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에요.”
카일이 몰고 왔던 폭풍이 다시금 잦아든 후.
엘가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잔을 기울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술은 아니다. 그랬다간 카일이 한 소리 할 테니.
연회 자리에서 술은 모두가 다 마시지만 엘가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티샤?”
“솔직히 말하자면 아까 정말 크게 놀랐어요.”
티샤 또한 엘가와 별반 다르지 않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데, 설마 그런 식으로 나올 줄은.”
“덕분에 일이 잘 풀려서 넬에게도 좋은 일이 되었지만요.”
넬은 성별을 속이고 아카데미에 입학한 죄를 물게 되었다.
그 죗값은, 겨울 방학에 황실 기사단에서 잠시 수습기사로 활동하는 것.
황제는 방학 동안에 쉬지도 못 하고 고생할 거라며 벌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심지어 당사자인 넬도 그걸 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황실 기사단의 수습기사? 이건 엄청난 상이라고 보는 게 맞다.
“엘가님이 보시기엔, 카일이 잘 버텼다고 상이라도 준 것 같죠?”
“티샤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아마 카일이 거기까지 노리고서 조금 전의 그런 행동을 했을 수도 있다.
공을 세웠지만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그건 존 나센도 마찬가지다.
대신 카일이, 존 나센이 가르친 이를 용서해주기를 바란다.
그 뜻을 황제에게 전달했고 황제는 흔쾌히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한 마디 말도 없었을 수가 있지.”
엘가가 살짝 뾰로통한 얼굴을 하곤 그렇게 중얼거린다.
카일에게도 서운하고, 같이 고생했던 넬에게도 서운하다.
분명 먼저 알릴 기회가 있었을 텐데 말해주지 않은 게 아닌가.
자신에게 말해주었다면 어떤 방향으로든 도움을 줄 수 있었는데.
“카일이 엘가님께 실례되는 행동을 했네요.”
“그러니까요. 나중에 살짝 토라진 티라도 내볼까 고민 중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엘가는 잠깐 말을 멈추고 티샤를 쳐다보았다.
어째 저렇게 말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묘한 느낌을 주고 있다.
“티샤는, 알고 있었어요?”
그러자 티샤가 살짝 난처한 미소를 짓는다.
“네. 실은 알고 있었어요. 정확히는 제가 얼추 눈치를 챘고, 카일이 말해준 것이지만요.”
“그런데 나한테도 말을 안 해준 거예요?”
“죄송해요. 하지만 카일이 비밀로 지켜달라고 부탁을 해서.”
순간 엘가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말을 안 해준 티샤나, 비밀로 하라고 한 카일에게 화가 난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래도 나름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본인조차도 알아차리지 못 한 걸 티샤가 알아차렸다는 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사실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엘가는 내심 티샤를 경계하고 있었다.
황녀, 그리고 성녀는 굉장한 난적이다. 어떻게 이겨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그러나 그 둘에게는 분명한 특이점이 있었다. 그걸 어떻게든 돌파할 자신이 있었다.
무엇보다 황녀, 그리고 성녀 모두 자신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를 지녔다.
그 차이점으로도 충분히 한 지분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 엘가의 생각.
‘그에 반해서, 티샤와 나는 둘이 굉장히 비슷한 점이 많아.’
일단 밀어붙이는 황녀와 일단 끌어안고 보는 성녀와는 다르게.
자신도, 그리고 티샤도 일단 눈치를 보며 생각부터 하는 스타일이다.
상황을 그리고, 최적의 길을 찾고, 정해지면 나아간다.
그렇다 보니 죽이 잘 맞으면서도 또 묘하게 경쟁하는 구도가 생겨났다.
다른 두 여자에게 지는 것보다, 서로에게 지는 게 더 마음에 걸릴 정도로.
“여기 있었네요. 티샤, 엘가님.”
때마침 카일이 다른 이들과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나타났다.
‘나를 먼저 불러주었어.’
‘나를 나중에 부르네.’
당장 그 부분까지 거의 동시에 생각할 수준이었다.
이러니 서로의 신분도, 강점도 다르지만 묘한 경쟁 구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카일.”
“네, 엘가님.”
“음악이 곧 바뀔 것 같은데, 가서 춤 한 번 추지 않겠어요?”
“춤이요?”
조금은 갑작스러운 엘가의 제안에 카일이 볼을 긁적거린다.
“그, 춤은 아직 자신이 좀 없는데….”
거짓말이다. 몸으로 하는 일에 존 나센이 뒤쳐질 수가 없다.
춤은 좀 다를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결국 몸으로 하는 일이다.
단 몇 번의 연습 만에 귀족들이 추는 춤 정도는 다 할 수 있는 카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이 없다며 한 번 빼는 이유.
‘눈치 보인다고.’
당장 엘가의 옆에는 티샤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정말로 엘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춤이라도 출 거냐는 듯이.
그리고 당장 옆에는 없지만, 황녀와 성녀도 자신이 춤을 추게 되면 바로 보게 될 거다.
‘절대 내가 먼저 나서서 여지를 주지 말라고 했어.’
지금이 딱 그와 같다. 절대 나서면 안 된다.
공평하게 해줄 수 없다면, 혹 누군가 자리에 없다면.
어떻게든 핑계를 붙여서 한 발 빼내는 것이 알맞은 대처다.
하지만 엘가는 카일의 생각보다 더 영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그를 흔들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춤 신청을 거절하는 거예요? 이러면 나 좀 서운한데.”
잔뜩 기대했는데, 그 기대가 실망으로 번져가는 표정.
엘가는 그 모습을 그대로 연기하며 카일의 마음을 쿡쿡 찔러댔다.
성녀는 양심에 찔려서 절대 하지 못 하는 일.
황녀는 그게 뭐냐며 되었다고 할 행동.
그걸 엘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수 있었다.
‘때론 이렇게 연기도 하고, 약점도 살살 건드려야 해.’
카일의 약점, 기껏 기대한 게 갑자기 망해버려서.
거기에 대해 실망하고 축 쳐지는 모습을 못 본다는 것.
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걸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그것마저도 운동 관련해서 만들어진 약점이었다.
“아니, 그게… 하….”
그리고 엘가의 예상대로, 카일은 어쩔 줄 모르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아예 더 나아가서 엘가가 어깨까지 축 늘어트리니 카일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와아. 공녀님, 진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티샤는 새삼 엘가가 대단하다고 여겼다.
리토리오 대공가의 후계자가 된 그녀다. 제국의 차기 대공이다.
그런 여자가 저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당장 본인도 설마, 하다가 그대로 한 방 제대로 먹었는데.
‘당장 나도 끼고 싶지만….’
문제는, 티샤가 본인도 인정할 정도로 춤을 못 춘다는 것.
정확히는 박자를 못 맞춰서 도저히 따라가지 못 한다는 점이었다.
몸이 약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체 능력이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필 박치라서 박자를 못 맞추는 게 이런 문제가 될 줄은.
아마 엘가도 티샤의 그런 약점을 알고 일부러 카일에게 춤을 신청한 확률이 높다.
티샤를 놀리려는 의도보다는 어차피 그녀가 방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여기며.
안심하고서 카일에게 먼저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안 될까요, 카일? 이런 자리에서 당신이랑 춤 추는 거, 꽤 많이 기대했는데.”
“…뭐, 한 곡 정도는 괜찮겠죠.”
마침 황녀와 성녀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런 자리는 처음인지라 긴장한 것인지, 성녀가 불편함을 호소하자 황녀가 그녀를 데리고서 바깥 공기라도 쐬자고 나간 것이었다.
카일 또한 아예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다.
엘가가 지금 이 타이밍에 저런 부탁을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안다.
두 여자는 없고, 티샤는 춤을 잘 못 추니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일 터.
은은한 동의의 뜻이 흘러나오자 엘가가 미소를 짓는다.
그리곤 살짝 손을 내밀어 사교계에서 항상 그러하듯, 제안을 한다.
“그러면 카일 존 나센. 저와 함께 한 곡 추시겠나요?”
“한 곡 부탁드리겠습니다. 엘가 공녀님.”
마침 연주곡이 끝나며 춤을 추는 인원들이 바뀌는 때가 되었다.
그 사이를 엘가는 카일을 붙잡고서 아주 자연스럽게 걸어나갔다.
황제도 없고, 황태자도 없고, 황녀도 없는 이 상황에서.
이 거대한 연회의 중심에 서도 아무 문제가 없다.
차기 리토리오 대공이니 귀족들도 이 정도는 당연하게 여길 터.
“….”
카일은 흘끗 주변을 살폈다.
자신과 엘가가 중앙으로 나서자 자리에 있던 모든 귀족들이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몇몇은 살짝 질투 어린 시선을 보내지만, 대다수는 감탄한 기색들이 역력했다.
‘예상외네. 반응이 영 별로일 줄 알았는데. 아, 엘가 때문에 그런가?’
그리 생각하고 있자 엘가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다.
“엘가님?”
“아, 미안해요. 카일. 그런데 당신 얼굴에 다 쓰여 있어서.”
“무슨 말입니까?”
“왜 귀족들이 저렇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냐고 궁금해 하는 눈치잖아요.”
그 말에 카일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존 나센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 인정한다.
자신에 대한 판단이 바뀐 것도 역시나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무력 쪽인 부분, 그리고 제국에 대한 관계 부분이지 않나?
이렇게 사교계에서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를 저렇게 맞이해주는 게 이상한데.
차라리 겁을 먹고 얼어붙은 거라면 또 이해를 하겠는데 말이다.
“원래요. 이런 곳에서 가장 잘 먹히는 건, 외양이니까요.”
엘가는 카일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으며, 그에게 살짝 매달렸다.
모르고 있는 건가? 왜 귀족들이 저런 반응인 것인지.
단순히 존 나센이라서, 공을 세운 자라서 저러는 건 아니다.
“잘 모르는 눈치인데, 카일. 당신 지금 충분히 멋지거든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욕심을 내서 춤까지 추려고 하는 거고.
속으로 그리 중얼거린 엘가는 천천히 들려오는 연주곡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주가 시작되자 잠깐 휴식을 취하던 귀족들이 다시 춤을 춘다.
와중에 엘가와 카일이 위치한 중심부는, 조금씩 거리를 두어 공간을 만들어준다.
마치 이 무대의 주인공들이 더 많은 관심을 받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카일.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바짝 집중한 카일과는 다르게 엘가는 상당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도 저렇게 말까지 하는 여유라니.
카일이 침묵으로서 물어보라는 뜻을 전하자 엘가가 말을 이었다.
“이제 할 일도 다 끝난 것 같은데, 우리들 문제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들 문제라면.”
“지금 이 상황이요. 나와 당신, 그리고, 나와 다른 여자들.”
애써 뒤로 미루어두고 있었던 안건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