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194화 (194/318)

“내일, 데이트 신청하는 중인데.”

카일의 말을 떠올리니 그렇지 않아도 두근거리던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어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밤에는 잠도 잘 오지 않아서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기도 했다.

데이트 신청. 내가 아닌, 카일이 먼저 한 제의.

심지어 이렇다 할 이유조차 없었다. 존 나센에서처럼 보상의 의미도 아니다.

그럼에도 카일이 먼저 데이트를 하자고 말했다.

바로, 바로 나가야겠지? 약속 시간까지 아직 40분은 남았는데….

이렇게 방에서 기다리다간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아.

차라리 일찍 나가서, 이전처럼 카일을 기다리는 게….

- 일방적인 사랑은 주는 이도, 받는 이도 쉽게 지친다. -

얼마 전 읽었던 책의 한 문구가 갑자기 떠올랐다.

주술 공부에 매진하다 말고 나도 모르게 향한 곳은 각종 소설이 있는 층.

그곳에서 마치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책 하나를 빼들었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의 풋풋한 첫사랑을 소재로 한, 흔하디흔한 글.

모두의 염원대로 결국 첫사랑이 끝사랑이 되는 부분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었다.

잔잔하고, 때로는 단조롭기도 하지만 괜찮았다. 다 과정이었으니까.

모든 부분들이 좋았다. 좋았는데, 방금 전 떠올린 문구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방적인 사랑이 서로를 쉽게 지치게 할 수도 있다니.

‘당연히 그런 게 좋은 건 줄 알았는데.’

항상 네가 기다리지는 마라. 가끔은, 너를 기다리게 하라.

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주면서도 한 번은 먼저 그 말을 받아보라.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좋아하니까, 보고 싶으니까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그 기다리는 시간조차 두근거려서 더 좋은 건데.

하지만 몇 번 더 생각해보니,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쉬운 여자로 보이고 싶지는 않아.

한 번은 내가 아니라 카일이 나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을 쥔 채로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런 생각이 들자 책에서 봤던 내용들이 계속 떠올랐다.

‘하, 한 번 해볼까?’

다른 건 없다. 오늘은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나갈 생각이었다.

이전까지는 항상 내가 30분은 먼저 나가서 카일을 기다렸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너무 초조하고 가슴이 떨려서.

방에서 적절한 시간에 나가자니 그것조차 힘들어서 그냥 나갔었다.

기다리는 것조차 좋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카일이 왔으니까.

‘좋아. 오늘은, 오늘은 반대로 카일이 기다리게 해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든 생각은 미안함. 그리고 죄스러움.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이러다가 역효과라도 나면 어떻게 하지? 이게 정말 최선이야?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이전까지는 기대감, 그리고 행복함에 그리 뛰었다면.

지금은 반대로 긴장, 초조, 그리고 걱정들만 가득했다.

‘…안 되겠어. 이건, 이건 못 하겠어.’

다행히 아직 약속 시간까지 20분이 남았다.

지금 나가면 충분할 거야. 가서, 가서 카일을 기다리자.

그렇게 생각한 후 곧장 방을 나서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

한데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그래도 일찍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티샤! 오늘도 일찍 나왔네요? 그런데 오늘은 제가 좀 더 빨랐답니다.”

“어, 어어? 카, 카일?”

“네. 놀랐어요? 엄청 일찍 와서?”

솔직히 말하자면, 놀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카일이 약속 시간에 늦은 적은 없다. 항상 제 시간에 맞춰서 왔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 전까지 나는 꿈도 못 꿀 운동 루틴을 돌려서였다.

최대한 많은 운동을 하고 시간에 딱 맞춰서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지?’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문득 불길함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혹 데이트를 하자는 게 혹시 마지막….

“오늘은 먼저 와서 한 번 기다려봤어요. 매일 티샤가 먼저 와서 기다렸잖아요.”

다행히도 상상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도감이 들고, 그 다음으로 행복하다는 감정이 뭉클거렸다.

카일도 그런 내가 신경 쓰여서, 오늘은 루틴까지 쉬어가면서 왔다는 거잖아.

공녀님도, 성녀님도, 심지어 황녀님조차도 운동 루틴 다 돌리고 만난다는데.

그 카일이 오늘 나와 데이트를 하면서 그거까지 안 하고 왔다고?!

“…뭐에요, 티샤. 그렇게 좋아요?”

아! 카, 카일 앞에서 너무 헤벌쭉했던 건가?!

급히 표정을 바꾸려고 했지만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고개까지 끄덕이고 말았다.

이제 뭐든 좋아. 데이트라고 해놓고 뭘 해도 다 좋아.

등산을 해도 좋고 운동을 하자고 해도 다 이해할 수 있어.

카일이 나를 위해서 단 한 번도 깨지 않았던 것까지 깨트렸다.

그리고 먼저 나와 주었다. 와서, 나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이걸 다른 세 분께 말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성녀님은 놀라면서 또 잘 되었다고. 축하한다고 해주실 거다.

엘가 공녀님은 잘 모르겠다. 분명 축하는 한다고 하실 텐데 또 그 틈으로 무언가 열심히 계산하고 또 생각하고 계시겠지.

그리고 황녀 저하께서는….

‘아냐. 황녀 저하께는 말하지 말자. 진짜, 어지간한 게 아니라면 무조건.’

존 나센 남작령에서 같이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성녀님, 공녀님은 상식이 통하는 분들이다. 하지만 황녀 저하는 아니셨다.

황제 폐하의 따님이셔서 그런지 아니면 제국 10강이라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로서는 아직 그 분을 감당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들다는 거다.

“슬슬 갈까요?”

“네? 어디를요?”

“따라와요. 같이 갈 곳이 있거든요.”

역시 새로운 운동 기구, 내지는 괜찮은 단련 장소를 찾은 것일까.

아주 잠깐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바로 고개를 내저어 없애버렸다.

카일이 나를 위해서 지금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와 카일은 일방적이지 않은 관계다. 지금은 그게 중요하다.

이제부터 조금씩, 조금씩 더 나아가고 가까워지면 될 거야. 그러니까….

“자, 잠깐 만요. 카일. 여기….”

“연주회가 열리는 곳인데요. 왜요?”

고개를 들어 카일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이곳은 연주회가 열리는 홀이었다.

이상했다. 카일은, 이런 걸 전혀 즐기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1학기 내내 연주회는커녕 악기를 다루는 것조차 보지 못 했다.

그런 카일이 갑자기 연주회라니?

“티샤는 연주회 좋아하지 않아요?”

“네? 어… 그, 좋아하기는 하는데….”

“같이 봐요. 마침 좋은 자리를 구해서.”

카일의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일방적인 마음을 지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다. 일반적인 마음이 아니었다.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이, 더 가까이. 카일은 그렇게 다가와 있었다.

*

‘내가 데이트 신청해놓고 운동이니 헛소리 하면 진짜 맞아 뒈져야지.’

아무리 존 나센 의지라고 해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다.

가끔 그 눈치가 떨어질 때도 있지만 다행히 지금은 아니었다.

운동 루틴도 일부러 쉬고, 그 시간에 티샤를 기다렸다.

항상 그녀가 기다렸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기다려주자.

그리 생각한 카일이었고 티샤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이런 적이 처음이니까. 운동 할 거 다 하고, 항상 제 시간에 오던 사람이.

오늘은 그것마저 깨트리고 먼저 와서 기다려주었으니까. 그것이 그리도 기뻤을까.

‘이러면 너무 미안한데.’

앞으로 자주는 아니더라도, 몇 번은 이리 더 해주자.

티샤도 그렇고, 엘가나 성녀, 그리고 황녀까지.

이렇게 내 시간을 희생해서라도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주자.

카일은 그리 결심하며 다음 일정으로 나아갔다.

‘마침 연주회 티켓을 받은 게 또 운이 좋았어.’

티샤가 연주회에 간간히 간다는 건 알고 있었다.

같이 가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도통 마음이 동하지가 않았다.

그런 곳에 가서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낼 바에, 기구 위에 앉아서 운동하는 게 나으니까.

와중에 단련장에 회원 가입한 선배 하나가 선물이라며 연주회 티켓 두 장을 주었다.

원래 본인과 친구가 가려고 했으나 그 시간에 운동을 하겠다나.

거절하려고 했지만 가지고 있으면 유혹을 이겨내지 못 할 것 같다고.

그 말에 카일은 회원님들을 위해서라도 결국 그걸 받고 말았다.

‘그때 딱 떠올랐지. 티샤가 연주회 가는 거 은근히 즐긴다는 걸.’

선배는 운동해서 좋고, 자신은 티샤에게 좋은 시간을 줄 수 있어서 좋고.

그야말로 완벽한 거래의 표본에 카일은 그 선배를 좀 더 특별히 봐주기로 했다.

물론 그 선배 입장에선 악마가 바로 옆에서 세트 하나 더! 외치는 그림이었을 테지만.

“카일이랑 같이 연주회에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앞으론 가끔 같이 가요. 자주는 힘들어도요. 괜찮죠?”

“당연하죠. 그래준다면 제가 너무 고마운 걸요.”

별 일도 아닌데 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카일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덕분에 연주회 내내 루틴을 깨트린 부작용으로 손이 덜덜 떨리긴 했지만, 또 그걸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다.

‘어차피 이걸로 끝이 아니니까.’

무언가를 봤다면 이제 무언가를 먹어야 할 차례.

국룰이다. 데이트에서 절대 어겨서는 안 될 매너다.

“카, 카일? 정말 이렇게 먹으려고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리고 오늘, 카일은 아예 티샤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희생하기로 했다.

덜 자극적인, 덜 기름진, 그런 음식을 찾느라 시간을 쓰는 게 아닌.

귀족들이 즐겨 찾는다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호화로운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데이트잖아요. 이 정도는 해야죠.”

“아….”

비록 오늘 하루는 완전히 망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저렇게 티샤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봤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오늘 못 한 운동은 내일 두 배로 하면 되는 일이지. 그렇고말고.

그렇게 생각하며 카일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고기를 한 점 썰어냈다.

하하. 이거 참, 군침이 싹 도네…. 그래, 군침이 싹….

‘…이거 칼로리 몇이려나.’

내일 두 배가 아니라 세 배는 해야겠는데.

먹자. 자기 최면을 걸자. 이거 남기면 근손실이다. 근손실이다….

그리 생각하며 카일은 포크로 고기를 입 안에 넣었다.

‘음. 지방이 꽉 찬 맛이군.’

세 배도 모자랄 것 같아서 네 배로 정정하는 카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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