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 연회가 끝나고, 주말을 지나 다시금 한 주가 시작되었다.
그 사이 카일은 또 한 번 커다란 변화가 왔음을 깨달았다.
‘이것들 시선이 도대체 왜 이래.’
동쪽까지의 일을 전부 끝내고 돌아온 후, 아카데미에서 받았던 시선?
당연히 대부분이 선망과 두려움이 적절하게 섞인 것들이었다.
분명 엄청난 공을 세운, 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아카데미 1학년이 될 텐데.
또 너무 괴물 같은 짓들을 많이 해서 쉽사리 다가가기조차 무서운 사람.
그렇기에 카일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그런 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쁘지 않았다. 운동하는 데에 방해만 안 하면 그만이니까.
오히려 알아서들 조심해줘서 카일 입장에선 은근히 편했다.
한데 연회가 끝난 후, 그 시선에 다른 무언가가 더해졌다.
선망, 두려움, 그리고 더해진 것은 희한하게도 질투였다.
‘뭔데.’
질투라니. 카일 입장에선 처음 받아보는 감정이다.
뭐 질투할 게 있다고. 아니, 애당초 질투할 실력은 되고?
설마 자신의 무력이나 몸에 질투를 느낄까 싶었다.
본인들이 노력도 안 하면서. 설령 한다고 해도 진짜 조금 밖에 안 하면서.
거기서 질투를 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
‘혹시 황제가 그런 공적인 자리에서 생일 축하한다고 해서 그런가?’
해서 그 다음으로 그런 생각도 했으나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아예 있지도 않은 일은 아니다. 황제는 간혹 그런 자리에서 생일을 축하해주곤 했다.
귀족들에게 제국의 지존은 이렇게 세심한 사람이기도 하다, 라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다만, 그 대상 중 대부분이 다른 누구도 아닌 대공들이었다는 게 작은 문제이지만.
아무튼 그런 것만으론 학생들이 질투까지 품을 이유가 없다.
다른 이유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선 납득이 안 된다.
와중에 카일은 그런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다 남학생임을 깨달았다.
‘아니, 설마. 아니지? 이런 젠장. 이것들이 뭐 다 좋은 줄 아나?’
본인의 예상이 맞을 것 같다고, 카일은 생각했다.
지금 저 남학생들은, 연회에서 퍼진 카일의 스캔들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신분으로도, 그리고 무력으로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5황녀, 율리카.
미래의 리토리오 대공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공녀, 엘가.
비록 출신은 평민이지만 그 바이엔 대공이 관심을 가졌다는 티샤와.
마지막으로 교단의 빛이자 따스한 햇볕 그 자체인 성녀까지.
그 네 여자가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카일과 함께 있었다.
심지어 단순히 같이 있던 것만이 아닌, 아예 서로 더 많은 관심을 끌려고 했다.
이유는 하나. 중심에 앉아있는 카일을 낚아채기 위해서.
이런 상황에서 그 이야기가 퍼지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비밀로 하려고 했다면 모를까, 황녀나 공녀는 대놓고 소문이 퍼지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티샤도 딱히 물러설 기미 따위는 보이지 않았고 말이다.
‘성녀님은 그런 건 아예 생각에도 없으셨던 눈치고.’
사교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성녀다.
당장 소문이 날 거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재잘재잘.
덕분에 진짜 온갖 이상한 소문들이 퍼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로 들자면, 황녀와 성녀와 공녀와 마녀가 존 나센을 두고 싸운다! 따위로.
“이런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후우, 후우-.
벤치 위에 누워 바벨을 들어 올리며 카일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역시 머리가 아플 때는 근육을 움직이는 게 최고다.
이렇게 운동을 하고 있으면 다른 생각은 안 하게 된다.
그저 근육의 움직임과, 몸의 과부하와, 정자세에만 집중하게 된다.
집중 안 하면 다치니까. 그래서 모든 생각을 지울 수 있으니까.
“후우우우….”
마지막 세트를 마무리한 카일이 봉을 걸쳐두고 몸을 일으킨다.
그리곤 반대편에 여전히 멍하니 앉아있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
“….”
“이안!”
“어어, 카일. 불렀나?”
“뭐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다치면 누구 원망하려고. 멍 때릴 거면 가서 달리기라도 하던가.”
카일의 지적에 이안이 미안하다며 자세를 잡는다.
하지만 채 한 세트도 하지 못 하고, 또 다시 멍한 모습이 된다.
‘아니, 그게 그렇게 충격이냐고?’
이안이 저러는 이유는 다름 아닌, 넬의 진짜 정체 때문.
본인은 정말로 넬이 여자인 줄 몰랐단다. 꿈에도 상상 못 했단다.
남들은 놀라면서도 또 ‘어쩐지 좀 이상했다.’ 내지는 ‘그럴 것 같더라.’ 라는 반응이었는데.
심지어 그 남들은 넬과 많이 만나지도, 같이 운동을 하지도 않은 사이인데.
같이 운동하고, 이야기하고, 어울리고, 다 했던 놈은 전혀 몰랐단다.
로맨스 속 남주의 패시브 중 하나가 눈치 제로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같은 사람으로서 저럴 수가 있나 싶다.
‘연회 마지막 순간에 살려줘서 내가 조용히 넘어간다.’
다시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두 명에게 시달리는 것도 무서운데 셋도 아니고 넷이 동시에 공격.
전부 다 당장 대답하기조차 난처한 것들이니 미칠 지경이었다.
덕분에 카일은 정말 오랜만에 공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공포감은, 마치 기름 좔좔 흐르는 음식을 먹다가 리어한테 걸린 느낌이랄까.
물론 이안 본인은 카일을 구해주려고 온 게 아니라.
정말로 대화를 나누다가 카일의 조언이 듣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지만.
따지고 보면 남자와 여인들의 대화에 대뜸 끼어든 셈이니 눈치가 없어도 진짜 더럽게 없는 수준이라고 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끼익-.
실내 연무장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다.
“이안님!”
저 목소리의 주인공은, 엘가의 비서이자 또 다른 눈치 제로, 레토.
그의 등장에 카일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레토를 지켜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그래도 레토, 너는 자그마치 공녀를 수행하는 사람이잖아.
이안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을 거야. 막 상상도 못 했다는 그런 말은….
“저, 정말입니까? 정말로 넬, 그가 그, 그녀였습니까?”
“그렇다는데.”
“정말로, 정말로 여자였다고요? 전혀 몰랐는데?!”
“나도 그래. 상상도 못 했어.”
“아니. 아니… 대체 어떻게 된… 나참….”
두 남자의 대화를 들으며, 카일은 그냥 웃고 말았다.
혹시 어디 눈치라는 걸 길러주는 운동 방법은 없을까.
지금 저들에게 필요한 건 상체도, 하체도, 유산소도 아닌.
살면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눈치인 것 같은데.
“아, 카일님! 카일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넬 님이 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정말입니까? 어떻게 알고 계셨던 겁니까?”
“운동하면서 다 보였어요. 골격이나, 체형 같은 거.”
카일의 대답에 레토가 아아! 하고 그럴 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 수긍에 더 기가 막혀진 카일은 결국 버티지 못 하고 입을 열었다.
“아니! 레토 당신이고, 이안 당신도! 진짜 몰랐어요? 넬이랑 당신들 둘이랑. 같이 운동하고, 같이 강의 듣고, 같이 밥 먹고! 그런 게 몇 개월인데!!”
“정말로 몰랐습니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카일님.”
“우리가 알았다면 네게 슬며시 언질이라도 했을 거다.”
뭐 이런 인간들이 다 있어, 진짜? 대단하다는 말조차 뛰어넘네.
고개를 내저은 카일은 그냥 다시 벤치 위에 누웠다.
저것들이랑 대화를 나누다간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아. 카일님.”
“넬 이야기라면 제발 그만 좀 해요. 남자 아니고, 여자고, 대부분 이상하다고 여겼고!”
“넬 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른 주제입니다.”
끄응, 침음을 내뱉은 카일이 조용히 봉을 움직이는 것에 집중한다.
듣고 있으니 계속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소식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성녀님 말입니다.”
갑자기 성녀님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지?
“오늘 강의에 가보니, 성녀님이 계셨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아무래도 강의를 같이 들으시려는 것 같던데.”
“…예?”
덜컹-.
얼마나 놀랐는지 카일이 세트조차 다 하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그 놀라운 상황에 이안이 ‘억.’ 하고 작게 놀랄 정도.
“무슨 말이에요, 레토. 성녀님이 강의에? 뭐 잠깐 참관이라도 하신 건가요?”
“처음에는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잠깐의 참관이 아닌 느낌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출석도 부르시고, 또 성녀님도 모습이… 학생, 같았는데요.”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대체. 라고 생각하며 카일이 아예 일어서는 찰나.
침음을 한 번 흘린 그는 입술을 깨물고선 다시 벤치 밑으로 들어갔다.
놀라운 소식이다. 갑자기 성녀가 아카데미에 학생으로 있는다니.
예배당에서 있던 그녀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인가.
거기에 그걸 또 교단이 허락했다고? 대체 무슨 이유로?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얼른 성녀를 만나서 묻고 싶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루틴을 다 돌린 후. 그 이후에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루틴 깨트리지 마라. 카일.”
“그거 마음대로 깨트리다 걸리면 누나한테 혼난다?”
과거 조금은 엄하게 대하던 리어와 레아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광경만 생각하면, 세상 어떤 유혹도 떨쳐낼 수 있었다.
*
흐으응-.
벤치에 앉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작게 무릎을 흔들고 있는 여인.
부드럽게 들어오는 햇볕이 머리에 반사되어 푸른빛의 폭포수를 그린다.
따스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동자 또한, 신비롭기 짝이 없다.
“성녀님!”
그 부름에 성녀가 살그머니 고개를 돌린다.
“카일 형제님?”
“여기 계셨군요. 예배당에 없으셔서 한참 찾았습니다.”
“아. 저 운동 쉬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루틴 다 돌렸어요!”
이젠 전부가 카일만 만나면 자동적으로 루틴 보고, 혹은 자백이었다.
어기지 않고 잘 해냈다면 칭찬을 듣고 싶어서 말하는 것이고.
혹 다 해내지 못 했다면 어차피 거짓말 들킬 거, 미리 말하는 수준으로.
“그거 때문에 찾아온 거 아닙니다.”
“네? 그러면….”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성녀님이 강의에 들어가셨다는데.”
“아…. 그거요.”
카일의 질문에 성녀가 부끄럽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맞게 들으셨어요. 실은 교단에 부탁해서, 이번 학기에는 학생으로 지내게 되었답니다.”
연회에서 무언가 느낀 것이 있었던 걸까.
예기치 못 한 때에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성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