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투의 한 가운데.
그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주 화사한 웃음소리들이 끊이지 않는다.
“하하하하하하!!”
“호호호호호호!!”
혹시 극도의 두려움에 정신을 잃은 자들이라도 되는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 웃는 자들이 벌이는 짓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쿠과과과과!!-
봉 하나 들고서 온갖 창칼이 가득한 전장을 한 번에 휩쓸고 지나간다.
눈앞에 무엇이 있든, 그들을 감히 막을 수는 없었다.
우측으로 나아가면 그 앞에 있는 모든 것이 하늘로 치솟았다.
좌측으로 내달리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게 땅으로 처박혔다.
마치 거대한 바윗덩이가 굴러다니는 모습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곳은 완전히 파헤쳐지고 으스러져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 막아! 막으란… 우아아악!!”
이제 갓 전사의 자격을 지닌 이들도, 전사가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자들도.
모두가 그 바위 앞에서는 공평하게 휩쓸릴 뿐이었다.
가로막으면 죽는다. 저항해도 죽는다. 달아나도 잠시 뿐이다.
“이런 멍청한! 톨가! 그대는 전사들의 지휘를 부탁한다! 나와 보르후는 진영을 망가트리고 있는 10강을 잡겠다!”
가한의 칼 중 하나인 게를레가 말을 달리며 외쳤다.
그에 톨가는 불만스러운 빛을 숨기지 못 하면서도 그러겠다고 말했다.
막 무너지고 있는 지휘부를 찾기 위해 그가 말머리를 돌리는 찰나.
“찾았다!”
화사한 여인의 외침과 함께 세 명의 전사들이 그대로 폭발에 휩쓸렸다.
“크억!”
“끅!”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 한 괴멸적인 타격이었다.
찰나에 방어를 위해 말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팔이 통째로 뜯겨나갔을 것이다.
“어머니! 찾았어요! 여기요!”
가한의 칼들을 일격에 몰아붙인 여인, 레아 존 나센이 손을 흔든다.
그러자 저 멀리서 한 손으로 전사들을 깨부수던 또 다른 여인이 어머! 하고 달려온다.
“이게 무슨….”
게를레는 무척 당황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막아선 두 명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현숙한 모습을 띤 중년의 여성과, 젊음이 물씬 풍겨지는 묘령의 여인.
정체는 모르겠으나 일단 확실한 건 전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들이다.
아무리 잘 쳐줘도 천막에서 식사 준비 하는 게 고작인 여인들에 불과하다.
“…톨가. 작전을 변경하지. 지휘는 나중에 하고, 저들부터 상대해야겠군.”
“동의한다.”
하지만 그 세 명의 전사들 중 어느 누구도 방심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저 여인과 부딪치는 순간, 온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보통이 아니라고. 어쩌면 제국의 그 10강보다 더 강할 수도 있겠다고.
전력을 다해서 상대하지 않는다면 역으로 자신들이 먹힐 수 있다고!
“어머니. 어쩌실 건가요?”
바짝 긴장하고 있는 세 명의 전사들과는 다르게.
레아는 연신 헤헤! 하고 웃으면서 제 어머니의 뜻을 물었다.
“글쎄다. 음… 우리 딸은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고 싶겠지?”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죠? 욕심이 날 수밖에 없어요. 이런 강자들이랑 이렇게나 치열하게 싸우는 거, 한동안은 힘들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레아는 애써 자신의 욕심을 접기로 했다.
그래도 얼마 전에 제국에 와서 약간이나마 몸을 풀어낸 자신과는 다르게.
제 어머니는 고향에서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지 않은가.
“제가 하나. 어머니가 둘. 어떠세요?”
“우리 딸. 효녀네. 이 엄마도 생각해주고.”
“대신 너무 늦으시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아시죠?!”
“그럼. 우리 딸이 생각해주는 건데, 그걸 엄마로서 어떻게 소홀히 하겠니.”
무슨 미친 소리들을 하고 있냐고, 세 명의 전사들이 외치려는 찰나.
피잉!-
“아?”
“어엇?!”
게를레와 보르후는 순간 제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분명히 저 앞에서 이상한 대화를 하고 있던 중년의 여인이.
“시작할까요?”
눈 한 번 감았다 뜬 그 사이에 자신들의 멱살을 낚아챈 것이었다.
“무, 무슨… 크허억!”
“컥!”
방어나 반격은커녕 반응을 할 틈조차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멱살을 쥐인 채로 서로 부딪치는 것이 전부였다.
“이보게들!”
톨가 또한 한 박자 뒤늦게 상황을 인지했다.
움직임은커녕 다가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 했는데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다급하게 그 둘을 도우려고 했으나 곧 그는 본인의 안위부터 걱정해야만 했다.
“당신은 나랑 같이 놀아야죠.”
콰직!-
레아의 발차기 한 방에 그대로 허공에서 열 바퀴를 돈 후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톨가였다.
“끄헉! 헉! 게, 게를레! 괜찮은가!”
“버틸 만 해. 그런데… 방금 그 여자는….”
한편, 남작 부인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은 두 전사는 급히 주변을 살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멱살을 쥐고 뒤흔들던 여인이 있었는데.
지금은, 또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 이게 무슨….”
“일단! 일단 등부터 맞대지. 뒤를 잡히는 일은 없어야 해.”
참으로 모양 빠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앞에 있던 상대를 놓쳤다. 지금도 당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 한다.
그나마 지금처럼 뒤라도 잡히지 않는 것이 최선의….
“사내 분들이 이게 무슨 꼴이에요. 모양 빠지게.”
“끄헉!”
빠각!-
“아들들이 보면 비웃을 거예요. 등을 숨기려고 하다니.”
“커헉!”
우직!-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머물 때마다 전사들은 일격을 허용했다.
뼈와 살이 뭉개지고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보다는 두려움이 훨씬 더 커진다.
일단 눈에 보여야 상대를 하든 말든 할 게 아닌가.
보이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저기요? 반응 못 하나요? 이것도 최대한 천천히 하는 중인데?”
진심으로 안쓰럽다는 듯 혀까지 차는 남작 부인.
그녀는 일부러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기며 최대한 상대가 자신을 붙잡도록 여지를 주었다.
“그으으으!!”
“젠장, 젠장, 젠장!!”
하지만 두 전사는 여전히 그녀의 옷자락조차 잡아내지 못 했다.
그저 허공에 칼만 휘두르며 고함을 내지르는 것이 전부였다.
“어, 어디야! 이 비겁한! 모습을 드러내란 말이다!!”
순간 남작 부인의 입가에서 그 온화한 미소가 사라졌다.
동시에 한창 톨가와 웃으면서 싸우던 레아가 화들짝 놀란다.
그녀는 톨가를 대충 치워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미쳤나?’
비겁하다니? 누가 누구 보고? 아니, 그 전에 그 말이 왜 하필 어머니 앞에서 나와?!
순간 ‘도망칠까?’ 하는 생각까지 든 레아였다. 이건 정말 사태가 심각하다.
여기 있다간 분명히 휘말린다.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저기요?”
결국 레아는 잠시 흥을 가라앉히고 자리를 이탈하기로 했다.
당연히 한창 싸우던 톨가는 챙겨가기로 했고 말이다.
“여기 있다간 진짜 큰일 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다른 곳에서 싸우죠?”
“무슨 헛소리를….”
“됐고요. 정신 바짝 차려요? 최대한 안 아프게 차줄 게요.”
당최 무슨 말이냐고 재차 물어볼 시간도 없었다.
레아의 화려한 돌려차기에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 하고 그대로 날아갔으니까.
상대방도 날려 보냈겠다, 이제 남은 건 본인만 이탈하는 일이다.
레아는 바로 대지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얼른 도망쳐야 제 어머니의 분노에서 안전할 테니.
그 사이, 마침내 발걸음을 멈춘 남작 부인은 천천히 두 전사를 바라보았다.
“비겁이요. 지금, 비겁하다고 했나요?”
사아아….
그녀를 중심으로 하여 한 줄기 미풍이 불어오다 사라진다.
분명히 아무 것도 아닌, 정말 고요하기만 한 풍경에 불과한데.
두 전사는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시선만 고정하고 있었다.
“어쩜 그리, 예쁜 말만 골라서 할까.”
사박-.
차가운 미소를 지은 남작 부인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혼내고 싶어지게.”
*
소치르는 흘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체기는 다 죽어가는 상태다. 겨우 버티고 있지만, 곧 끝이 날 것이다.
가한은 어떠한가. 그도 좋지 않은 상황임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를 상대하는 자가 그냥 규격 외의 존재다. 강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
지금도 봐라. 그곳만 바라봐도 손과 발이 덜덜 떨리지 않는가.
두려움을 모르고 자랐던 자신이, 이렇게 공포스러워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부정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현실 말이다.
다른 곳도 상황은 똑같다.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는 이들 사이로 전사들이 이리저리 휩쓸린다.
그 모습이 마치 늑대들에게 살육 당하는 양 떼를 보는 것 같았다.
초원의 늑대들이라고 하기에는 그 모습이 너무나 추했다.
‘우리는, 우리는 늑대가 아니었던 것인가.’
…아니지. 아니야. 우리는 늑대가 맞았다. 늑대는 맞았어.
다만 문제는, 저들이 양도 아니고 같은 늑대도 아니었다는 것에 있었다.
그래.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저 청년이나 다른 자들은 모두….
“그대들이 용이군.”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왜 우리 선조들께서 그런 전승을 남기셨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아니, 그러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고.
용인지 뭔지 그런 게 왜 나오냐니까? 지금 싸우는 중인데?
“설마, 우리들이 용이라서 당신들이 이길 수가 없었다, 뭐 이런 생각 하는 건 아니죠?”
“….”
“헛소리 마요. 우리가 용이라서 강한 것도 아니고, 이기는 건 더더욱 아니에요. 그냥 아주 간단하게, 우리는 강하지만 더 강해지려고 했을 뿐이고 당신들은 강하니까 한 번 휘두르려고 했다가 크게 데인 거예요. 무슨 전승이니 용이니 헛소리를 하고 있어.”
쯧, 하고 혀를 찬 카일은 얼른 승부나 보자며 소치르 앞으로 다가섰다.
이미 전투는 끝이 났다. 아니,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폭행에 불과했다.
“그래도요. 소치르 씨.”
마지막 수를 나누려던 카일이 씨익, 웃으면서 말을 잇는다.
“솔직히, 당신들 강하기는 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거기에 자부심을 느껴도 좋아요.”
“….”
“이건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형님이나 누님도 인정하실 것 같으니까.”
원래라면 모욕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한 말이었다.
그래. 원래라면 그렇게 느껴져야 할 터인데….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진심으로.”
이상하게 지금은 되레 가슴이 다 뿌듯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