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억! 컥!”
마침내 승패가 결정 났다. 이안의 검이 번뜩이자 전사 하나가 쓰러진 것이다.
가한의 ‘칼’은 못 되었어도 그 칼의 ‘칼’ 정도는 되던 수준의 전사다.
어지간한 기사 따위는 그냥 압도할 만한 강자. 그런 자와 싸워 승리를 쟁취해낸 것이었다.
“후우우….”
이안은 숨을 고르며 검에 묻은 피를 가볍게 훑어냈다.
그리고는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한 번 비교해보았다.
‘예전의 나였다면… 승패조차 알 수 없었을 거다. 이건, 확실해.’
슬쩍 자신의 몸을 한 번 살펴본다. 이렇다 할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베인 상처는 있지만 그마저도 굉장히 얕게 베인 것에 불과하다.
압도적인 승리. 10강 바로 밑의 수준 되는 자를 이렇게 꺾어냈다.
심지어 호흡조차 크게 거칠어지지 않았다. 몸이 달아오르기는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예전의 자신과 비교하자면 정말 말도 안 되게 성장한 것이다.
“….”
물끄러미 제 두 손을 내려다본다. 크게 달라진 것은 보이지 않는다.
더 눈을 돌려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엄청난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진짜 변화는, 진정한 위력은 안에서부터 흘러나왔다.
내부의 변화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변화까지 이끌어야 한다.
카일이 말했던 대로 이제 더 노력하면 이 변화가 확연히 보일 것이다.
그리 된다면 그렇게나 소망하던 카일의 수준에 조금은 더 닿는 게 아닐까.
“재미 좀 봤나 보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황녀가 살짝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는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당한 전사들이 널려있었다.
“그래도 조금은 아쉽지 않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모를 줄 알고? 너, 몸이 이제 막 풀렸잖아. 그런데 싸움은 끝나버렸고.”
“….”
“나도 똑같아. 잔챙이들 상대하느라 아주 진이 다 빠져버렸어. 혹 너무 세게 하면 아무 것도 못 하고 죽어버리는 건 아닐까 너무 긴장을 했다고 할까?”
딱히 그런 노력을 한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안은 반사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으려고 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하는 대로 내뱉다가 걸리면 혼난다는 카일의 경고가 떠올라서였다.
“그러니까 나랑 한 판 할래? 오해는 하지 마. 막 아까 하던 것처럼 죽고 죽이는 그런 싸움은 아니야. 그냥 적당하게, 기껏 달아오른 몸 확 식는 것보다야 천천히 식히는 게 낫잖아?”
“거절하겠습니다.”
“아, 왜! 너도 아쉬우면서!”
그거야 황녀님이랑 카일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이안이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엔 좀 달랐다.
어떤 이유에서든 이미 임자 있는 여자랑 부딪치는 순간 바로 적이 되는 거다.
이안조차도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에 항상 조심하고 있었다.
“카일이 오면 카일이랑 하시죠.”
“걔는 이미 아주 만족스럽게 한바탕 하고 있잖아. 뒤에서 잡것들 처리하고 있는 우리들끼리 알아서 몸 좀 더 풀겠다는 건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있습니다. 저는 카일한테 그만 혼나고 싶어서.”
예전의 그였다면 ‘그러죠.’ 라고 냉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눈치도 좀 늘어서 피해야 할 때를 알고 있다.
카일에게 굴려지면서 정말 사람이 다 된 이안이었다.
*
제국과 동쪽 초원의 부족들 간의 전투가 끝이 났다.
정확히는, 존 나센과의 전투가 끝이 났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만.
“어서 가세요. 괜히 망설이다가는 우리한테 금방 따라잡힌답니다.”
화사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내뱉는 말은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다.
그에 생존한 전사들은 무기고 뭐고 다 내팽겨 치고 죽어라 말을 달렸다.
패배를 치욕으로 여기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겁에 질린 짐승일 뿐이었다.
“어떠셨어요, 어머니?”
기어코 상대를 반으로 접어버린 레아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레아와 붙은 톨가는 목숨은 부지했으니 다행인 편이었다.
“막판에 큰 실수를 했단다. 리어, 레아, 그리고 카일. 너희들 생각을 하고 마지막에 조금 더 힘을 주었는데, 설마 그걸 못 버틸 줄이야. 미안하게 되었어.”
남작 부인과 부딪친 둘은 아무 것도 남기지 못 하고 사라졌다.
존 나센 앞에서 비겁함을 입에 담은 자들의 최후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랑 오라버니 쪽도 끝난 것 같아요. 가볼까요?”
“그러자. 음, 저기지? 가자, 레아. 그리고 여러분. 얼른 돌아가죠. 잘하면 오늘치 루틴도 돌릴 수 있을지 모른답니다.”
그러자 존 나센 사람들이 우효! 하고 함성을 내지른다.
강자들과 원 없이 싸운 것도 즐거운데, 시간이 남아서 오늘 운동을 할 수 있다니.
이 정도면 너무 행복해서 밤에 운동하는 꿈까지 꿀 수준이었다.
가볍게 대지를 박찬 남작 부인과 레아가 건너편에 도달했다.
그 건너편도 다른 이들에겐 말을 내달려 겨우 도착할 거리.
그것을 몇 번의 멀리뛰기로 도달하고야 마는 두 여인들이었다.
“여기도 끝났네요.”
“왔습니까, 부인. 그래, 어떻게 몸 좀 풀었나요?”
존 나센 남작의 물음에 남작 부인이 부끄럽다는 듯 볼을 긁적인다.
“부끄럽게도, 혼자 너무 흥분해서 그만 목숨을 빼앗고 말았어요.”
“아쉽게 되었겠군요. 살려두었다면 나중에 더 강해질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요. 나중에 우리 아이들, 혹은 손자, 손녀들이 갈 수도 있는데. 이런 실수를….”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머리까지 싸매는 남작 부인.
“….”
덕분에 카일 앞에 처박힌 소치르는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어.’ 하는 표정이 되었다.
상황을 보니 각 전선으로 투입되었던 동료들도 전부 당했다.
목숨을 잃었는지, 아니면 자신과 체기처럼 어떻게 살긴 했는지 알 방도가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가한조차도 무참하게 패배했다는 것.
“존 나센 남작.”
고개를 돌려보니 슈렐리츠 대공이 지휘부를 이끌고서 당도했다.
그들 모두가 존 나센이 일으킨 재해에 할 말을 잃고서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일단… 승리를 축하하오.”
“승리. 아, 승리라. 그보다는 굉장히 뿌듯한 전투였습니다, 대공.”
이기고 지는 건 전혀 상관이 없는 존 나센답게, 멋진 전투에 의의를 둔다.
그에 다른 10강들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 가한이라는 자는… 어찌 되었소?”
다른 자들은 몰라도 그 가한의 행방은 확실히 해야 한다.
죽었다면 다행이고, 혹 살았다면 이대로 붙잡아서 제국의 힘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만 흩어진 동쪽의 부족들이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것이다.
“나와 싸운 이를 말하는 모양이군요. 그 자라면, 있었는데 이제 없습니다.”
“…있었는데, 없다니?”
대공의 반문에 존 나센 남작이 제 뒤를 가리킨다.
“…으음.”
땅이 통째로 깎여나갔다. 풀도, 물줄기도, 그 위에 있던 누군가도.
모두가 함께 사이좋게 손을 잡고 이 세상에서 깎여나갔다.
“제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그가 살아있다면 여러모로 불안한 것이 많았을 테지요.”
존 나센 남작의 말에 슈렐리츠 대공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여 내가 그를 살려두었다면 어떻게든 그의 처분을 하려고 했을 게 아닙니까.”
“…그렇소.”
“안타깝게도 존 나센은, 멋진 전투를 펼쳐준 적에게 치욕스러운 최후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어지간하면 살려두지만 죽을 수밖에 없다면 전장에서 죽는 영광을 주는 게 예의지요.”
그 말에 비로소 대공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존 나센이 전투에 집착하면서도, 또 승패에는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이상하게도 상대방의 목숨을 거두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
이상이 과거 북쪽과 전투를 벌이며 제국이 알게 된 그들의 특징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봤을 때 존 나센 남작이 가한을 없앤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살아있다면 무조건적으로 제국에 끌려가서 온갖 고초를 당할 터.
그리 될 바에 차라리 훌륭하게 싸운 적으로서 괜찮은 끝을 내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혹 그를 멋대로 처리한 것에 문제가 있다면, 감당하겠습니다.”
“….”
뭘 감당하겠다는 건데. 라는 말이 대공과 지휘부 이들의 입가에 맴돈다.
그 동쪽의 전사들조차 상처 하나 입히지 못 한 남작을 상대로, 제국이 미쳤다고 발목을 붙잡는다? 그러다가 진짜 제국까지 뭉개지는 수가 있는데?
“아니오. 제국은 남작의 뜻을 존중하겠소. 웅장한 전투를 치렀으니 적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은 당연한 것. 이번 일로 제국이 문제를 제기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오.”
“대공의 이해심에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가한의 처리는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그의 칼들에 대한 것.
“커헉! 컥!”
리어에 의해 사지가 부러진 체기가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을 띠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투지로 불타오르던 이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만이 아니라 잠시 후 끌려온 어치러, 알탄, 톨가, 타우가도 마찬가지였다.
남작 부인의 손에 의해 사라진 게를레와 보르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항복하면, 어찌 됩니까.”
카일의 앞에 처박혀있던 소치르가 입술을 뗀다.
당연히 그의 동료 전사들이 무슨 소리냐고 그를 바라보긴 했다.
하지만 존 나센 사람들이 ‘왜?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 뜻으로 바라보니 바로 입을 다문다.
“으음.”
원래라면 지휘부는 싹 다 처형하는 것이 응당 옳은 일이다.
왕국 연합처럼 몇몇은 친 제국파였던 것도 아니고, 남쪽처럼 먼저 고개를 숙인 것도 아니다.
이들 모두가 전투 끝에 사로잡힌 것이니 그리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처우에 대한 결정은, 남작이 하는 게 어떻겠소.”
대공은 눈치 빠르게 저들의 처우에 대한 결정을 남작에게 맡겼다.
어차피 승리는 제국이 가져갔다. 여기서 더 욕심을 낼 이유는 없다.
눈앞의 이 용들이 의구심을 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을 터.
“…그리 해주신다면, 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결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