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196화 (196/318)

“하하하!”

리토리오 대공도.

“허허허!”

교황과 추기경들이 보이는 반응도 전부 똑같았다.

다들 웃었다. 예의상의 웃음, 혹은 영혼 없는 미소가 아니었다.

모두가 좋아서, 카일이 본인들을 방문했다는 것에 무척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그렇게나 좋은가? 내가 와서 좋은 거야, 존 나센이 와서 좋은 거야.’

저 웃음이 정말 순수한 기쁨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그 속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품은 카일이었지만 그냥 잊기로 했다.

여기서 꼬치꼬치 캐물어봤자 본인 마음만 더 상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순수한 의도만 가득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엘가나 성녀는 아니라고 해도 대공가도, 교단도, 결국 세상에 녹아든 세력들이다.

그걸 굳이 걸고넘어질 바에 차라리 그냥 모르는 척 하는 게 나을 터.

“고마워요, 카일.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

“감사합니다, 카일 형제님! 교황 성하께서도 정말 좋아하셨어요!”

어찌 되었든 엘가와 성녀의 반응은 확실히 좋았다.

그냥 지나쳐도 될 일이었는데, 카일이 신경을 쓰니 무척 반가운 모양.

맨 처음에 황실 방문 소식을 듣고 둘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었다.

아마도 두 곳은 방문 안 한다고 했다면 굉장히 서운해 했을 터.

‘그렇게 생각하니 상상만 해도 아찔하네.’

티샤와 데이트를 했다는 소식도 그걸로 상쇄할 수 있었다.

둘 다 눈매를 좁혔으나 각각 대공가와 교단을 방문한다고 하니 반색.

신경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게 역시나 중요한 듯 했다.

이래서 하렘이 좋기만 한 게 아니라고 했는데.

몸만 힘든 게 아니라 머리도 네 배로 피곤해진다고 했는데.

하렘 소설 속 주인공들이 팔자가 좋기만 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떠흑!!”

외마디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레토가 자리에 무너져있다.

몸까지 바들바들 떠는 게 살짝 안쓰럽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래도 제법이다. 한 10분 전에 진작 쓰러질 줄 알았는데.

“횟수는 다 채우고 넘어진 거죠?”

“다, 다 채웠습니다. 못 채우고 넘어지면 처음부터 다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좋네요. 그러면 우리 한 세트만 더 할까요?”

카일의 그 말에 레토가 깩! 하고 비명을 지른다.

그 말을 아까부터 들은 것 같다. 한 세트 더. 한 세트 더. 한 세트 더….

저런 식으로 한 시간 가까이 하고 있는데도 끝이 안 보인다.

보이는가 싶으면 다시 늘어난다. 그래서 더 죽을 맛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안 보이면 희망이라도 품지 않을 텐데.

“카, 카일 님! 제게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하, 하라는 대로 다 하는데도 놓아주지 않으시니 이런 겁니다!”

자신도 아카데미의 엄연한 학생 중 한 명이다.

그런데 단련 때문에 이제는 학업에 지장까지 생길 정도다.

불가능에 가까운 루틴을 돌리고 있자면 여기 운동하러 온 건가 생각이 들 정도.

“그러니까 다음 방학에 존 나센에 오라니까요.”

“확답을 드릴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저는 방학이 오히려 더 바쁜….”

“지금 정해요. 방학 때 방문하겠다. 그러면 지금보다 살살 해줄 수 있어요.”

카일이 이렇게나 쥐 잡듯 레토를 몰아붙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너 왜 우리 가문 안 왔냐. 거기에 얼마나 좋은 단련장이 있는데. 얼마나 훌륭한 트레이너가 배치되어 있는데. 운동하겠다는 놈이 대체 왜 안 거야!

이안도 그렇고, 넬도 그렇고, 하다못해 엘가까지 와서 건강해졌는데!

너는 건강해질 마음이 없는 것이냐! 방학 동안에 근손실을 보고야 말겠다는 것이냐!!

이것은 모두 레토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악마 트레이너가 되도록 하자!

“대답 할 때까지 안 끝나는 겁니다. 각오해요.”

“으으으으…!”

레토의 사정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만의 사정이 있다는 것쯤 안다.

리토리오의 대공이 될 엘가이고 레토는 그런 엘가를 바로 곁에서 수행할 인물.

당연히 엘가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을 수도 있다.

보좌관은 단순히 수족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참모 역할도 겸하니까.

하지만 그거 다 봐주다간 기껏 표준 넘긴 레토가 다시 아래로 내려앉을 것이다.

이러다가 넬보다도 약해질 것 같다. 남자 자존심이 있지, 그래서 되겠는가!

‘아. 아직 넬이 여자라는 걸 모르나?’

아무튼, 레토를 완전히 존 나센 식으로 물들여야 리토리오도 작업에 들어간다.

엘가가 나서는 것보다 레토가 알아서 퍼트려주는 게 훨씬 더 낫다는 계산이 나왔다.

지금이야 외교 부분을 꽉 잡고 있다는 리토리오라지만 거기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카일 자신이 엘가와 그렇고 그런 사이인데. 존 나센과 이어질 곳인데.

그곳 사람들이 그저 그런 신체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단련도 영 별로다?

이건 존 나센의 이름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꼴이다.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카일 학생.”

강의도 다 끝났겠다, 저녁 때까지 레토를 조지려고 했던 카일.

하지만 갑작스레 등장한 검은 옷의 사내들 때문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들 오랜만에 뵙네요.”

“네, 카일 학생. 오랜만에 보는군요.”

“학장님이 부르시는 겁니까?”

저들이 찾아오는 이유는 단 하나. 학장실 호출 때문이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 떠올려보지만 이렇다 할 건 생각나지 않는다.

사고를 친 것도 아니고 무슨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방학이 끝나고 한 일이라곤 단련장 회원들 가려내는 일.

이안이랑 몇 번 대련을 하고, 레토를 계속 몰아붙인 게 전부다.

‘혹시 매일 출근 도장 찍는 황녀 때문에 그러는 건가?’

자세한 내용은 학장을 만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해서 카일은 얌전히 검은 사내들을 따라 학장실로 이동했다.

“지금 못 한 세트는 저녁 먹고, 밤에 다시 하죠. 레토.”

드디어 벗어났다고 여기는 레토에게 절망을 남겨주는 걸 잊지 않고 말이다.

*

‘…이건 또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조합인데.’

학장실 안에 학장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들어서기 전 알아차렸다.

궁에서 나온 걸까. 아니면 교단에서 온 걸까. 그리 여겼는데.

“카일.”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각하.”

“그렇군. 오랜만이군. 서쪽 출정 이후 처음인가.”

“그렇습니다.”

아카데미를 찾아온 손님은 다름 아닌 켄드릭 글로스터 데 슈렐리츠 대공이었다.

슈렐리츠 대공가. 제국에 존재하는 단 세 개의 대공 가문.

제국이 벌이는 커다란 전쟁이 있을 때마다 항상 나서는 것이다.

군권 하면 슈렐리츠 대공가다. 그래서 붙은 별칭마저 제국의 검, 개전의 나팔이다.

‘그런 슈렐리츠 대공이 이 타이밍에, 나를 찾았다.’

이미 제국 동쪽에서 일이 터졌음은 진작 알고 있다.

그 와중에 슈렐리츠 대공이 찾아왔다는 건 때가 가까워졌음을 의미할 터.

“그러면 이야기 나누시길, 대공 각하.”

“미안하오. 학장. 갑자기 찾아온 것도 그렇고, 이렇게….”

“아닙니다. 이곳이 아니면 대공 각하께서 편히 이야기나 하시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학장실을 나서는 학장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살짝 미안해진다.

분명히 이곳은 학장실. 즉 학장을 위한, 그만의 공간일 텐데.

자신이 입학한 후로 잊을 만하면 높으신 분들이 들이닥치지 않는가.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학장은 제 방에서 쫓겨나 어딘가로 가있어야만 했다.

적당히 높은 사람이면 같이 이야기를 하거나, 그게 아니면 다른 곳을 안내라도 해줄 텐데.

찾아오는 이가 황태자, 황녀, 대공, 장관, 뭐 이런 식이니 말 다했다.

‘나중에 죄송하다고 뭐라도 좀 챙겨줘야 하려나.’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저러다가 스트레스로 탈모라도 오면 어떻게 해.

“일부러 되도록 오후 늦은 시간에 왔네. 강의는 다 끝났는가?”

“예. 다행히도 조금 전 전부 끝났습니다.”

강의를 준비해야 하는 카일에 대한 대공의 배려임과 동시에.

잠깐의 만남으로 끝이 날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앉지.”

자리를 권한 대공이 카일을 마주보고 앉는다.

지금은 나이를 먹어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한때는 엄연한 강자였던 슈렐리츠 대공.

그 눈빛이나 기세는 카일조차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예기가 돋아있었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 같아 미안하군.”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심 기다렸는데요. 언제쯤 슈렐리츠 대공가에서 사람이 올까.

분명히 황태자가 은근한 어조로 자신의 참전 의사를 알렸을 텐데.

그렇다면 슈렐리츠 대공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거든요.

‘설마 대공이 직접 아카데미로 달려올 줄은 몰랐지만.’

제국 입장에선 절대 좋은 일이 아니다.

‘대공’ 씩이나 되는 인물이 이 정도로 급하다는 것이니.

하지만 카일 입장에선 오히려 더 좋은 일이다.

그만큼 상대방이 예상외로 강하다는 뜻이니까.

“방학은 잘 보냈는가? 듣자하니 존 나센에 손님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그렇죠. 오랜만에 손님들이 오셔서 부모님도 즐거워하셨습니다.”

“남작이 즐거워했다니 그건 그거대로 굉장히 놀라운 소식이군.”

처음에는 가벼운 주제로,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대공의 입에서 며칠 전 있었던 황실 입궁 주제가 나왔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대공의 신호이기도 했다.

“…해서, 황태자 전하께서 아주 즐거워하시더군.”

“다행입니다. 혹 무례한 모습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그러시지는 않을 거야. 그 정도 도량도 없으신 분은 아니시라네.”

직후 대공이 흠흠, 헛기침을 한 번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황태자 전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전해 들었네. 자네, 이번 일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했었지. 내 말이 맞는가?”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아주 많은 관심이죠.”

“…허면 혹시, 제국 군단 휘하에서 움직일 생각이 있는가? 오해하지는 말게. 명령을 내리고 싶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형식적인 부분으로 말이야. 혹 그게 아니라면 서쪽 전선 때처럼 이번에도 독단적으로 움직일 생각인가?”

저리 묻는 이유는 아마도, 제국 군단의 다음 행보에 대한 문제 때문일 것이다.

이전처럼 독단적인 행동을 한다는 건 원하는 싸움만 하고 이후는 관여치 않겠다는 뜻.

반대로 형식적으로나마 휘하에 있다는 건 제국군을 암묵적으로 돕겠다는 뜻이 된다.

즉, 국경을 넘어 아예 유목 부족의 영역으로 진군할 때 도와줄 수 있느냐는 것인데.

‘어쩐다….’

일단 10강을 패퇴시켰다는 강자에 대해서는 군침이 싹 돈다.

그렇지만 그 이후는… 글쎄. 더 재미있을지 아니면 실망스러울지 살짝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