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199화 (199/318)

“그래서, 오늘 출발이라고요.”

엘가의 물음에 카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는 성녀가 잔뜩 걱정이라는 표정을 하고 있다.

티샤는 강의 때문에 배웅을 나오지 못 하게 되었다.

속상해 죽겠다고 칭얼거리는 걸 데이트 했으니 된 거 아니냐고 달랬다.

그리고 티샤가 이 자리에 나오면 살짝 난감해지기도 한다.

‘아닌 척 해도 다른 여자들, 특히 엘가가 은근히 경계하는 눈치란 말이지.’

티샤와의 데이트가 모두에게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 또 티샤가 나타난다면 이들의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해서 카일은 ‘강의 때문에 배웅을 못 한다.’ 라는 부분을 일부러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엘가나 성녀 입장에선 그래도 조금 만회했다고 여길 터.

티샤도 불안감을 벗어던지고 다시 이들과 섞일 수 있다.

“내가 듣기로는 5황녀 저하도 출전이라고 하던데.”

결정적으로, 지금 엘가와 성녀는 황녀의 출전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직진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언제고 카일에게 달려들 것만 같다.

그런 여자가 자신들도 없는 사이에 카일과 같은 공간에 있을 거란다.

물론 지금 나아가는 이유가 어디 소풍을 가는 것도 아니고, 대규모 전쟁이다.

그곳에서 미쳤다고, 그것도 황족이 허튼 짓을 할까 생각도 든다.

문제는 5황녀 율리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지만.

“그건….”

“물론 크게 걱정은 안 해요. 황녀 저하도 제국 10강으로서 출전하시는 거니까. 제국의 검들이 제국의 승리를 위해서 나아가는 거니 당연히 박수를 치며 환송해야겠죠.”

어째 저 말 속에서 ‘조심해요. 황녀 저하의 쓸데없는 짓에 휩쓸리지 않도록.’ 라는 속내가 느껴지는 것일까.

“죄송해요, 카일 형제님. 마음 같아서는 저도 같이 가고 싶은데….”

“절대 안 됩니다. 성녀님. 이번에는 진짜 안 돼요.”

그래도 어느 정도 교단의 입김이 작용하는 왕국 연합이나 남쪽 섬들과는 다르게, 동쪽의 초원은 그들만의 토속 신앙이 확고하게 뿌리를 잡고 있다.

성녀라는 존재는 그들이 보기에 성스러운 여인이 아니라 전리품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카일 말이 맞아요, 성녀님. 이번 일은 단순한 몬스터 토벌도 아니고 대규모 전쟁이랍니다.”

“역시 제가 직접 가는 건 그렇겠죠….”

“여기 남으셔서 제 승리만 기도해주셔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카일의 위로에 성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그가 부상을 입으면 어쩌나 싶지만 이렇다 할 도리가 없다.

교단에서도, 그리고 제국에서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10강조차 기습을 당해 부상을 입었는데 전선의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다.

“카일. 그런데 당신이나 이안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출석을 말하는 거면 괜찮습니다, 엘가님. 제가 다 조치를 취해두었거든요.”

정확히는 황실에 부탁해서 황태자가 직접 처리한 일이지만.

“잘 다녀오세요, 이안님.”

“그래. 늦장 부리지 말고 운동 열심히 해. 카일이 돌아와서 화내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무조건 그럴 생각입니다. 저도 살고 싶거든요.”

“부럽습니다! 저도 그런 곳에 가서 공을 세우고 싶은데!”

옆에서는 이안이 레토와 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저 셋은 어느 순간 트리오 비슷하게 되었다.

모두가 카일 밑에서 엄청나게 굴렀다는 확실한 구심점이 있으니까.

“슬슬 출발하죠, 이안. 정문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눈치인데.”

“알겠어. 그런데, 정말 이러고 가도 되는 건가? 전장이라면서.”

“동쪽 전선으로 이동하면 알아서 챙겨줄 겁니다. 설마 그런 옷 입고 싸우게 할까.”

물론 카일 본인은 이 복장 그대로 싸울 생각이었다.

갑옷을 왜 입나. 불편해 죽을 것 같은데. 무겁기만 하고.

칼이나 창? 저번에 맞아보니까 버틸 만 했다. 살살 맞으면 될 지도.

화살 따위야 피하면 되고 마법은 쓰기 전에 쫓아가서 제압하면 된다.

“잘 다녀와요, 카일.”

“다치지 마세요! 다치시면 저 바로 동쪽으로 갈 거예요!”

“알겠으니까 다들 학업이랑 단련 모두 잘 하고 있어요. 다녀왔는데 조금이라도 퍼진 기운이 있으면 그때는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웃으면서 카일의 대답에 무언가 말을 하려던 엘가.

그러다가 문득, 그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로 눈길이 간다.

‘…못 보던 건데.’

슬쩍 고개를 돌려 옆에 서있는 성녀를 바라본다.

거짓말을 못 하는 여자다. 조금만 바라봐도 알아서 허물어지는 사람이다.

그런 성녀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성녀님은 아니고. 황녀 저하는… 저런 걸 줄 바에 청혼을 하실 분이고.’

그렇다면 남는 사람은 하나, 얼마 전 데이트의 주범인 티샤.

단순히 데이트로만 끝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정말이었다.

이게 뭐냐고 카일에게 넌지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엘가는 입술을 다물었다.

전장으로 떠나는 사람의 속을 괜히 혼란스럽게 만들 필요는 없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티샤가 이 자리에 없으니 배웅의 대가로 주었을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절대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거지.’

슬그머니 질투심이 일기도 하지만 그건 나중, 아주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남들을 시기하고 경계하는 것보다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때.

카일이 자리를 비운 동안 자신도 할 일이 아주 많다.

예로 들자면, 사교계에서 슬슬 떡밥을 던지는 행위라던가.

“다들 운동 열심히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엘가의 속내를 전혀 모른 채, 운동 걱정만 하는 카일이었다.

*

이동 마법진의 빛이 점차 사그라든다.

슈렐리츠 대공과 지휘부, 그리고 카일과 이안이 속한 그룹이었다.

이미 몇몇 군단은 진작 도착하여 주둔하고 있고, 나머지들도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는 상황.

지휘부까지 전부 도착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동쪽으로 나아갈 차례였다.

물론, 그 전에 반드시 만나서 확인할 사람이 있었다.

“이쪽입니다. 대공 각하.”

“클레멘타인 경의 상태는 어떠한가?”

“다행히 치유가 잘 들어가서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1선에 나서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되어 일단 후방에 머물고 있는 중입니다.”

로저스 클레멘타인. 얼마 전 유목 부족 전사와의 싸움으로 부상을 당한 10강의 일원.

적이 강해서 그러했든, 아니면 기습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든, 결국 패퇴했다.

그로 인해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을 것이 확실하다.

‘당장이라도 원수를 갚겠다며 최전선으로 뛰쳐나갈 줄 알았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직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건 좋은 신호다.

카일과 이안을 대동한 채, 슈렐리츠 대공은 후방 지휘부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만히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한 남자와 마주했다.

“대공 각하.”

“로저스. 부상을 당했다더니 오히려 좋아 보이는군.”

“치유가 너무 잘 들어갔나 봅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멋쩍은 웃음을 짓는 중년 남성, 그러나 채 지우지 못 한 부끄러움이 남아있다.

유목 부족에게 패배한 것이 역시나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죄송합니다.”

“자네가 무엇이 죄송해. 놈들이 작정하고 나선 것이야. 보게. 제국에 우호적이던 에켄 부족까지 씨를 말렸다고 하지 않은가.”

오는 내내 동쪽에 대한 각종 정보를 취합하고 확인한 슈렐리츠 대공이다.

그의 말에 로저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공에게 자리를 권했다.

“차가 놈들의 동태는 어떠한가.”

“당장이라도 국경을 넘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행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후방의 안정화를 위해 협조하지 않는 모든 부족을 제압할 생각인 듯 합니다.”

“적절한 판단이군. 하지만 그럴 힘이 있나? 듣기로 동쪽에는 비등한 세력의 부족들이 워낙 많아 통합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하다고 들었네만.”

“스스로를 가한이라 칭하는 자가 전면에 나서고, 또 대단한 실력자들이 그에게 합류하면서 상황이 바뀐 것 같습니다. 저를 상대로 한 자 역시 그 가한이라는 자의 수하입니다.”

이어진 내용은, 유목 부족들이 소규모의 게릴라로 계속 국경 인근을 찌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주력들은 아직 동쪽 초원에서 활동하며 주변 부족들을 제압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면 당장 진격하는 게 맞지 않나? 주력이 없다는데.”

조용히 듣고 있던 이안이 슬그머니 카일의 귓가에 속삭인다.

그 말을 들은 것인지 슈렐리츠 대공이 말을 받는다.

“이곳 유목 부족들의 게릴라 전법은 실로 교활하기 짝이 없다네. 그럴 바에 차라리 적의 주력이 오면 한 번의 회전으로 끝내는 것이 나을 지경이지.”

“한 번의 전투로 적의 지휘 세력까지 일망타진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희망사항이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긴 하지만.”

대공은 그 말을 남기고 로저스에게 카일을 소개시켜주었다.

동쪽에서 주로 활동하던 그였기에 카일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로저스는 굉장히 반갑고 신기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인사를 나눈 후에는 집결한 군단 상태를 점검하기로 말이 나왔다.

굳이 그 자리까지 동석할 이유는 없었기에, 카일은 이안과 함께 먼서 숙소로 향했다.

“카일. 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이상한 것만 아니면요.”

“우리가 얻은 시간이 길어도 한 달이라고 했잖아.”

“그렇죠?”

한 달의 출석을 용인해주겠다는 확답을 들었다.

그 말은 한 달 안에 모든 걸 끝내고 돌아가야 한다는 뜻인데….

“정말로 한 달 안에 끝이 나긴 하는 거냐? 지금 상황을 보면 한 달이 아니라 1년은 넘게 걸릴 것 같은데. 그냥 아무 것도 안 하고 돌아가는 건 아닐지 걱정이야.”

나름 타당한 걱정이다. 전쟁이 정말 한 달 안에 끝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 원래는 그게 맞다. 맞는데….

“한 달 안에 끝나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정말로?”

이안의 반문에 카일이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말한다.

“한 달. 끝.”

분명 환하게 웃고 있는데, 소름이 끼치는 이유는 대체 뭘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