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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13화 (213/318)

가한의 이름은 단순히 강하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압도적이어야 한다. 그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존재여야 한다.

모든 늑대의 후예들을 이끌 수 있는 존재는, 칼로써 증명해야 한다.

이 한 번의 휘두름으로서 내가 그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과거에 취한 것이 아니라 현재를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가 부족의 우르테게이는 부족한 곳이 없었다.

동쪽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며 모든 부족의 전사들을 꺾었다.

말 한 필, 칼 한 자루, 오직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

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평원이 깎여나갔고 구름이 조각났다.

들판의 그 어떤 사나운 짐승도 감히 그를 상대로 도망치지 못 했다.

그를 만난 강자들은 족족 자리에 무릎을 꿇어 충성을 다짐했다.

동쪽 너른 평원의 진정한 가한이 될 수 있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어떤 계략도 없이, 오롯이 본인의 능력으로.

힘의 논리로서 움직이는 이 초원에 적법한 지배자였다.

쿠우웅!!-

“크흑!”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우르테게이는 처음으로 제 가한의 호칭에 의문을 품어야 했다.

수도 없이 칼을 휘둘렀다. 온몸의 마나를 쥐어짜내고 근육과 뼈가 터지도록 힘을 냈다.

한 번, 한 번 휘둘러진 공격이 대지 위에 깊고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하늘로 튕겨 나간 공격은 구름조차 갈라내는 위용을, 아직도 확실하게 지니고 있었다.

더 싸울 수 있다. 여전히 몸은 멀쩡하다. 지치지도 않았다.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이 몽롱한 것도 아니다. 심지어 칼조차 멀쩡하다.

설령 칼이 부러진다고 해도 그를 대신할 팔과 다리, 전부 멀쩡하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한 번, 한 번 부딪칠 때마다 승리에 대한 확신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는 걸까.

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상처 하나조차 내지 못 한다.

그 어떤 허초를 던져도 그것에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꿰고 있다. 아니, 눈이 가기 전에 이미 몸이 움직이고 있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모든 생각을 다 동원한다고 해도.

눈앞의 이 중년 남성은 주먹 하나로 모든 것을 갈가리 찢으며 다가올 뿐이었다.

“흠!”

가한의 두 눈에 다급함이 차오른다.

저 기합 너머로 거대한 강물이 덮쳐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 충분하다. 방어만으로는 부족하니, 역으로 공격을 해보자.

그리 결정안 가한은 힘껏 몸을 당기는 것과 동시에 칼을 휘둘렀다.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공격, 설령 제 전사들조차 일격에 자를 수 있는 베기.

그 예기 앞에 주먹이 날아들고 다시 한 번 거대한 힘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쩌어어엉!!-

쿠과과!!-

“크으으으!!”

피부가 아릿하고 온몸의 뼈마디가 시큰거릴 정도의 반동이 몰려온다.

버텨야 한다. 이를 악물고서 자리를 지켜야 한다.

여기서 밀리면 몸에 끔찍한 충격이 전해질 것이다.

그리 된다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 이 반동을 이겨내야 한다.

으득!-

앙다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흐르고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간다.

이미 주변은 초토화된 지 오래다. 전투의 향방을 살펴야 하나 그럴 여유조차 없다.

단 1초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순식간에 불귀의 객이 될 것이다.

“대단하군. 제국도 이런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죽을 각오로 임하고 있는 가한과는 다르게, 존 나센 남작은 그냥 웃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웃고 있는 것조차도 제국 입장에선 기겁을 할 일이었다.

제 공격을 이렇게나 많이 받아친 상대가 도대체 얼마만일까.

과거 제국과의 싸움에서도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그 때는 젊은 치기만 가득했을 뿐, 지금과 같은 노련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남자는, 계속 밀려나면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카일의 말대로, 이 늑대는 정말 최고의 사냥감이라 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해볼까. …아니지. 아니야. 그러다가 너무 일찍 망가진다면.’

남작은 고민했다. 눈앞의 이 상대라면 아주 조금은 더 즐겁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충분하지만 그래도 인간으로서 그 이상의 쾌감을 느껴보고 싶은 건 어쩔 수가 없다.

천천히 오래도록 즐기느냐. 아니면 빠르지만 단 한 번의 더 큰 즐거움을 얻느냐.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전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크아아악!!”

“하체에 힘을 더 실어야 버티는 겁니다.”

제 큰 아들, 리어와 싸우고 있던 도끼를 든 사내가 뒤로 날아간다.

그와 함께 튀어나간 리어가 그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땅에 패대기친다.

커헉! 하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가 싶었지만, 그는 일어났다.

“대단합니다. 하체는 별로여도, 인내심 하나는 최고입니다.”

감탄사를 한 번 내뱉어준 리어가 다시 상대방을 잔혹하게 몰아붙인다.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 눈에 들어온 상대는 놓아주지 않는다.

그것은 조금 전 합류한 막내아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거 좀 다쳤다고 이리 비실비실합니까?”

“끄으윽!!”

“사지 멀쩡하고, 오감 어디 한 곳 망가진 곳도 없고! 다 멀쩡한데 도대체 왜 그때만큼 힘을 못 쓰냐고요! 다치긴 나도 다쳤는데! 이러면 기껏 형님한테서 낚아챈 이유가 없다고!!”

콰아앙!!-

카일의 발차기가 소치르의 안면에 그대로 적중했다.

찰나에 얼굴을 틀어 어떻게든 충격을 완화한 것 같지만, 전부는 그러지 못 했을 것이다.

‘음. 이러다가 아이들이 먼저 끝내고 한입만 달라고 할 것 같구나.’

불길한 예감을 감지한 존 나센 남작은 결정을 내렸다.

아쉽지만, 조금 빨리 끝내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이다.

“미안하네. 이제부터는 조금만 더 세게 하겠네.”

그 말에 가한은, 아니 우르테게이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지금도 겨우 버티고 있는데 여기서 더 세게 하겠다고?

상대방은 지친 기색이 전혀 없다. 숨소리 하나조차 거칠어지지 않았다.

그에 반해 자신은 공격다운 공격도 못 해보고 여기까지 밀렸다.

가한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이겨내야만 한다!

“크으으으!!”

그래. 어디 더 강하게 해봐라. 나 또한 더 강하게 하면 될 터이니!

비록 당장의 무력은 네가 더 강하다고 해도, 늑대는 결코 쉬이 쓰러지지 않는다.

그 강철 같은 체력과 사라지지 않는 끈기로 결국 이기는 건 언제나 늑대다!

“이 몸은! 영광스러운 늑대들의 후예. 우르테….”

피이이잉---.

우르테게이의 몸이 순간 하늘로 솟구쳤다가 다시 바닥에 처박혔다.

고통이 전해지기도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이었다.

다시 그의 몸이 우측으로 꺾였다가 이번에는 좌측으로 허물어진다.

그는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러서 반격을 하려고 애썼다.

대단한 일이었다. 그 순간에 반격을 하려는 의지와, 움직여주는 몸이 있으니.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애당초 상대가 전혀 안 되는 싸움이었다.

칼날이든, 송곳니이든, 하다못해 주먹질이든.

일단 상대방에게 닿아야 무엇을 할 수가 있지 않겠는가.

‘닿을 수가 없다. 닿을 수가 없어….’

잡았다 치면 이미 멀어지고, 멀어졌다 생각하면 이미 지척까지 와있었다.

날붙이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걸 사용했다면 이미 전투는 진작 끝나서 결판이 났을 것이다.

이것이 내리쬐는 햇볕인지, 아니면 날아드는 주먹인지.

자신을 짓뭉개는 것은 저 거대한 힘인지, 아니면 이 세상 자체인지.

우르테게이는 이제 아무 것도 확신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커헉! 컥!”

겨우 몸을 가누고서 주변을 살폈다.

영광스러운 늑대의 후예들은, 사방에서 짓뭉개지고 있었다.

꼬리를 말고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그 뒤를, 커다란 웃음소리를 내며 뒤쫓는 자들이 있었다.

사박-.

인기척을 느낀 그는 엉망이 된 몰골로 앞을 바라보았다.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은,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숨소리 하나 바뀌지 않은.

하늘조차도 갈라버릴 수 있었던 자신조차 닿지 못 한 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인정하겠다.”

“….”

“당신은, 내가 만난 그 어떤 인간보다 강하다.”

쿨럭, 쿨럭-.

검붉은 피를 토해내던 우르테게이는 그만 웃고 말았다.

저것이 진정 강자에 대한 인정인가? 아니다, 그딴 게 아니다.

그냥 박수를 치고 감탄하고 있는 게 전부다.

느낄 수 있다. 여전히 저 남자는, 제 전력을 다 하지 않았다.

제국의 10강조차도 베어버릴 수 있었던 자신이 이리 엉망이 되었는데.

상대방은 뒷짐을 진 채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지 않은가.

자신은, 동쪽의 가장 위대하고 강한 늑대다.

하지만 상대는 하늘 그 자체다. 아무리 늑대라고 해도, 결국 땅 위의 짐승일 뿐이다.

갖은 수를 써도 늑대가 하늘로 뛰어 올라 그것을 물을 수는 없는 법.

“하나만, 하나만 묻겠소.”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며, 우르테게이가 입술을 뗀다.

“그대들은… 용이요?”

알고 싶었다. 정말 그 전승이, 그냥 허무맹랑한 것이 아닌.

제 후예들에게 경고의 의미로서 남긴 조상의 뜻이었는지.

그것을 어긴 자신들에게 기어코 천벌이 내려지는 것인지 말이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다만, 내가 인정한 상대이니 최대한 답을 해주겠네.”

존 나센 남작은 온몸의 근육을 한 번 풀어주며 말을 이었다.

“초대께서 나타나시어 마침내 이곳이 운동하기 좋은 곳이라 하셨다. 그리고 우리들의 고향에 당신의 비법을 전수하시고 어느 순간 빛과 함께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셨다. 남은 것은 원판과 봉이었고, 남기신 말은 ‘봉은 내가 들어주지 않는다.’ 셨다.”

“…?”

우르테게이의 입장에선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워낙 존 나센 남작의 얼굴이 진지하니,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우리가 용이라는, 그런 존재냐고 묻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하겠네.”

쿵-.

남작이 한 걸음을 내딛으며 확신하듯 말했다.

“우리는 그저, 단련을 사랑하는 인간일 뿐이네. 물론, 그게 좀 과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남작의 팔이 뒤로 한껏 당겨진다.

투두둑!! 투두둑!!-

옷이 터져나가고 핏줄이 솟구치며 근육들이 괴성을 토해낸다.

주변의 마나들조차 산산이 흩어지며 아무 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 이루어진다.

안에는 오직 그동안 흘린 땀방울, 그리고 기울인 노력만이 존재했다.

“…하나만! 하나만 더 묻겠소! 그대가, 그대들이 생각하는 강함은 무엇이요! 지배하라고 있는 것이 바로 압도적인 강함이 아니요! 한데 당신들은 도대체! 어째서!! 왜!!”

“틀렸네.”

남작은 칼로 잘라내듯 상대의 말을 끊어냈다.

“강함이란, 보다 더 강해지라고 주어지는 의무인 걸세.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것이네. 평생을 갈고 닦으며 보다 더 강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강함’ 에 대한 정의라네.”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우르테게이는 탄식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래. 결국 초원의 늑대들이 기다려야 할 것은, 바로 저들이었다.

저들이, 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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