 긴장한 레토가 엘가를 바라본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

“그러니까 개학하면, 밀린 두 달 치 운동 할 준비 하래요.”

“…쿨럭.”

갑자기 진지하게 휴학을 고민하게 된 레토였다.

“힘내요, 레토. 아. 참고로 도망칠 생각은 말고요. 끝까지 쫓아가서 운동시킬 거래요.”

“…고민할 일말의 겨를조차 없애버리는군요.”

축 쳐진 레토를 뒤로 한 채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간단하게 몸을 정돈하고 잠깐 휴식을 취한 후.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듣기 위해 리토리오 대공의 집무실로 향한다.

“아버지.”

“들어오너라.”

집무실 안에 들어서면서 슬쩍 책상 위를 살핀다.

확실히, 이전보다 보고서의 양이 더 많아졌다.

리토리오 대공도 그런 엘가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미소를 짓는다.

“북쪽에 있으면서도 대강의 소식은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네. 동쪽이 기어코 일을 벌이려는 것 같다고 하던데요.”

“아직 확실한 건 없다. 부족들의 싸움이야 항상 있던 법이고, 처음에는 제국 타도를 외치면서도 이쪽이 내미는 당근과 채찍에 얌전해진 부족이 어디 한둘이었더냐.”

틀린 부분은 없었다. 실제로 이전까지 친 제국 성향을 띠던 부족도 처음에는 적대 관계였다.

그러다가 제국과 가까이 지내는 게 이득이 훨씬 많아서 돌아선 것이고.

손해를 감수하는 건 딱 한 세대가 끝이다. 그 다음부터는 이득을 좇는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고, 그 사람들이 이루는 사회의 법칙이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엘가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아닐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겠지.”

툭툭-.

책상을 두드리던 리토리오 대공이 엘가를 바라본다.

“이전까지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황실은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더 적은 피해를 볼 수 있는가. 그러면서 가장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온갖 문제로 골머리를 싸맸지.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만 말이다.”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엘가를 바라보는 리토리오 대공.

그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를 엘가가 아니었다.

“카일.”

지금 제국은, 전례 없는 극강의 병기를 움직일 수 있었다.

*

“다녀왔습니다. 교황 성하.”

“얼굴 가득 미소가 만개하구나. 그리도 좋은 것이냐.”

교황의 말에 성녀가 부끄럽다는 듯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그 와중에 절대 아니라고 고개를 내젓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보다 더 굳게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잘 되었구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더 다가갈 수 있는 법.’

몇 번이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직접 보기도 했다.

사람 보는 눈에 대해서는 나름 일가견이 있다고 자신한다.

그래서 교황은 안심이었다. 존 나센의 그 카일이라는 청년은, 무슨 꿍꿍이를 지니고서 성녀에게 접근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되레 교단 측에서 카일이라는 청년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그 의견들을 교황 본인이 나서서 단번에 일축했다.

그런 식으로 나선다면 교단에 해만 될 것임을 왜 모르냐고 타박도 했다.

‘북쪽의 끄트머리에 우리 교단의 사제들이 다녀온 것만 해도 충분한 일.’

더 필요 없다. 오직 그 일만으로도 교단의 위상은 충분히 올라간다.

거기서 더 욕심을 부리면 괜한 의심과 경계만 살 뿐이다.

“대강의 이야기는 성 엘플레다 기사단장에게 들었다. 북쪽 사람들에게 포교 활동을 했다고.”

“네. 존 나센 남작께서 허락을 해주셔서 그리 할 수 있었어요.”

“의외의 일이구나. 존 나센 남작령도, 제국도, 전부 교단에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갑자기 허락을 해주었다니 아주 놀라운 일이야.”

놀랍다곤 하지만 그 이유는 얼추 감이 잡혔다.

제국이 그리도 두려워하는 존 나센 남작이라고 해도, 결국 한 아들의 아버지다.

그 아들이 좋다는 여인을 매몰차게 내치자니 아들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성녀 입장에선 얼떨결에 대단한 업적 하나가 늘었고 말이다.

“그래. 이제, 어찌 하면 되는 것이더냐.”

“성하?”

“다음 성녀를 찾으라는 계시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냐.”

성녀 스스로 이만 물러서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참으로 신기하게도 다음 성녀를 찾으라는 계시가 내려지곤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이유는, 자신의 마음을 쫓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그러실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음?”

해서 돌아온 성녀의 대답은 꽤나 놀라운 것이었다.

바로 그리 해달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니.

“카일 형제님께서 말하시길, 지금의 제가 가장 빛나고 또 멋지다고 하셨어요. 그 모습에 강렬한 동경심을 품는다고. 저는, 이 자리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요.”

그 순간을 떠올리는 듯 성녀의 눈빛이 살짝 몽롱해진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마음 가는대로가 아니라, 저 스스로 보기에 더는 제가 필요 없다고 여겨지는 그 순간이 올 때. 그 때가 비로소 제 의무를 마무리하는 순간이라고 보기로요.”

“…네 뜻이 그렇다면 그리 하거라. 교단에도 좋은 일이구나.”

어째 카일이 내심 교단을 신경 쓰고 있는 것 같다고.

그리 생각하니 교황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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