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36화 (236/318)

“내일 오전 강의 끝나고 점심에 카페로 모이세요”

바로 어제, 카일이 세 여자에게 전한 말이었다.

카일이 갑자기 자신들을 호출한다. 그것도 셋을 동시에.

그 부분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엘가는 급히 티샤, 성녀와의 회동을 가졌다.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무슨 일일까요?”

“글쎄요. 저도 이렇다 할 뭔가 떠오르는 건 없는데. 혹시 성녀님은 아시나요?”

은근히 여기저기에서 많은 정보를 듣는 성녀다.

그녀라면 어디선가 우연히 무언가를 들었을 수도 있다.

“음… 아, 성기사 한 분이 얼마 전에 황녀님께서 아카데미에 오셨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예상대로, 성녀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지니고 있었다.

“황녀 저하께서요? 그게 정확히 언제죠?”

“얼마 전이니까… 아마, 동쪽으로 떠나시기 전일 거예요.”

황녀는 현재 동쪽의 안정화를 위해 그곳으로 떠나있는 상태다.

그 전에 아카데미로 찾아와서는 카일을 만났고, 얼마 후 카일이 자신들을 부른다?

그것도 한 명씩도 아니고 셋을 동시에?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게 분명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지? 대체 무슨?’

엘가의 머리가 핑핑 돌아가며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카일이 결국 황녀를 선택했다는 가정.

이 부분은 사실 엘가로서도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는 부분이었다.

황녀가 누구인가. 현 황제의 직계다. 비의 소생이 아닌 황후의 소생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출신부터 일단 이기고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지위. 이 부분은 그래도 엘가가 조금 자신이 있는 부분이다.

황실의 적녀, 거기에 제국 10강이라는 자리까지 지니고 있는 황녀지만.

어찌 되었든 차기 황제는 아니다. 즉, 너무 과한 힘은 지녀서는 안 된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황좌에 뜻이 없다고 해도 현 황제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차후 황제가 될 황태자의 입장에서는 황녀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해서 황녀도 최대한 겉으로 돌며 힘은 있되 정계엔 관심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거다.

아무튼, 정리하자면 카일이 황녀를 선택하는 건 모두를 위한 길이다.

황녀를 두고서 다른 여인을 정실로 맞이한다면 황실에서 반발할 수 있다.

그리고 정실이 된 쪽도 황녀가 부담스러워서 정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 할 수 있다.

‘당장 나조차도 황녀님을 제치고 첫 번째가 되면 그 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그걸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인데.’

반대로 황녀가 정실이 되면 그 대부분의 문제는 사라지게 된다.

대신, 그래도 나름 대공인 자신의 위신을 어떻게 세울 거냐는 문제가 있다.

황녀도 황녀지만 대공도 그 위세가 엄청난데 정실도 아닌 첩이라니.

‘분명 무슨 생각을 지니고서 우리를 부르는 거겠죠, 카일? 혹시나 아직도 망설이고 있다면 남는 건 여인들끼리의 혈전이라고요.’

부디 늦지 않은 시기에 카일이 결정을 내렸으면 한다.

그게 설령 자신이 바라지 않던 것이라도, 아예 침묵하는 것보단 나을 테니.

“다들 일찍 왔네요.”

그리고 다음날, 오전 강의가 끝나고 카페에 들어서니 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을 한 번 살핀 티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술을 뗀다.

“다른 학생들은 하나도 안 보이네요?”

“제가 다 내보냈습니다. 오늘 하루 제가 여기 통째로 빌렸거든요.”

“어? 정말로요?”

“네. 덤으로 주인장도 잠깐 어디 나가있으라고 했고요.”

그만한 대가는 충분히 치렀으니 문제는 없을 거라면서.

카일은 세 여인들에게 얼른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대체 무슨 일인 거지?’

‘카일 형제님. 저 자꾸 불안해져요. 왜 이러시는 걸까요?’

‘설마 정말로 황녀 저하와의 결론을 내린 건가?!’

세 여인이 서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카일이 밑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이건… 마법 통신구잖아요?”

“네, 맞습니다. 엘가님.”

“이거 엄청나게 고가인데? 아니, 이런 걸 개인이 가지고 있다고요?”

“설마요. 제가 돈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받은 겁니다.”

이 귀한 걸 누군가 공짜로 줬다는 게 더 놀라운 일이다.

꽤 잘 나간다는 귀족 가문에서도 겨우 하나씩 지니고 있는 게 전부다.

심지어 그 수량도 제한이 되어 있어서 대공가도 몇 개가 끝인데.

“자, 그러면 네 사람 모두 모인 것 같으니….”

“네 명이요?”

티샤의 반문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마법 통신구를 작동시킨다.

그러자 뿌옇던 내부가 점차 투명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 아, 아아. 마법 통신 확인 중. 잘 들리나, 카일? ]

“네. 잘 들립니다. 황녀님.”

황녀까지 참석하는 자리였다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여태껏 황녀를 선택했다는 가정을 생각하고 있던 엘가로서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정말 황녀를 택했다면 굳이 황녀 본인을 자리에 불러낼 필요는 없는데.

갑자기 마법 통신으로 황녀를 불러내는 건 예상 바깥의 일이었다.

“황녀님? 잘 도착하셨나요?”

와중에 성녀는 황녀가 반가운지 바로 근황부터 묻고 있다.

[ 도착한 거야 당일 바로 도착했다. 지금은 근방 부족들 중 하나를 만나러 가고 있다. ]

“그쪽에서 안내자가 왔습니까?”

나름 중요한 부분이다. 제국에서 사람을 보냈는데, 유목 부족에서 누가 왔느냐.

이상한 놈을 보냈다면 아직 매운 맛을 덜 보았다는 것이 되고.

반대로 괜찮은 놈이 왔다면 저쪽도 더 이상의 저항 의지는 없다는 것이 될 터.

[ 저번에 카일, 네가 상대했던 소치르라는 자다. 직접 나를 마중 나왔더군. ]

그런 의미에서 소치르는 합격점이라 할 수 있다.

실력으로는 전前 가한의 칼이라는 호칭까지 지니고 있었고.

그 또한 하나의 부족을 이끄는 자이기도 하니 충분하다.

“다행이네요. 그가 모든 부족들과의 가교 역할을 해준다면 훨씬 빠르겠어요.”

[ 근황을 물으니 원래부터 가한에게 소극적이었던 부족들은 진작 제국의 영향력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아, 정확히는 존 나센의 영향이라고 해야 할까. ]

“왜요. 벌써부터 봉을 들어 올리려고 정신이 없답니까?”

그러자 황녀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쪽 전승에서는 늑대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지는 존재가 용이다.

한데 그 용의 후예로 거의 확실시되는 자들이 증명을 하라며 봉을 주고 떠났다.

때문에, 본인들을 늑대의 후예라 여기는 유목 부족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신들이 여태껏 늑대의 후예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통째로 의심을 받다니.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 압도적인 무력 앞에 꽤나 다급해진 모양이었다.

[ 아무튼,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연락인 거냐. 혹시 벌써 보고 싶어진 건가? ]

“안 보고 싶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죠.”

[ …어? ]

황녀 입장에선 그냥 카일이 난처해하는 싶은 모습을 보고 싶어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단순하게 던져본 장난에 불과했다.

그런데 날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치도 못 한, 굉장히 적극적인 대답.

덕분에 황녀는 물론이고 엘가, 성녀와 티샤 모두가 당황하고 말았다.

“물론, 그렇게 막 그리운 건 절대 아니고요. 여긴 엘가님도 있고, 티샤도 있고, 성녀님도… 아, 거기에 성녀님이 임시 학생으로 아카데미 다니는 건 모르죠?”

[ 뭐라고? 처음 듣는데? ]

“이거 어쩌나. 황녀님 나가있는 동안 이쪽은 저랑 오붓하게 시간 보낼 것 같은데.”

은근히 황녀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황녀는 물론이고, 나머지 셋도 도통 적응을 못 하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카일의 이런 모습은 처음 있는 것이었다.

혹시나 자신들이 서로 부딪칠까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게 보였는데.

조금은 답답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들 표정이 이해가 가네요. 뭘까, 이 상황은. 하는 얼굴.”

“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대체 뭐에요, 카일? 무슨 일인데요.”

가장 먼저 티샤가 나서서 카일에게 변화의 이유를 묻는다.

사람이 갑자기 하는 짓이 바뀌면 꼭 불안한 일이 생기던데.

세 여자. 아니, 네 여자의 얼굴에 슬슬 불안함이 가중될 무렵.

“실은, 정말 생각지도 않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게 되어서요.”

정리? 마음을 정리했다고? 그 말에 네 명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혹시나 해서 카일의 얼굴을 살펴보니 다행히도 안 좋은 일은 아닌 모양.

“일단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고 싶네요.”

“카일 형제님?”

“갑자기 웬 사과에요, 불안하게.”

“걱정 마요. 그런 의미의 사과는 아니니까.”

한 번 미소를 지은 카일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동안 너무 망설였던 것 같아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여러분들만 더 초조해질 텐데. 그저 누가 실망하고, 또 누가 슬퍼할까 그게 걱정되어서 자꾸 피하고 있었어요.”

그제야 여인들은 카일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왜 갑자기 사과를 했던 것인지 비로소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여태 서로가 그렇게나 다가가고, 또 마음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카일 또한 그런 여인들을 밀어내거나 하지 않았음에도 자꾸 일정 거리를 두던 이유.

정실은 단 하나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연스레 첩실이 된다.

일단 한 번 정해지면 그걸로 끝. 이러니 카일이 망설일 수밖에 없다.

하나가 만족하면 나머지 셋은 반드시 만족하지 못 할 터이니.

“엘가님.”

“네, 카일.”

“조만간 대공가 다시 한 번 방문할게요. 결혼 문제는 시기상조이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약속은 해두는 게 좋겠죠. 그리고 성녀님? 어쩌면 생각보다 더 빠른 시일에 성녀 직위를 반납하실 수도 있겠네요.”

“무슨… 히잇!? 서, 설마 카일 형제님!”

“티사도 그냥 대놓고 같이 있어도 돼요. 황녀님이나 다른 사람 눈치 볼 것도 없이.”

“정말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카일만 더 난처해질 텐데….”

[ 카일, 잠깐. 잠깐만.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대체 뭐지? ]

사태를 관망하던 황녀가 슬그머니 끼어든다.

지금 모양새를 보니 사방팔방 갑자기 다 퍼트리는 모양새이지 않은가.

분명히 정실은 하나이기에, 선택을 할 거면 하나만 해야 하는데.

“저는 존 나센의 사람이니까요. 존 나센 방식으로 가는 거죠.”

그리 말하며, 카일이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들었다.

자신에게 온 것 말고 또 다른 서신이 있었던 것이다.

“자, 여러분. 미래의 며늘아가들에게 시어머니가 보내시는 편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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