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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27화 (227/318)

잠시 휴식을 가졌던 황제가 다시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황태자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잠시 휴식에 들어갔다.

어차피 차기 황제는 황태자로 정해진 지 오래다.

긴장할 이유도 없고, 그런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도 없다.

그런 이유로 황태자도 연회 대신 자신의 처소에서 휴식을 택했다.

따라서 황제 곁에 머물 수 있는 이는 슈렐리츠 대공과 바이엔 대공.

그리고 연회에 처음으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한 황녀와.

리토리오 대공을 대신하여, 리토리오의 후계자로서 인사를 하기 위해 찾아온 엘가.

정말 오랜만에 공식 활동에 나선 교단의 성녀까지가 맞는 인원이었다.

“음식은 어떠한가, 카일?”

하지만 오늘은, 그들 사이에 또 다른 사람이 추가되었다.

“존 나센 남작은 물론이고 자네 형과 누나도 여러 번 봤었지. 아아, 이번에 또 봤었군. 해서 존 나센에 대해서는 나도 제법 잘 알고 있다네.”

술은 입에도 안 댄다. 술을 도대체 왜 마시느냐.

술 자체도 안 좋은데 그거에 같이 먹는 안주들도 문제다.

연회에는 너무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들만 가득하다.

그것들이 설령 혀에는 좋을지 몰라도 몸에는 최악이다.

원래 퍽퍽하고, 거칠고, 아무 맛도 없는 게 몸에 좋은 법이다.

황제는 그 부분들을 잊지 않고 있다가 연회 준비에 바로 써먹었다.

이를테면, 지금 막 나온 요리들은 모두 카일을 위한 것들이었다.

최대한 기름에 튀기거나 굽지 않도록, 자극적인 맛을 내지 않도록.

맛보다는 건강에 집중한 메뉴들이 속속 등장했다.

“주방장들이 고생을 좀 했어. 다만, 많이 준비하지는 못 했네.”

이게 식사 자리였다면 훨씬 더 많이 준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연회에 쓰일 것들이 전부다. 원래는 술과 함께 즐기는 것들이다.

해서 황제는 혹 준비한 것들이 모자라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괜찮습니다. 황제 폐하. 오히려 이런 마음을 베푸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카일의 대답에 황제는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어쩜 이미 말하는 것도 마음에 쏙 드는지. 완벽하다. 정말로 완벽하다.

존 나센과의 평화를 깨트리지 않으면서 공존을 도모할 수 있다.

이 청년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훌륭한 다리 역할을 해줄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황송한 일이나, 다음부터는 이리 마음 써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음?”

“모두를 위한 연회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이런 식으로 따로 준비를 하게 되면 준비하는 이들도, 바라보는 분들도 이상하게 생각할 터.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카일의 말에 황제가 허, 하고 다시 한 번 탄성을 흘린다.

그리고는 뒤에서 성녀와 잡담을 나누고 있는 제 딸을 바라보았다.

‘하도 쌈박질만 하고 다녀서 남자 보는 눈이 없을 줄 알았더니.’

설마,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윗감을 낚아 채려고 기다린 건가 싶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이 자리에서 혼담 제의를 하고 싶었다.

황제가 직접 나서서 말하는 혼담은, 누구도 거절할 수가 없다.

설령 대공이라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 라고 하는 게 전부다.

문제는 카일 너머에 서있는 사람들이, ‘사람’ 이 아니라는 거다.

“가끔 보면 말일세, 카일.”

“예, 폐하.”

“자네는 존 나센의 사람 같지가 않아.”

황제의 말에 카일이 순간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물론 정말 작게,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런 것에 불과하지만.

“혹 나쁜 뜻으로 오해하지 말게. 자네가 이상하다는 것도, 존 나센이 이상하다는 것도 아니야.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그래. 자네에게는 묘한 무언가 있어.”

“그것 때문에 부모님도, 형님과 누님도 저를 항상 아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어이가 없다는 듯 껄껄 웃음을 터트린다.

아이 취급? 누구. 지금 제 앞에 서있는 이 청년을?

세상 어떤 아이가 10강과 대등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싸운단 말인가.

그런 아이가 하나 더 있다면 그야말로 세상이 경악할 것….

‘아아. 그런 아이들이 북쪽에는 더 많겠구나.’

새삼 자신이 어떤 현명한 결정을 내렸는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여러 정복 사업과 제국 확장, 내부를 공고히 한 여러 업적들보다.

북쪽과의 전투를 마무리하고 관계를 개선한 게 훨씬 더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저, 그런데 황제 폐하. 무례함을 무릅쓰고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허허허. 무례한 질문이라면 안 하는 게 맞지 않겠는가?”

물론 재빠르게 농담이라고 덧붙인 황제가 다음 말을 기다린다.

“얼마 전 황태자 전하에게서 들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으셨다고.”

“그걸 걱정한 것인가? 별 일 아니네. 그냥 감기가 좀 세게 들었을 뿐이야.”

“감기도 병이고, 그 병을 치르셨다면 결국 옥체가 허해지신 게 아닙니까.”

거기까지 들은 황제는 으응? 하고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다.

이미 말한 대로, 존 나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황제다.

그 존 나센의 직계인 카일이 갑자기 ‘몸이 허해졌다.’ 라는 말을 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다음은 무슨 말이 나올지, 황제는 알고 있었다.

“…아니네. 그건 아니야. 카일.”

“저는 아직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나도 나름 관리를 하고 있네. 이번 일은 그저 나이가 있어서 그런 것이야. 그러니까 존 나센의 단련법을 전수하고 싶다는, 그런 말은 제발 하지 말게.”

실은 과거, 존 나센이 막 제국에 합류했을 때 그런 일을 했던 적이 있다.

북쪽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황제부터 단련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던 것.

나름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한 적도 있으니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에게 제국의 단련법은 그냥 ‘따위’ 일 뿐이었다.

검을 들고 전장을 도는 기사들의 단련법마저 그렇게 평했을 정도인데.

하물며 황좌에 앉아 정치를 해야 할 황제의 단련을 본 이들이 무슨 말을 했겠는가.

‘당장 본인들이 단련법을 전수해주겠다고 성화들을 냈다. 그리고 거기에 멋모르고 넘어가서 거의 한 달 가까이 제대로 걷지도 못 했었지.’

아직 팔팔하던 당시에도 못 견디고 온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런데, 이제는 온몸이 삐걱거리는 와중에 그 단련을 다시 하라고?

“황제 폐하의 옥체가, 곧 이 제국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듣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듣기 좋던 카일의 말이 무섭게 들리기 시작했다.

당신 몸 중요한 거 나도 알고, 제국도 알고, 당신 스스로도 잘 알지 않느냐.

연회 자리에 나를 불렀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받아가야겠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감기에 걸려 골골거렸다는 자에게 내리는 단련이다!

라는 상상이 황제의 머릿속에 희미하게나마 그려졌다.

‘이건 아니다.’

그래. 이건 정말 아니다. 본인 나이가 있는데, 존 나센의 단련법!?

“아아! 그러고 보니 이야기는 들었네. 슈렐리츠 대공이 자네에게서 운동을 배우고 있다고.”

역시 황제는 황제였다.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다른 이야기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똑같이 단련에 대한 것이 아닌가.

다행히도 슈렐리츠 대공은 그 말을 듣고 황제 곁으로 다가왔다.

“폐하. 신을 찾으셨습니까?”

“그래. 그대가 요즘 다시 단련을 하고 있다고 들었네.”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요즘 너무 앉아만 있다 보니 몸이 굳은 것 같더군요.”

“그렇지. 사람이 앉아서만 생활하다보면 몸이 망가진다고 하지. 그래서 나도 몸을 좀 움직일 생각인데, 자네가 받고 있다는 그 단련법이 내게는 어울릴 것 같은가?”

황제의 질문에 슈렐리츠 대공이 잠깐의 고민 후 답하려는 순간.

“….”

도움! 을 요청하는 황제의 눈빛이 그대로 대공에게 들어간다.

그걸 용케 알아차린 그는 크흠,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열었다.

“…신이 보기엔, 각자에게 들어맞는 단련법이 있을 것 같다고 사료됩니다.”

“호오.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 폐하. 외람된 말이오나 신에게는 맞는 단련법이 폐하께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과거 10강이었던 자네와는 맞지 않을 수 있어. 아니, 맞지 않을 게 확실해.”

그러자 카일이 슬그머니 황제를 쳐다본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반칙 아니냐는 무언의 질문.

하지만 황제 입장에선 어쩔 수가 없었다.

카일이 무척 흡족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단 본인은 살아야 한다.

장담하는데 존 나센 식 단련법에 들어갔다간 매일 졸도할 것이다.

“대공. 실은 여기 카일이 내게도 단련에 대해 알려주겠다고 하던데.”

“으음…. 소신의 판단으로는 무리일 거라고 사료됩니다.”

아주 그냥 둘이 죽이 척척 잘 맞는구나.

그렇게 운동하기 싫은 겁니까! 슈렐리츠 대공 각하! 이러시면 안 되죠!

카일이 눈빛으로 대공을 향해 항의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국에 충성하고, 황제에게 충성하는 것이 바로 제국의 귀족이다.

그리고 지금 황제가 어떤 대답을 아주 간절히 바라고 있지 않은가.

대공 입장에선 카일에겐 미안하지만 황제의 뜻을 따라야만 했다.

‘어쩔 수 없지. 싫다는 사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으니.’

한 발자국 물러나는 카일. 그러나 절대 포기한 건 아니다.

저번에도 결심했다. 내 주변 사람들 중에, 몸이 허한 건 절대 안 넘어갈 거라고.

황제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은 몸 건강히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황녀님께 부탁해서 다시 해봐야지.’

첫 번째 목표는 황궁 내에 거대한 헬스장 건설이다.

제국의 심장부에 헬스장이라니.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심지어 명분도 적절해.’

황실 분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다.

존 나센이 제국과 더 친해지고 싶어서 이러는 거다.

이러면 누가 ‘아! 안 짓는다고!’ 라고 할 수 있을까.

거기에 가족들도 이 소식들 들으면 박수를 치며 운동 기구를 보내줄 거다.

제국이 드디어 운동의 소중함을 깨닫고 모범을 보이는 것이냐고.

‘일단 이 부분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으로.’

헛기침을 한 카일은 계획했던 대로 행동했다.

“저, 폐하. 허면 다른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오! 그래. 운동만 아니면 무엇이든 다 좋지! 무엇인가, 카일?”

심장 단단히 붙잡으셔야 할 텐데요.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카일은 냅다 무릎을 꿇었다.

“진실을 알고도 숨긴 불충한 저를, 벌하여 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그 순간, 흥겹던 분위기의 연회장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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