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19화 (219/318)

티샤, 성녀, 그리고 엘가까지. 카일은 모두에게 약속을 지켰다.

모두가 히히! 혹은 헤헤! 하고 웃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와중에 엘가는 어떻게든 품위를 지키겠다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말이다.

“나는? 야, 카일. 진짜 나는 안 해줄 거야?”

와중에 혼자 입맞춤을 못 받은 황녀가 슬슬 진심으로 토라지려고 한다.

당연히 장난인 줄 알았는데 정말 안 해주겠다니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거짓말쟁이에겐 해줄 키스 따위 없습니다.”

“거짓말. 너 아까 내가 부상 당한 거 말했다고 이러는 거지?”

“절대 아닙니다.”

“절대 맞잖아!”

이래서 눈치 빠른 여자는 싫다니까? 카일이 킥킥, 웃음을 흘린다.

그러자 다른 여인들도 따라서 미소를 짓는다.

오직 황녀만이 우우우! 하고 잔뜩 볼을 부풀리고 있을 뿐.

이쯤이면 장난은 충분하다. 저러다가 황녀가 진짜 토라지면 곤란하다.

여러 가지로 도와준 것도 있고 결국 본인을 생각하는 건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

해서 카일은 장난기를 거두고 황녀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입술 제외. 볼, 이마. 어디에다가 해드려요. 아, 손등도 허락해드립니다.”

“거기 말고. 난 다른 곳에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황녀의 대답에 카일의 눈동자가 가늘게 찢어진다.

괜한 헛소리 하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겠다는 무언의 협박.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알면서 물어보는 거예요, 아니면 몰라서 물어보는 거예요?”

“몰라서 묻는 거지, 당연히.”

그 대답에 카일은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이후 엘가가 먼저 나서서 입술을 뗀다.

“카일을 곤란하게 하는, 이상한 곳 금지. 막, 여기라던가.”

엘가가 가리킨 곳은 자신의 가슴께 부근.

그러자 성녀의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황녀를 보고 ‘그러실 생각이셨어요?!’ 라고 묻는다.

“으응?”

한데 황녀는 엘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제 가슴께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다시 엘가의 가슴께를 보더니 별안간 킥, 하고 웃는다.

‘어.’

그 이유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다름 아닌 티샤였다.

슬쩍 눈치를 보니 성녀는 물론이고 엘가도 그 이유조차 모르는 눈치다.

부디 황녀가 그냥 웃는 것만으로 끝내주었으면 한다.

엘가 성격 상 카일 앞에서 ‘그 비교’를 당한다면 무조건….

“저기, 공녀? 그건 경우가 좀 아닌 것 같아.”

“네? 무슨 말씀이시죠, 황녀 저하?”

“너랑 나랑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네 건 작아서 카일이 이상하다고 여길 수 있어도, 내 거는 달라서 오히려 카일이 좋아할 수도 있잖아?”

아이고. 티샤는 큰일이라는 듯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엘가는 이해를 못 했다는 듯 두 눈을 깜빡거리다가 곧….

“하아?”

라고 매우 기가 막히다는 듯 장탄식을 내뱉었다.

“황녀 저하? 지금 그게 무슨 의도로 하신 말씀일까요?”

“몰라서 묻는 거야? 작고 볼품없는 거에 하는 거랑, 크고 푹신한 거에 하는 거랑.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말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건 카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지. 갑자기 분위기가 엄청 싸늘해지는데? 이걸 노린 게 아니었는데?

“크게 차이 안 나는 것 같은데요. 황녀 저하.”

입은 웃고는 있지만 눈매는 전혀 웃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엘가가 그렇게 답하자 황녀가 그녀를 따라 웃더니 앞으로 슬쩍 다가온다.

두 여인이 서로 마주 보고 선다. 서로의 가슴이, 닿을 듯 말 듯 하다.

“차이가, 나는 것 같은데?”

“아닌데요?”

“아. 혹시 본인 거에 자신이 없어서 거기에는 피하는 걸, 남한테도 똑같이 적용하는 거야?”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말려야 할 것 같은데. 저렇게 번지면 진화鎭火가 불가능해질 것 같은데?

카일이 슬그머니 나서려고 했으나 그보다 두 여자가 훨씬 더 빨랐다.

“카일.”

“카일?! 말해 봐요. 정말로 차이가 나요?”

아니, 잠깐만. 왜 갑자기 이쪽으로 화살이 돌아오는데요.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하던 결국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던가.

“저기, 황녀님. 그리고 엘가님?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엘가님은 하던 말이나 마저 하시고, 황녀님은 그냥 빨리 어디 해드리면 될지 결정을….”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카일.”

“그렇다고 하잖아. 자, 카일. 네가 말해봐. 이게 차이가 안 나? 응?”

그러니까 도대체 왜 갑자기 의식의 흐름이 가슴으로 간 거냐고요.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구기며 어떻게 이 상황을 타개할까 열심히 고민해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만큼은 카일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애당초 무슨 답을 하던 결국 문제가 생기는 법이니까.

지금 상황은 세상 그 어떤 현자가 와도 ‘아, 이건 좀.’ 라고 고개를 내저을 거다.

‘…나도 모르겠다.’

미안한 일이지만, 폭탄은 원래 돌려야 제 맛이다.

“저기, 그런 건 같은 여자들이 더 잘 알지 않을까 싶네요.”

“으음?”

“카, 카일?!”

솔직히 말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자각은 있다.

하지만 이 이상 카일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발 통해라, 통해서 나한테 온 폭탄 좀 옮겨줘!

라고 카일이 온 힘을 다해서 비는 찰나.

“…좋아요.”

알게 모르게 이번 일에 굉장히 진심으로 보이던 엘가가 덥석 미끼를 물었다.

직후 황녀도 티샤를 바라보면서 ‘좋아. 그러면 네가 대답해봐!’ 라고 하고 있고.

“티샤? 당신이 보기엔 어떻죠?”

“저, 저요?”

“그래, 너. 보니까 너도 꽤 크네. 그러니까 더 잘 알지 않겠어? 나랑, 공녀랑 말이야.”

이게 갑자기 무슨 날벼락이야?! 티샤의 속내는 오직 그것 뿐이었다.

한쪽은 제국에 단 셋이 전부인 ‘대공’ 이 될 공녀다.

다른 한쪽은, 비록 황제는 될 수 없다고 해도 이미 제국 10강인 황녀다.

그에 반해서 자신은 아직 평범한 아카데미 학생에 불과하지 않은가.

‘대체 누구 편을 들라고요?!’

티샤는 처음으로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카일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곧 그가 얼마나 난처했으면 이런 결정을 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 카일을 위해서, 이번 한 번은 봐주도록 하자.

그리고 그 대신 지금의 이 곤란함을, 멋지게 한 번 돌파해보자!

‘…라고 일단 생각은 했는데… 대답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황녀? 공녀? 황녀? 공녀? 흐앙! 도대체 누구를 선택해야 해!

티샤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리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들 그만!!”

투닥거리던 황녀와 엘가도, 고민하던 티샤도, 그리고 눈치를 살피던 카일도.

갑작스레 들려온 성녀의 예상치 못 한 일갈에 놀라선 그녀를 바라본다.

“그만하세요.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싸움인가요! 그만들 하세요. 이 이상 말도 안 되는 논제로 그러신다면 좌시하고 있지 않을 겁니다!!”

평소의 성녀와는 전혀 다른, 굉장히 엄하고 또 차가운 목소리였다.

덕분에 카일은 물론이고 티샤, 엘가까지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성녀님?”

다만 황녀는, 그들과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성녀님은 가슴 작아서 그러는 거 아니지?”

“….”

카일은 보았다. 티샤도 보았다. 그리고 엘가도 보았다.

그 순하던 성녀의 이마에 한 줄기 힘줄이 돋아나는 것을.

*

결국 황녀에 대한 포상은 다음 기회로 넘어갔다.

정확히는 언제, 어느 곳에 해줄지 다음에 다시 정하자는 것.

원래 빠르게 정해서 바로 전부 정리하려는 게 카일의 계획이었다.

그 날 바로 바로 정산을 하지 않으면 점점 쌓여서 눈덩이가 되는 법.

때문에 네 명 모두 정리하고 다시는 언급이 안 되도록 하려고 했던 건데….

‘조금만 더 있었다면 처음으로 성녀님이 폭력 쓰는 모습을 봤을 지도 몰라.’

지금도 봐라. 옆에서 씩씩거리고 있는 성녀를.

그나마 본인이 같이 있으니 겨우 참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없었다면… 아마 처음으로 욕까지 하지 않았을까?

‘아, 그건 좀 너무 나갔나.’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성녀님이 욕설을 내뱉을 수가 있나.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튼, 이리 거칠게 흥분한 성녀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신기하기도 했고, 걱정이 되기도 했으며 또 아주 살짝은….

‘성녀님. 가슴 작은 거에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으셨군.’

앞으로 가슴에 대한 그 어떤 연관 검색어도 금지해야 할 것 같다.

신기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러 본 볼 정도로 반가운 일은 절대 아니다.

“성녀님?”

“카일 형제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황녀님처럼, 제 가슴이 작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 말에 카일은 반사적으로 성녀의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재빠르게 시선을 올려, 다른 세 여자를 떠올려보았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성녀님. 중요한 건 사람의 전체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마음 아닐까요? 황녀님이 그냥 성녀님과 너무 친해서, 장난을 치신 거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리 갑작스럽게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하아, 한숨을 내뱉은 성녀가 곧 심호흡을 한다.

마구 날뛰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죄송해요, 카일 형제님. 많이 놀라셨죠?”

“아뇨. 이해합니다. 황녀님이 너무 짓궂게 말씀하신 거죠. 나쁜 뜻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마도 성녀님과 친해서, 그냥 장난으로 그런 말을 한 게 아닐까요?”

카일의 말에 성녀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래부터 좀 그런 분이긴 했어요. 가끔 짓궂은 면이 있으신 분. 그게 또 악의가 있다면 모르겠는데… 하아. 제가 그리도 주의해서 말을 하라고 그리 일러드렸건만.”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성녀.

그래서 그랬을까. 성녀는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조금 전 자신이 카일에게 했던 질문. 자신의 가슴이 정말 작냐는 그 물음.

거기에 카일은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지나쳤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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