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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17화 (217/318)

당연한 말이지만, 존 나센 측은 개선식이나 공을 치하하는 자리는 원하지 않았다.

할 일 다 했으니 본인들은 이대로 돌아가서 그동안 잠깐 쉰 루틴을 돌리겠다나.

그들의 강력한 뜻에 지휘부도 결국 결정을 황실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존 나센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제국의 핵심 세력들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로 존 나센에 대해 잘 모르던 이들은, 그들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아니, 강하다는 말조차도 아득하게 초월해버린 자들.

그럼에도 그 강함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갈고 닦는 데에만 쓰는 자들.

왜 과거 황제가, 제국이 북쪽과의 전투를 중단했는가.

단순히 쌍방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평화의 모색인 줄 알았던 그것이.

실은 황제의 혜안이자 최고의 선택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도 황제 폐하께 인사는 하고 가는 게 어떻겠소, 남작.”

슈렐리츠 대공의 제안에 존 나센 남작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쪽을 배려해준 황제를 생각하면 그러는 게 맞다고 판단한 모양.

물론 전부가 갈 필요는 없으니 존 나센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귀한토록 했다.

제국 쪽도 전투 병력의 반은 다시금 본국으로 귀환을 시작했다.

나머지는 동쪽에서 좀 더 머물며 상황을 지켜볼 것이다.

적들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모조리 패주하긴 했지만 만일을 대비해야 한다.

또 다른 누군가가 나서서 최후의 저항을 외치면 상당히 성가실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물론 그 가능성에 다른 누구도 아닌, 포로로 붙잡힌 이들이 되겠냐는 반응을 보였다.

소치르는 슈렐리츠 대공의 그 가능성에 황당하다는 눈빛까지 띠었다.

“엎치락뒤치락 전투를 벌인 것도 아니요. 승리에 가까워졌다가 역전을 당한 것도 아니요. 그냥 짓뭉개졌소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미친놈이 다시 싸우자는 소리를 할지 궁금하군요.”

그 말에 같이 붙잡힌 이들 역시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제국군이 큰 피해를 입었느냐? 아니다. 혹 배신자가 있었느냐? 그것도 아니다.

동쪽의 전사들은 최선을 다했다.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쏟았다.

한데 그 모든 걸, 하늘에서 나타난 이들은 하하호호 웃으면서 깨부쉈다.

가한이라 스스로를 칭하던 자는 먼지 한 점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의 두 칼도 이 세상에서 그냥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렸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기억 속에서 영원히 허우적거릴 것이다.

그런데, 그걸 직접 보고서도 싸우자는 의견을 제시하는 놈이 나온다?

장담하는데 부족들이 나서서 그 미친놈의 머리를 잘라다 바칠 것이다.

이후 조금 더 시일이 지나고 동쪽이 잠잠한 것으로 보이자 제국 측은 포로들을 석방했다.

일개 전사들은 물론이고, 소치르와 같은 강력한 실력자들까지 전부 다 말이다.

“정말로 보내주는 것이오?”

“그러기로 했으니 그래야겠지.”

대공이 저 뒤에서 한창 벤치 프레스를 하고 있는 존 나센 남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약속을 해놓고 안 지키면 어찌 될 지는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소치르 텡겐 카마라그. 그대는 우리 제국에게 먼저 항복이라는 제안을 했다. 그 말이 나중에라도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군.”

“안 바뀔 거예요, 대공 각하. 바뀌면 또 저 만나는 거니까요.”

슬쩍 옆으로 다가온 카일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어째 ‘제발 좀 어겨줘.’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모습은, 소치르만의 착각일까.

“아, 그 다친 분들은 잘 치료해요. 보니까 최대한 목숨에 지장은 없게 다룬 것 같던데.”

“….”

저 말을 들으니 더 무섭다. 목숨에 지장은 없도록 해주었다고?

생과 사가 오가는 전투에서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아닌가.

‘용.’

새삼 왜 선조들이 그런 전승을 남겼는지 이해가 가는 소치르였다.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킨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상태가 영 좋지 못 한 이들을 제외한다면, 남은 건 네르구이 부족의 톨가와 자르갈링의 알탄.

끄덕―

소치르가 고개를 신호를 주자 톨가와 알탄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그 셋이 슬그머니 걸음을 옮겨 슈렐리츠 대공 앞으로 다가갔다.

“대공.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이가 있습니다.”

“누구인지는 알 것 같구려. 그래, 어차피 그대들을 보낼 채비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으니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고 오시오.”

대공은 그렇게 답한 후 카일에게로 세 전사를 내주었다.

이 셋이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상대라 함은, 당연히 존 나센 남작일 터.

“따라와요. 아, 혹시나 뭐 가한의 복수이니 암살 시도이니 하지 말고요.”

“하라고 해도 안 한다. 미쳤다고 그런 짓을.”

실력이니 강함이니 그런 걸 다 떠나서, 칼을 쑤셔 박아도 뚫을 수는 있을지 의문이다.

가한조차도 피 한 방울 내지 못 한 자를 무슨 수로 어떻게 하라고?

그리 생각하는 사이 카일과 세 전사는 남작 앞에 다다랐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그는 벤치에 집중할 뿐이다.

끼기긱, 쿠궁-.

끼기긱! 쿠구궁!-

멀리서 봐도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는데, 가까이 다가서니 더 무섭다.

정녕 저것이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란 말인가.

한 번 들려고 했다가 근육이 끊어지고 뼈가 부러질 것 같은데?

“….”

카일은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루틴 중이지 않은가.

다 돌리면 알아서 바벨 걸어두고 신경을 써줄 것이다.

그 전까지는 부르는 것도, 눈치를 주는 것도 전부 지양한다.

“이제 가는 건가.”

마침내 바벨을 걸어둔 남작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입술을 뗀다.

남작의 물음에 소치르와 두 전사는 바로 무릎을 꿇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고개를 끄덕거린 남작은 덕담을 슬쩍 해주었다.

“가서 더 강해지게. 그래서 강해졌다면 또 강해지게. 강함에는 끝이 없는 법.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강해야 하고,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더 강해야 하는 것이지.”

적이든 아군이든 상관없다. 멋진 전투를 준 자들은 모두가 친구다.

그들이 노력의 가치를 해하지 않는 이상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용이시여.”

“또 그 말이군. 나와 싸우던 이에게도 말했네. 나는, 우리는 그런 게 아니라고.”

“무엇이든 좋습니다. 우리들은 그 말씀을 남긴 선조들의 뜻을 이어나가는 겁니다. 초원의 늑대들은 마땅히 용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그대들의 선조가 왜 그런 말을 남겼는지 의문이군. 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그러자 소치르는 잠깐 망설이다가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제, 우리들은 어찌 해야 합니까?”

“그걸 왜 내게 묻는가?”

“용이 마침내 내려왔습니다. 늑대들은 마땅히 그 다음을 기다립니다. 한데 다시 떠난다니, 이리 된다면 용을 마주한 우리 초원의 늑대 모두는 혼란을….”

다음 말은 남작이 손을 내젓는 것으로 막아버렸다.

잠깐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전사들을 바라보던 남작은 카일을 불렀다.

“카일.”

“예, 아버지.”

“가서 봉 좀 가져와라. 원판도 끼워서.”

“얼마나 끼우면 될까요?”

“음. 딱 네가 기합 넣고 들 수 있는 만큼으로.”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곧장 어딘가로 달려간다.

그리고 잠시 후.

콰앙-.

세 전사 앞에 바벨 하나가 땅을 진동시키며 내려앉는다.

“….”

“….”

보고만 있어도 절로 소름이 다 돋는다.

이게 무엇인가. 무기인가? 자신들을 때려 죽이려는 건가?

“그거, 들어보게.”

세 전사는 번갈아가면서 봉을 붙잡고 있는 힘을 다 했다.

일단 모두가 겨우 땅바닥에서 들어올리기는 했는데,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용을 써도 한계가 명확해 보였다.

“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낑낑거리던 전사들 사이로 나아가 봉을 붙잡았다.

“흡.”

짧은 기합과 함께 바벨이 위로 솟구친다.

남작은 그대로 전사들에게 몇 가지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승모근 위에 바벨을 올려두고. 지금과 같은 자세가 스쿼트.”

“스, 스쿼트.”

“다음으로 지금 이것이 데드 리프트.”

하나, 하나의 동작이 보고만 있어도 살 떨리는 것들이다.

그걸 남작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쿵!!-

단번에 붕 떠올랐던 바벨이 웅혼한 소리와 함께 대지에 처박힌다.

마지막으로 원래 있던 벤치 위에 누운 남작은 방금 전 들었던 것보다 배는 더 무거워 보이는 것을 들어올렸다. 전혀 힘든 기색 없이.

“마지막으로, 벤치 프레스.”

다시 벤치에서 일어난 남작이, 바짝 굳어버린 세 전사들 앞으로 다가온다.

“자네들은 이 세 운동을, 능히 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남작은 그들 앞으로 카일이 가져온 바벨을, 한 손으로 쥐고서 내밀었다.

“이것으로 말이지.”

“그, 이게 가능한….”

“가능하다. 가능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그대들은 다시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할 말 다 했다는 듯 손을 놓는 남작.

덕분에 세 전사가 거의 동시에 달라붙어 겨우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다.

“그대들이 말했지. 선조의 전승에 따라, 늑대로서 용을 기다린다고.”

“그렇습니다.”

“우리들더러 용이라고.”

“예. 틀림없습니다.”

소치르의 말에 남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대들의 선조가 말한 용이, 우리일 수도 있겠지. 한데 말이야. 그 전승에서, 지금의 그대들이 늑대라는 건, 누가 보장하는 것인가?”

“…예?”

“동쪽에서 산다 하여 전부 늑대인 것인가? 들개도 있고, 여우도 있고, 그럴 텐데.”

낮게 가라앉은 눈빛 속에 의문이 짙게 깔려있다.

남작은 전사들이 들고 있는 바벨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증명해라. 그대들이 정말 늑대인지. 그것으로서, 우리들에게 증명해라.”

그 말을 끝으로, 남작은 전사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카일.”

“예, 아버지!”

“저들에게 바른 자세를 가르쳐주도록 해라. 허리라도 다치면 아쉽지 않겠느냐.”

어쩌면 나중에 또 한 번의 유희거리를 줄 자들일 수도 있는데.

존 나센 남작의 그 마지막 말은, 다행히도 입 바깥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동쪽 부족들의 전승에 용께서 봉을 내리시니, 라는 구절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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