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16화 (216/318)

- 동쪽 상황 정리. -

- 초원의 부족들 항복. -

- 제국군 귀환 시작. -

“…하.”

엘가는 제 손에 들린 서신을 확인하곤 기가 막히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혹 잘못 봤나 싶기도 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적힌 내용 그대로, 현재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철군 준비에 들어갔단다.

“어어…?”

안에 적힌 내용이 어이가 없다는 반응은 그녀만의 것이 아니었다.

“저, 엘가 자매님? 그, 못 해도 몇 달은 걸릴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죠. 분명 그랬어요, 성녀님.”

“그런데 이게 어찌 된….”

그에 대한 대답은 옆에서 같이 서신을 본 티샤의 입에서 나왔다.

“얼마 전에 황성이 발칵 뒤집혔다고 들었어요. 갑자기 하늘에서 사람들이 떨어져서.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다시 하늘로 치솟았다는데… 엘가님. 그 사람들이, 그 분들 맞죠?”

티샤의 질문에 엘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 마냥 갑작스레 등장한 이들은 역시나 존 나센 사람들.

심지어 그 사이에 남작과 남작 부인, 그 아들과 딸까지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황제 폐하가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맞이했다고까지 했어.’

가벼운 감기라곤 하지만 황제의 몸은 황제 개인의 것이 아니다.

자칫 제국이 흔들릴 수도 있기에 어떤 가벼운 병이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하물며 나이가 있으니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진데.

그 황제가 벌떡 일어나서는 황성 앞에 나타난 존 나센 남작을 맞이했다.

여기까지 말도 없이 무슨 일이냐고.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겼냐고.

그러자 남작은 이 한 마디로 황제와 곁에 있는 이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단다.

“예. 황제 폐하. 문제가 생겼습니다.”

남작의 그 말을 엘가의 아버지, 리토리오 대공은 이렇게 평가했다.

“제국 찢으러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느낌이었겠지.”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

과거 북쪽과 제국의 전쟁은 서로가 더 많은 피해를 입기 전에 협상으로 끝낸 것이라고.

덕분에 제국은 북쪽의 안정화를, 북쪽은 더는 싸움을 하지 않아서 이득이었다고.

‘아니지. 그 사람들이, 싸움을 거절할 리가 없잖아.’

북쪽은 그냥 오니까 싸워준 거다. 덤비니까 좋아서 맞서준 것이다.

제국 입장에서는 한 번 시작한 전쟁이 무슨 지옥의 아가리보다 클 줄 몰랐겠지.

해서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황제가 나서서 직접 전쟁을 끝냈고 말이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존 나센이 움직였다.

그것도 남작이 직접, 가족들까지 끌고, 거기에 섬뜩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이들까지 데리고서!

‘폐하 입장에선 드디어 대혈투가 벌어지는 건가 싶으셨을 거야.’

다행스럽게도 존 나센의 목적지는 황성도, 제국의 어딘가도 아니었다.

“막내의 서신을 받았습니다. 늦기 전에 동쪽을 가려 합니다. 그 전에, 일단 허락도 없이 움직인 점 사과를 드리고, 허락을 받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닌 것 같아도 과거의 협상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존 나센이었다.

제국을 대우해준다. 이전의 그 치열했던 전투를 벌인 듬직한 자들에 대한 예의로.

하여 황제 앞에서 스스로를 숙이며 허락까지 구하고 있었다.

그 다음 일은 뭐, 당연한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황제는 그 자리에서 바로 친필 명령서를 건넸고 인장까지 찍었다.

그걸 받아든 존 나센 사람들은 다시 하늘 위로 사라졌고.

“아버지께서 그 광경을 보셨는데, 사람이 맞나 싶었다네요.”

엘가가 그리 말하자 성녀도, 그리고 티샤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본인들이 보기에도 그곳 사람들은 도무지 사람 같지가 않았다.

차라리 막 흉악하고 난폭하고, 피에 굶주린 자들이라면 악귀라고 해도 될 텐데.

정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좀 부딪치다 보면 순박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운동해서 기뻐하고, 과부하가 안 느껴진다고 슬퍼하고, 노력하는 자에겐 박수를 치고.

이러니 사람은 확실한데 또 전혀 사람 같지가 않다는 말이 나온다.

그 부분은 아마 수십 년이 지나도 똑같지 않을까 싶다.

“저, 그러면요. 여러분? 동쪽 상황이 끝났다는 건… 카일 형제님이 돌아오신다는 거네요?”

아직까지 잔잔하던 호수에 성녀가 바로 돌멩이를 내던진다.

그 파문에 옆의 두 여자가 흔들리는 거야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죠.”

“그러네요.”

카일이 자리를 비운지 한 달이 채 안 되어 가는 상황.

더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을 했었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물론 카일이 일찍 돌아오는 건 좋은 일이다. 정말 반가운 일이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 되면 다시금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된다는 것.

‘일단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역시나….’

‘황녀님… 이겠지?’

카일과 떨어져있던 셋과는 다르게, 5황녀 율리카는 카일과 함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굳게 약속을 하고 떠난 카일이다.

그를 믿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황녀를 믿지 못 하는 것이지.

셋 모두 보지 않았던가. 대놓고 소유물이 되겠다는 황녀의 모습을.

대체 어떤 황실의 직계가 남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시골 귀족들도 자존심을 챙기는 와중에 하물며 황제의 딸이 말이다!

이러니 긴장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경계를 하는 게 당연하다.

그곳에서 또 무슨 일을 벌이려고 했을지. 혹은, 진짜로 벌였을지 모르니까.

“일단요. 우리들, 잠깐은 연합하는 게 어때요.”

“연합이요?”

“황녀님은 카일이랑 계속 붙어있었잖아요? 그럼에도 또 다시 그러려고 할 테고.”

엘가의 말에 성녀와 티샤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하지만 이렇다 할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 황녀를 어떻게 막으라는 건지.

“방법이 있나요? 엘가님?”

“그, 황녀님을 제가 잘 아는데요, 자매님. 그 분을 밀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요.”

“우리가 황녀님을 밀어내는 건 불가능하죠. 그럴 힘도,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 하지만 한 명은 예외죠. 그 사람은 가능할 걸요?”

성녀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반대로 티샤는 아하, 하고 탄성을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있네요.”

“카일 형제님이요? 그 분이 갑자기 왜 나오는 건가요?”

“우리가 황녀님을 설득하는 건 힘들어도, 카일은 훨씬 쉽다는 거죠.”

거기까지 설명해주자 성녀도 얼추 이해가 갔다는 듯 탄성을 흘린다.

하지만 곧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자신의 의문을 털어놓는다.

“그래도 이유가 없잖아요. 카일 형제님은 정말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괜스레 황녀님을 떨어트려놓을 정도로 나쁜 분이 아니신 걸요.”

“성녀님 말씀대로, 카일 성격이라면 망설일 수 있죠. 하지만 확실한 이유가 있다면 또 다르죠?”

엘가가 손짓으로 성녀와 티샤를 조금 더 가까이 부른다.

“제국에는 법으로는 정해지지 않았어도 항상 꼭 하는 일들이 있어요. 예로 들어서, 한 지역을 점령하면 그 중요도에 따라 황제 폐하가 임명한 자부터 해서, 그 중요도가 높다면 황족을 파견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북쪽의 경우 이미 황제가 직접 나서서 협상을 제안한 적이 있다.

그리고 서쪽의 왕국 연합과 남쪽의 독립 영주들이 고개를 숙였을 때, 황실에서는 바로 직계를 내려 보내어 민심을 수습하고 그들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걸 대외적으로 선포했다.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불안감을 낮춰주고 인정을 받고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불만도 자연스레 사라지고 그로 인해 반란의 불씨를 미리 꺼트릴 수도 있다.

“자. 다들 아시는 대로 동쪽의 부족들도 제국 측에 항복을 했다고 했어요. 동쪽이 비록 정식 국가는 없다고 해도 그 힘은 대단했다고 하죠. 이렇게 되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황실의 직계 분이 그곳을 잠시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려고 할 거예요.”

“하지만 동쪽은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위험할 텐데요?”

“바로 그거예요. 보통 분들에게는 정말 위험하죠. 하지만 한 분은 아니잖아요?”

거기까지 듣자 성녀도, 티샤도, 엘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이제 막 제국의 영향권 아래 놓인 동쪽으로 5황녀를 보낼 생각이었다.

물론 자신이 나서서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까 카일을 움직일 계획이었다.

“…그, 황녀님께는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닐까요?”

역시나 성녀가 나서서 슬그머니 반대 의견을 내놓는다.

동쪽이 뭐 조그마한 영지도 아니고, 그 넓이로는 제국과 맞먹을 수준이다.

그곳 전부를 둘러보는 건 아니라고 해도 확실한 건 빨리 끝날 일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 어찌 되었든 위험한 부분도 있으니 성녀 입장에선 상당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엘가는 다시금 그녀의 마음을 살살 흔들었다.

“어차피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황제 폐하께서,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 그리 결정하실 거예요. 항상 최선의 선택들을 하시는 분들이니까. 오히려 우리는 은근히 황녀 저하를 돕는 그림이 될 수도 있는 거랍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를 잘 못 하겠어요, 엘가 자매님.”

“카일을 통해서 황녀 저하께 바람을 넣고, 황녀 저하가 자원하게 된다면 자연스레 그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모두가 확신을 가지게 되겠죠. 조금은 제멋대로의 기질을 지닌 황녀 저하를 카일이 통제할 수 있다면, 다들 둘의 미래를 환영하지 않을까요? 황녀 저하도 그 부분을 얼추 짐작하고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요.”

어차피 황녀를 카일에게서 완전히 떼어 놓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여지를 남겨주고 잠깐은 떨어트리는 것에서 만족하자.

어차피 결국에는 어느 누구도 손해를 보지 않는 싸움 아닌가.

리토리오 대공가의 공녀이자, 차기 대공답게 철저히 손익을 따진 엘가의 계획이었다.

*

“어? 뭐에요. 다들 마중 나온 거예요?”

“안녕, 얘들아!”

그리고 세 여인들은, 카일에게 안겨있는 황녀를 보고 결심이 섰다.

역시 저 여자는 한동안 안 보이는 곳으로 보내버려야 한다고.

물론 황녀 입장에선 조금은 억울할 수도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황녀님.”

“끝난 거야? 이제 내려줘. 슬슬 멀미날 것 같아.”

정확히는 카일에게 안긴 게 아니라 그냥 둘러 메인 채 짐 취급 받았으니까.

그냥 유산소 하기에는 좀 그렇다고 황녀를 짊어지고 내달린 카일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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