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끝날 이야기는 아니겠군. 차 한 잔 하겠나?”
“존귀하신 분께서 그리 하자니 그저 황공할 따름입니다.”
“이 친구가. 나를 역모죄로 몰아갈 건수라도 찾는 건가?”
설마요. 카일이 너스레를 떨자 황태자도 웃음을 터트렸다.
마주치기만 하면 자동 긴장이었던 리어나 레아와는 뭔가 다르다.
존 나센과 이렇게 농담을 건네고 받는 것이 즐겁다는 생각이 들 줄은 몰랐다.
편하다고 해야 할까. 아, 물론 너무 편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비교했을 때 그나마 카일 쪽이 사람을 대하는 느낌이 든다는 것 정도다.
“들지. 카일, 그대가 차를 즐기는지 모르겠지만… 아아, 오해하지 말게. 이건 무시하는 뜻으로 한 말이 절대 아니야.”
“괜한 걱정이십니다. 그리고 차는 학기 초부터 엄청 즐겼습니다. 반 강제로 말이죠.”
“아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황태자다.
리토리오의 엘가 공녀와 가까운 사이였으니 티타임은 기본이었을 터.
시종장이 차를 내올 동안 간단한 이야기를 마저 나눈다.
일단 황제의 쾌유를 비는 것부터 시작해서 요 근래 제국의 행보.
특히나 서쪽과 남쪽이 전부 친 제국으로 돌아선 건 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았다.
“왕국 연합이 본격적으로 교역을 하니 잘 되었지. 그리고 남쪽도 문을 활짝 열면서 각종 수산물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좋은 일이군요. 감축 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대신 요즘 일거리가 넘쳐나서 아주 미칠 지경이지. 밤낮으로 정신이 없어.”
이거, 생각해보니 전부 내 탓인 거네? 내가 전부 털어먹고 다녔잖아.
“그,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이게 어쩌다 보니….”
“사과는 무슨. 제국에 좋은 일이었는데 사과를 왜 하는가. 내가 감사를 전해야 하는 일이야.”
“야근은 어떤 이유에서든 참담한 일 아니겠습니까.”
말단 공무원부터 제국의 지존까지. 결국 야근은 모두에게 비참한 일이다.
남들 다 잘 시간에 못 잔다는 건 극도의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단순히 몸만 피곤한 게 아니다. 난 대체 왜 일하고 있지? 하는 정신적 피로가 더 문제다.
하다못해 존 나센에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밤을 새지는 않는다.
최소한의 수면은 무조건 취한다. 그게 건강에 좋고, 건강해야 단련에 집중도 되니까.
카일의 말에 황태자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정말 괜찮아. 제국을 위해서라면 사흘 밤낮을 새도 환영이야.”
음. 갑자기 황태자의 체력 부분을 확인하고 싶다는 욕망이 간절해진다.
사흘 밤낮 샌다는 말이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닌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정도면 분명히 한 번 이상 해봤다는 거다.
30대를 넘었다고 들었다. 황태자의 나이가 결코 한창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흘 밤낮을 샜다면 체력적 부분이 뒷받침 된다는 뜻.
한 번 확인해서 더 업그레이드 시켜주고 싶다. 운동시키고 싶다!
“카일?”
“아, 예. 전하.”
“들지. 차가 식겠어.”
와중에 정성스레 준비한 차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찻잔을 들고서 한 모금 마시니 황태자가 잠깐 기다린 후 입술을 뗀다.
“자.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동쪽 지역에서 오던 특산품의 양이 확 줄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생산량에 문제가 생겨서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일단 한 번 잡아 떼어보는 황태자. 그러나 카일이 말없이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동쪽 국경에서부터 불온한 움직임이 계속 되고 있네. 덕분에 근처의 경제 활동이 위축되기까지 했어. 치명적이진 않지만 영향이 아예 없을 수는 없지.”
“동쪽이라면 역시나….”
“유목 부족 외에 또 어떤 놈들이 있겠나. 말을 달리며 가축들을 키우고, 한 곳에 머무르지 못 하는 저주를 받은 종자들. 어찌나 드세고 사나운지 제어가 안 되는 족속들.”
굉장히 순화시켜서 나온 황태자의 대답이었다.
아마 조금만 더 화가 난 상태였다면 쌍두문자가 섞여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유목 부족에 대한 분노가 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상황이 괜찮았네. 적당히 교역을 허락해주면 알아서 고개를 숙이는 부족이 초원을 쥐고 있었으니. 제국에서 얻은 물건들로 다시 본인들의 힘을 과시하면서, 주변 부족들을 아래에 두고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어.”
“한데 그 법칙이 깨져버렸군요.”
그런 셈이지. 빌어먹을. 결국 욕설을 내뱉고 마는 황태자였다.
“멍청한 놈들이야. 그렇게 다른 부족에게 너희 자리 빼앗기지 말라고 밀어주었는데. 찰나의 방심에 싸그리 밀려서는 초원 너머로 도망을 쳤다고 하더군. 그리고 그 자리는 반 제국을 넘어 아예 제국 타도를 외치는 정신 나간 놈들이 차지했고 말이지!”
쾅!-
아이고, 황태자 전하 많이 흥분하셨네.
진정하세요. 그렇게 해봤자 테이블 안 쪼개집니다.
진짜 쪼개버리고 싶으면 이렇게 해서 이렇게….
“놈들은 항상 사사건건 제국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어. 왕국들을 차례대로 무너트리고 서쪽까지 밀어붙였을 때, 그래서 숨통을 끊으려고 할 때 놈들이 쳐들어왔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물러섰고 그러는 사이 왕국 연합의 숨길이 트였지.”
“그렇군요.”
“그 뿐인 줄 아나? 남쪽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려고 기껏 전선들을 건조할 자금과 목재들을 준비했더니 또 쳐들어왔어! 덕분에 남쪽에 대한 공격 준비도 전부 백지화되었네!”
어째 점점 과하다 싶을 정도로 흥분하는 모양새다.
이상하다. 누가 들으면 황태자가 그 당시에 제국군을 이끈 줄 알겠다.
실상은 아주 어릴 적 이야기, 혹은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기인데.
“네가 이해해. 황태자 전하께서는 제국 일에 대한 부분만 나오면 저리 흥분하시거든.”
얌전히 차를 마시고 있던 황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그에 카일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 제국을 사랑하시는 분이구나.
그리고 동쪽의 유목 부족에게 악감정을 엄청 많이 지니셨구나.
“큼큼. 미안하네. 내가 너무 흥분했군.”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 전하께서 얼마나 제국을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유목 부족이 얼마나 골치 아픈 자들이었는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고맙네. 아무튼…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서쪽, 그리고 남쪽 모두가 갑자기 친 제국으로 돌아섰지. 해서 거기에 온갖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제국을 자극하고 있는 거네.”
그 부분에서 카일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극하면 밀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이전과는 다르게 서쪽도, 남쪽도 안정이 되었는데.
힘을 오롯이 동쪽에 집중해서 유목 부족을 격파하면 되는데 말이다.
제국이 이름만 제국인 약소국도 아니고, 그만한 힘을 지녔다.
강자들도 즐비하다. 당장 자신의 아버지가 인정한 인물이 열 명이나 있는데.
“카일. 자네 눈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군.”
“아… 그렇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을 말하자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예?”
“정치라는 건 말이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귀찮으면서, 때로는 유치하고 황당한 것이라네. 어떤 때에는 애들 장난보다도 더 심할 때도 있고 말이야.”
이어진 황태자의 말을 정리하면 이러했다.
최근 들어, 거의 동시에 서쪽과 남쪽이 제국에게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반갑고 좋은 일이나 그들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다.
특히나 얼마 전까지 목소리를 내고 있던 반 제국파 입장에선 피를 토할 일.
본인들이 다시 위세를 회복하는. 아니, 살아남는 길은 단 하나다.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금 제국에 대한 의심, 두려움, 그리고 분노를 심는 것.
그래야 본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
물론 정말로 제국과 일전을 벌이자는 계획은 아니다.
제국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 조성만 해도 충분하다.
‘그런 상황에 제국이 갑자기 대규모의 전쟁 준비를 한다면….’
놈들 입장에선 아주 최고의 건수를 포착하는 것이다.
제국이 평화적으로 한다고 하더니 결국 무력으로 모두 점령할 생각이라고.
결코 제국을 믿어서는 안 된다. 항상 경계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 말할 거라고 말이다.
“황태자 전하. 정말로 그러겠습니까? 본인들이 대세가 될 수 없음을 잘 알 텐데요.”
“그것들은 제국과 정말로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절대 없다네. 다만 상실한 본인들의 위치를 찾고 싶을 뿐이지. 그리고 적당한 긴장 관계는 본인들에게 유리하고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미친 짓을 할 것 같지는….”
그러자 황태자가 미소를 짓는다. 무언가 씁쓸하다는 느낌이 물씬 풍겨나는 미소였다.
“말했잖은가. 정치란, 권력이란 그런 것이네. 극도로 유치하고, 바보 같고, 미친 것 같고, 애들 장난보다도 못 하면서. 또 복잡하고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지. 그런 행동만으로도 사회적 분위기는 쉽게 바뀌고 거기서 힘을 얻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자신에게 정치란 이해하기 힘든 종류다.
왜 아버지가 정치나 권력을 더럽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가는 카일이었다.
“그러면 전쟁은 없는 겁니까?”
“설마 그러겠는가. 그 부분이 거슬린다는 거지, 그것 가지고 제국이 양보를 하거나 한 수 물러주지는 않네. 다만 조금 더 귀찮아진다. 이게 문제일 뿐.”
“그리고 말이야, 카일. 이제는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도 생겼어.”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 카일이 황태자를 바라보자 그는 끄응, 침음을 내뱉었다.
어째 그 몸짓이 ‘이런 말하기 정말 부끄럽다.’ 라는 느낌이다.
“기밀이긴 한데, 자네에겐 어차피 저 아이가 말해버릴 것 같으니. 내 입으로 말하지.”
기밀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달고 있다니. 무슨 대단한 일이긴 한 모양이다.
카일이 경청하겠다는 듯 슬쩍 몸을 기울이자 황태자가 말을 잇는다.
“실은 그 근처에 있던 10강 중 하나가 부상을 입었어.”
“…예?”
그 말을 들은 순간, 존 나센 의지가 벌떡! 하고 몸을 일으켰다.
“황태자 전하.”
그 소식, 다시 한 번 제대로 말해보세요.
누가 부상을 당해요? 제국 10강이 다쳤다고?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이야. 분명한 강자가 있다는 거잖아.
…이거 군침이 싹 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