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 연회가 끝나는 그 순간부터, 성녀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채 지내온 것 같다고.
‘더 알아보고 싶어요. 그리고 더 해보고 싶어요.’
성녀라는 자리가 영원하지는 않다. 교단도 그걸 강제하지 않는다.
그들의 교리도 누군가에 대한 진실한 사랑은 신에 대한 사랑과 같다고 말한다.
덕분에 연심을 품은 이들은 중요한 자리를 넘겨주곤 한다.
지금의 성녀 본인도 전대 성녀가 혼인을 하며 새로이 뽑힌 것이다.
‘과거의 저는… 교단 밖에 모르는 영혼이었죠.’
언제까지고 가련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봉사하며 살 줄 알았다.
사랑이란 건 찾아오지 않는 아주 먼 이야기라고 여겼었다.
많은 이들이 성녀인 자신에게 연심을 보냈지만 웃으면서 지나쳤다.
대부분이 그저 외양에 집중하여 넘어간 이들.
혹은 성녀라는 지위를 어떻게든 해보려 하던 자들.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성녀였기에 그 정도는 간파가 가능했다.
아주 가끔 순수하게 연심을 품은 사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성녀의 눈에 그들은 그냥 선한 형제일 뿐이었다.
연심으로 가슴이 뒤흔들렸던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얼마 전까지는 말이에요.’
처음에는 그냥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마주치고, 또 만남이 이어지고, 그렇게 알아가다 보니 다른 때와는 달랐다.
왜 카일 형제를 마음에 담게 되었을까? 그 부분은 아직도 헛갈린다.
단순히 외모가 멋져서? 그건 아니었다. 그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심하게 챙겨주는 모습에서, 그리고 구슬땀을 흘리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결정적으로 여태 만났던 이들과는 묘하게 다른 모습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래,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아주 강렬한 호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지극히 평범하신 분 같다가도, 또 누구보다도 특별하신 분.’
그것이 카일이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성녀의 생각이었다.
더 알아가고 싶었고,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카일 또한 그런 성녀의 마음에 화답하듯 더 많이 만나주었다.
여전히 성녀의 건강을 챙기고,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면서 말이다.
그 때 성녀는 처음 알았다. 저렇게 자신을 몰아붙이고 또 노력하는 자를 보면서.
그렇게나 멋지게 보일 수가 있음을, 그리고 동경하게 될 수 있음을.
어쩌면 신을 모시는 자리엔 성녀 본인보다도 카일이 더 나을 수 있겠다고까지 생각했다.
‘너무 빠져있기만 했어요. 그래서 조금 늦어버렸어.’
겨우 본심을 깨달았을 땐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매님들 여럿이 이미 카일 곁에 포진한 상태였다.
생판 모르는 이들이라고 해도 부담스러운데, 모두가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리토리오 대공가의 공녀, 엘가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진 티샤.
그리고 성격도, 출신도 다르지만 가장 친한 벗이 된 황녀까지.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라는 비명을 질러본 적도 있다.
하나같이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다. 멀어지기엔 너무 슬픈 자매들이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 응원을 하자니 이상하게 가슴이 시큰거렸다.
이후 성녀는 조금씩, 조금씩, 계속해서 카일에게 다가갔다.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성녀라는 것도 애써 잊은 채로.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 있었다.
과거 교단의 성녀로 지내던 자신보다, 지금 카일과 저 자매들의 곁에서.
벗으로, 연인으로 지내는 편이 아주 조금은 더 행복할 것 같다고.
“교황 성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여 성녀는 연회가 끝난 이후 곧장 교단으로 달려갔다.
너무 갑작스러운 부탁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혹 교황이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어찌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교황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자애로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가 먼저 나서서, 혹 이제라도 나이에 걸맞은 삶을 살아볼 생각은 없냐고.
그 무거웠던 의무를 이제는 조금 내려놓을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성하.”
성녀는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저런 말을 듣자니 스스로가 자신만 생각하는 나쁜 사람처럼 여겨졌다.
처음 성녀가 되던 순간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그 맹세마저 잊은.
너무나 어리석고, 또 너무나 바보 같은 사람이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다.
“아가.”
어릴 적 교단에 왔을 때처럼, 정말 오랜만에 그 호칭을 불러보는 교황이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틀렸다고.
“행복하고자 하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란다. 그 과정에서, 혹 네가 누군가를 힘들게 했느냐? 고통스럽게 했느냐? 혹 다른 이의 행복을 해치기라도 했느냐?”
“아니라면 되었다. 너는 행복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가. 걱정하지 말거라.”
당장은 성녀 자리를 내려놓기 그러할 것이다.
후계를 찾은 것도 아니고, 성녀 본인도 아직은 의무감이 남아있으니.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세상에 스며드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그 나이 때에 맞는 무언가를 새로이 해보는 게 좋겠다고.
교황은 그리 말하며 어떤 수를 썼고, 마침내 성녀에게 임시 학생 자리가 내려졌다.
아마도 이번 연회에 교단이 참석해준 것을 이유로 해서.
거기에 교황이 직접 부탁하기도 했으니 교육성에서도 바로 일을 처리해준 것이리라.
그렇게 해서, 성녀는 처음으로 강의실에 손님이 아닌, 학생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하고 또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예배당에서나 보던 성녀가, 그게 아니면 카일과 함께 운동을 하던 성녀가.
갑자기 혼자 강의실에 와서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책을 살펴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곧 그들은 강의 내용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성녀의 등장에 집중들이 흩어질 것을 염려한 교수들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기에.
그것은 ‘오늘 강의한 내용 쪽지시험 볼 거다.’ 라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으아아아!!”
비명을 지르는 학생들을 보면서, 성녀는 그냥 모든 게 신기했다.
카일 형제님은, 그리고 엘가 자매님과 티샤 자매님은, 이런 곳에 있었구나.
신기하면서도 또 재미있고, 두근거리고, 무엇보다….
“성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쪽지시험은 성녀님 또한 보실 겁니다.”
“네?”
무엇보다, 너무 갑작스러운 게 많아서 심히 당황스러웠다!
“쪽지시험에서 불합격한 인원들은 강의 이후 보충 수업을 받을 각오들 하세요.”
“아아! 교수님!! 너무 하십니다!!”
“그러니까 강의에 집중하시면 된답니다.”
그리 말한 교수는 슬그머니 성녀를 쳐다보았다.
“절대 차별해서는 안 되네. 좋은 뜻으로도, 나쁜 뜻으로도.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대하게.”
아카데미 학장이 직접 요청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요청은 당연히도 교육성 장관이 내려 보낸 것이 된다.
성녀를 부디 학생들과 같은 이로서 대해달라.
교황의 부탁이 이상한 부분에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히익!”
덕분에 성녀는 교리를 달달 외우던 그 시기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보충 수업이라니. 카일도 그런 건 받았다는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본인이 그걸 받았다고 하면 카일이 무슨 말을 할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통과입니다, 성녀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성녀는 쪽지 시험을 통과해내고 말았다.
교리를 달달 외우던 경험에,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필사의 의지까지.
그런 상황에서 통과하지 못 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법이었다.
“하아아….”
강의실을 나서자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과 기쁨이 차올랐다.
그러고 보니 카일 형제님도, 엘가, 티샤 자매님도 항상 이런 것 같다.
강의가 끝나면 세상 무엇보다도 즐거운 느낌이 든다고 말이다.
벤치에 잠깐 앉은 성녀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성녀가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갑작스레 쪽지 시험이라는 시련이 내려져서 살짝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끙끙거리며 고생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런 게 바로, 카일 형제님이 누리던 진짜 삶이란 걸까요.’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더 알아가다 보면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지금은 아주 조금 먼 느낌이 나지만. 성녀라는 직위를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그것마저도 털어냈을 때 더는 그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성녀님!”
익숙한 목소리에 성녀는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로 신이 존재하시는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생각만 하는데 그를 보내줄 리가 없으니까.
*
“…그렇습니까. 그렇게 되었다고요.”
현 상황의 전말을 알게 된 카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성녀는 급히 다음 말을 덧붙였다.
“물론! 운동도 열심히 할 거예요. 예배당에 있던 만큼. 아니, 보다 더 열심히 할 테니….”
“아뇨.”
하지만 카일은 냉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날카로움에 성녀가 움찔, 하고 몸을 떨던 찰나.
“아카데미를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네?”
“생각보다 강의는 더 졸리고, 과제는 더 귀찮으며, 시험은 더 힘듭니다. 성녀님.”
“아… 그, 그런가요?”
“네. 거기서 지금과 같은 루틴으로는 시간이 부족하실 겁니다. 강의 시간도 생각해야 하고 아카데미 생활에 지장이 가서도 안 되니까요.”
운동도 아니고, 아카데미에 관련된 부분으로.
이렇게 진지한 모습의 카일은 또 처음 보는 것 같다.
“카일 형제님. 이런 모습은 처음인 것 같아요.”
“성녀님께서 혹 불쾌하신 일을 겪을까봐 걱정스러워서요.”
“불쾌한 경험이요?”
“예. 그, 학사 경고라고, 그거 한 번 받으시면 정신이 번쩍 들 겁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님이 학사 경고? 그건 절대 안 돼.
신체가 튼튼해지는 것도 좋지만 성적으로도 완벽하셔야 합니다.
당신은 항상 빛이 나야 하는 존재! 제가 그렇게 만들어드릴 겁니다!
물론 강의 부분은 카일 본인도 아슬아슬하다.
해서 티샤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거기에 엘가까지 붙이면 성적도 아무 문제가 없을 거다.
그런 카일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성녀는 연신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