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06화 (206/318)

동쪽의 강자와 한바탕 결투 이후, 제국군 진영으로 복귀했다.

카일과 황녀, 그리고 이안을 맞이한 슈렐리츠 대공은 당연히 크게 놀랐다.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왔으니 심각한 일이 생긴 거라고 오해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웃고 있는 카일과, 전투의 흔적이 없는 황녀와 이안을 바라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서쪽에서처럼 또 혼자 나서서 제대로 한바탕 하고 왔구나.

그리고 당연하게도, 승리는 카일의 것이었을 테고 말이다.

“아, 참고로 끝장을 보지는 않았습니다.”

“끝장을 보지 못 했다고? 허면 무승부라는 것인가?”

“승부가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그냥 다음에 또 한 판 붙어보고 싶어서요.”

카일의 대답에 제국군 지휘부는 이게 뭔 소리인가, 하고 당황했다.

심지어 제국 10강들조차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 했다.

끝장을 내지 못 했다고 해서 승패를 가르지 못 했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서로 비등비등한 실력을 지녔기에 다음을 기약하고 물러선 줄 알았는데.

카일의 말을 들어보니 몰아붙여놓고 놓아준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 것이다.

심지어 의심의 눈길까지 받을 수 있는 말이다.

지금 제국과 동쪽의 유목 부족들은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그 상황에서 적이 대장 중 하나를 놓아주었다는 뜻.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바로 창칼을 겨누었을지도 모른다.

“…자네도 진짜, 결국 어쩔 수 없는 존 나센이군.”

하지만 총지휘관 슈렐리츠 대공은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는 이미 저번에 리어와 레아가 날뛰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존 나센이 패배? 그럴 리가 있나. 재미있어서, 또 싸우고 싶어서.

그런 이유로 상대방을 한 번 보내준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는 건 나중에 또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소리지.’

대공은 얼른 가서 상처를 치료하라며 카일을 보챘다.

형식상으로는 제국군 휘하에 있기도 하고 최고 전력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항상 완벽한 상태로 대기하는 것이 무엇보다 좋으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대공 각하. 제국군 진격은 언제입니까?”

그러나 카일은 제 부상보다도 다음 일정에 더 많은 관심을 지닌 듯 했다.

“정찰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적 선봉이 이 근처에 당도했다고 하더군. 해서 내일 군을 이끌고 놈들과 한 번 맞부딪쳐볼 생각이야.”

“오. 그러면 저도….”

“안 되네.”

슈렐리츠 대공이 카일의 말을 가로막는다.

“자네는 부상자야. 서쪽에서처럼 얕은 상처들도 아니란 말일세.”

“이까짓 상처 금방 낫습니다. 그리고 다 안 나았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누가 오든 오늘과 비슷한 결과가 나올 테니까요.”

“치료 마법을 쓰면 상처는 낫는다고 해도 출혈이나 피로도까지 전부 회복 되는 건 아닐세. 내일은 전초전에 불과할 것이니 쉬도록 하게. 가장 큰 전투가 벌어질 때 피로가 쌓여서 조금이라도 제 힘을 내지 못 한다면 굉장히 아쉬울 것 아닌가.”

역시 슈렐리츠 대공다웠다. 존 나센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지금 조금이라도 쉬는 게 나중의 대전투 때 분명 큰 도움이 된다.

당장 앞에 다가온 전투는 그냥 조그마한 싸움이니 쉬고 있어라.

어차피 네가 있어도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괜찮을 거다, 라고 말이다.

“뭐… 오늘 재미 좀 봤으니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겠죠. 알겠습니다. 대공 각하. 생각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네. 오히려 자네가 뜻을 접어주니 내가 고맙군.”

“대신 이 친구는 좀 데려가주시죠.”

카일이 가리킨 곳에는 멀뚱히 서있는 이안이 있었다.

“이름이, 이안이라고 했던가.”

“예. 한창 무섭게 성장 중인 친구입니다. 데려가셔서 적당한 곳에 두시면 알아서 잘 날뛸 것 같으니까 저를 믿고 한 번 데려가시죠.”

그 말에 대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수락했다.

카일이, 그 존 나센의 직계가 추천한 인재다. 절대 보통 인물이 아니다.

황녀까지도 괜찮다고 하는 걸 보면 미래의 10강이 될 원석일지도 모른다.

“황녀 저하.”

카일과의 대화를 마친 대공이 이번에는 황녀를 바라본다.

“저하께서는 내일 출전하시는 겁니까?”

“아니. 난 안 가.”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를… 잠깐만, 지금 안 가신다고 하셨습니까?”

“응.”

간결한 황녀의 대답에 대공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 전부가 경악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황녀도 투쟁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전투광이기 때문이었다.

당장 바로 내일 전투가 있는데. 그곳에서 어떤 강자가 나타날지 모르는데.

그 전투에 참전하지 않겠다고 하니 놀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녀 저하. 정말 안 가실 겁니까? 나중에 말 바꾸시지 말고요.”

“로건 경 말이 맞습니다, 황녀 저하. 변덕을 부릴 곳이 아닙니다.”

황녀와 어느 정도 알고 지내는 사이인 로건과 스로드가 나선다.

지금과 같이, 황녀가 가끔 변덕을 부려서 주변 사람들을 난처하게 했던 적이 있다.

이번에도 혹 그런 이유로 저러는 게 아닐까 걱정들을 하는 눈치였다.

“안 가도 돼. 진짜 안 갈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 걱정에도 불구하고, 황녀는 선언하듯 딱 잘라서 말했다.

그럼에도 다른 10강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자 이 말을 덧붙였다.

“난 내일 카일이랑 있으려고.”

황녀의 그 대답에 반응들이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아하, 하고 눈치를 챈 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게 무슨 일이야, 하는 반응.

미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녀 저하가? 하는 반응도 보였다.

“아무튼 잘 다녀와. 대공님도.”

해맑게 웃으며 손을 휘젓는 황녀를 바라보면서, 카일은 그냥 내일 좀 나가면 안 되냐고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

부스스-.

“…아, 시발. 꿈.”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은 욕설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행복한 꿈을 꾸었다. 아주 엄청난 내용이었다.

꿈속에서 어제 만난 소치르가 두 명이나 튀어나왔다.

그 두 명과 신명나게 치고 박고 싸우는데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그런데 갑자기 가슴이 묵직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꿈에서 깨고 말았다.

‘도대체 누가 잠자는 존 나센의 가슴팍을 짓누르는….’

제 가슴 위에 얼굴을 박고 있는 황녀를 보곤, 카일은 입을 다물었다.

황녀라는 여자가 제 숙소에까지 침입한 것에서 일단 1차로 당황했고.

무슨 인형마냥 볼을 부비적거리고 있는 것에서 인지 부조화가 와서 2차로 당황했으며.

그런데 또 자는 모습이 왜 그리 예쁜지 심장이 덜컥여서 3차로 당황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한 시간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아무래도 어제 확실히 출혈 때문에 몸이 많이 피곤했던 모양.

당장 급했던 상처에만 치료 마법을 받고 나머지는 그냥 붕대로 감아두었다.

전투를 치렀는데 몸이 깨끗하면 전투를 치른 맛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핏물이 배인 붕대 좀 감고 있어야 ‘아, 내가 치열하게 싸웠구나.’ 라는 느낌이 산다.

“우으.”

카일이 움직이는 기척에 본인도 잠에서 깬 것일까.

은빛 폭포수 사이로 붉은 눈을 지닌 미녀가 슬그머니 다가온다.

그리고는 잠깐 카일을 바라보다가 한쪽 손으로 자신의 옷을….

“잠깐. 동작 그만.”

바로 황녀의 손을 낚아챈 카일이었다.

“뭐합니까. 옷은 왜 벗으려고 해요.”

“남자랑 여자랑, 같이 있잖아. 그러면 해야 할 게 있어. 그게 예의야.”

“여기는 제 숙소로 지정된 천막이고, 황녀님은 여기 계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몰라.”

이 여자가 진짜. 혹시 자는 도중에 뭐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옷매무새를 점검해보니 다행히도 수면 도중에 거사를 치른 건 아닌 듯 하다.

애당초 황녀가 덮치는 순간 바로 깨어났을 테고 말이다.

“왜 피해? 다 큰 성인 남녀가 이러는 건 당연한 거야.”

그러는 와중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는 황녀.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야한 생각을 해서 그런지.

몽롱한 붉은 눈동자에서 굉장히 위험한 빛이 내뿜어졌다.

카일은 갈등했다. 남자의 마음으로서는, 그냥 넘어가주고 싶다.

솔직히 성욕이 없는 건 아니다. 특히나 이런 미녀가 자꾸만 안기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남자의 본능보다 생존에 대한 본능이 더 강력했다.

확신이 들었다. 여기서 황녀의 유혹에 넘어가면, 나중에 진짜 큰일 날 것이라고.

티샤도, 엘가도, 그리고 성녀도, 어떻게 감당할지 상상이 안 되었다.

“황녀님. 나중에요. 진짜 나중에. 여기 전장이라고요.”

“괜찮다니까. 대공님이랑 다른 10강들은 새벽에 병사들을 이끌고 전부 출전했어. 여기 남은 건 예비 병력이 전부야. 우리가 뭘 해도 아무도 모를 거야.”

그러니까 안 된다고 하는데도 이 황녀님이!

“어차피 나 놓아줄 생각 없잖아. 그렇지 않아? 그런데 뭐가 문제야?”

정곡을 찌르는 황녀의 물음에 카일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어차피 나중에 가면 황녀랑 할 거 다 할 텐데 왜 지금은 참고 있을까.

그 때도 티샤, 엘가, 그리고 성녀까지 전부 곁에 있을 텐데.

‘…아니야. 그래도 이건 아니야. 이건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야.’

고개를 내저은 카일이 황녀를 다시 밀어내려는 순간이었다.

촤악!!-

갑자기 천막 입구가 걷히고 두 명의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놀란 카일은, 두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기척도 알아차리지 못 했다는 걸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구… 우… 어.”

그리고 또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아. 내가 알아차리지 못 한 게 당연했구나. 황녀님도 모를 만 했구나.

“카일.”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버지와 형이 여기 있을 수가 없으니까.

언젠가 올 거라고는 예상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는 아니었다.

“…아버지? 형님? 아니, 잠깐만. 어떻게 벌써 오셨어요?”

거리라는 게 있다. 북쪽에서 동쪽까지, 이렇게 빨리 올 수가 없다.

이동 마법진이라도 이용했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혹시 이동 마법진 이용하셨어요?”

“그런 걸 왜 이용하느냐. 단련에 전혀 도움도 안 되는데.”

혀를 찬 존 나센 남작이 답한다.

“순간이동 했다.”

“…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순간이동?

카일이 전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눈치이자 남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스쿼트와 런지로 단련된 대퇴근과 카프레이즈로 단련된 비복근으로 몸을 박차 제자리멀리뛰기를 하는 것이지. 그게 존 나센 순간이동이다. 그렇게 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왔다.”

그 말을 들은 카일은 생각했다.

대체 제국은, 과거 어떤 싸움을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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