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40화 (240/318)

“배… 말입니까?”

남쪽은 대부분이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섬들이 많기에 배는 그보다 몇 배는 더 많다.

오로지 배만의 문제였다면 그게 당최 무슨 말이냐고 반문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배가 ‘처음 보는’ 배였다는 것이지만.

[ 확실히 처음 듣는 모양이네. ]

“네. 엘가님이 그런 말은 안 해줬습니다.”

[ 음… 아마도 섬에 닿은 게 아니라 먼 바다에서 마주쳐서, 그리고 그쪽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을 쳐서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쪽엔 소식이 안 간 건가? ]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더 머리가 아파지는 느낌이다.

마법 통신구를 붙잡고 얼른 더 말해보라고 흔들자 황녀가 으아아, 비명을 지른다.

[ 남쪽 섬들 중에서도 끝자락에 위치한 곳. 그 곳의 배 중 하나가 먼 바다까지 나가서 조업을 하다가 배 두 척을 마주했대. 그런데 멀리서 봐도 상태가 영 아니었다고 하더라. ]

“조난일 가능성도 있다는 거네요.”

[ 그렇지. 그런데 문제는, 그 배의 생김새나 돛 모양이 남쪽 어느 섬의 배와도 달랐대. ]

“어느 섬의 배와도 말입니까?”

카일의 반문에 황녀가 그렇다니까, 하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남쪽 섬들은 저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생활양식을 지닌다.

배들도 각 섬마다 특색을 지니고서 만드는 수준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같은 생활권에서 출발한 지역이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는 하지만 완벽하게 다를 수는 없다.

서로 항상 교류하고, 만나는 사이이기에.

“…그러면 가능성은 역시나, 그거 하나겠네요.”

[ 다른 먼 대륙에서 온 사람들. 그 넓은 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당도한 이들. ]

“조난자일 수도 있으니 구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요?”

[ 말했잖아. 배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달아났다고.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어? ]

도망자, 범죄자, 무엇이 되었든 유쾌하지는 못 할 손님.

그 대답을 내놓자 황녀가 정답이라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 손님은 항상 환영이지. 하지만 그 손님으로 인해 난처해질 수 있다면, 더는 손님이 아닌 거야. 그쪽에서 남쪽 사람들을 피했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터. 그게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무엇도 확실하다고 할 수 없겠네. ]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도 들었다.

이곳과는 또 다른 세상. 과연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리고 과연 3대 몇을 칠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해지는….

‘워워. 존 나센 의지 멈춰.’

요즘 여자들이 하도 맹공을 퍼부어서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그 여자들이 없다고 다시 솟아오르는 존 나센 의지다.

이럴 때는 빠르게 또 다른 여인으로서 진압을 해야 한다.

“아무튼, 좋은 소식 감사해요. 황녀님.”

[ 별 것도 아닌데. 아, 나도 이제 슬슬 가봐야겠어. 곧 또 다른 부족에 도착이야. ]

“힘내시고요.”

[ 말로만 하면 힘이 안 나. ]

“사랑합니다, 율리카. 힘내세요. 할 수 있어요.”

기습적인 일격에 황녀가 멍하니 통신구를 바라본다.

그러다가 손을 더듬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황녀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이 기습 공격이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본인이 그렇게 직진할 땐 언제고. 내가 들어가니 부끄러워하네.’

거 참 희한한 황녀님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카일은 마법 통신구를 치웠다.

‘그보다, 정말 무슨 새로운 일이 생긴다면….’

새로운 두 세계가 만나면, 둘 중 하나의 결과가 나오게 된다.

웃으면서 마주하거나. 아니면 일단 누구 하나 두들겨 패고 시작하거나.

이런 상황에선 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만, 확신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들이 쫓기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고 했다.

혹시나, 그 손님들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무슨 일로 인해 도망을 쳤고.

그 뒤를 추격대가 쫓고 있는 거라면 그 반응이 설명이 된다.

대양에서 육지를 오랫동안 밟지 못 한 채 지내는 것?

자살 행위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 버티지 못 한다.

하물며 배 상태도 엉망인, 행색이 영락없는 조난자라고 했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배를 발견했음에도 도망을 쳤다?

‘잘못하면 진짜 부딪칠 수도 있겠는데.’

정확히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쫓는 이들과.

연신 무언가를 열심히 생각하던 카일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당장 제국에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고, 황제가 자신을 찾은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본인 혼자서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것도 웃긴 일이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또 다른 난관을 뚫고 나가야 하니까.

“카일.”

“이안? 뭐예요. 훈련하고 있을 시간 아닌가?”

요즘 들어서 계속 수상한 모습을 보이는 이안이 다가왔다.

여기서 말하는 수상한 모습이란, 갑자기 옷을 차려 입기 시작하고.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남들 눈길을 의식하는 것이나.

‘수상한데. 저 자식. 원래 저런 놈이 아니니 더 이상해.’

눈매를 좁히고서 팔짱을 낀 채, 다가오는 이안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런 카일의 속내는 전혀 관심도 없다는 듯 척척 다가온 이안은.

“카일.”

세상 진지한 표정을 짓고, 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나, 넬을 좋아하는 것 같다.”

“…에?”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었나? 이 인간이 방금 뭐라고?

…그래. 잘못 들은 게 확실해. 다른 놈도 아니고 이안이, 넬을?

“아니, 잠깐만. 이안. 방금 뭐라고요? 내가 잘못 들은 거 같아서.”

“말한 그대로다. 아무래도 넬을 좋아하는 것 같아.”

순간 머리가 지잉, 하고 울리는 느낌을 받은 카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요. 그냥 무턱대고 그럴 수는 없잖아요.”

혹시나 정말로, 만에 하나 무턱대고 그러는 것이라면.

당장 진심 펀치로 어퍼컷을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넬이 여자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죠. 그걸 당신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그 후로 갑자기 넬이 달라 보인다.”

“다르게 보이겠죠. 애당초 남자가 아니라 여자인데.”

진짜 어퍼컷 한 대 박아줘야 하나?

주먹을 쥐었다 펴며 카일이 진지하게 고민을 하는 찰나.

이안이 세상 다시는 없을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연다.

“갑자기 굉장히 예뻐 보여.”

“….”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응원해주고 싶고.”

“….”

“스승님이라고 부르는데, 괜히 장난을 치고 싶기도 하다.”

거기까지 들은 카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이 자식, 알게 모르게 아주 제대로 빠져버렸구나.

‘그러고 보니 넬도 이젠 여자라는 거 다 드러내고 다니는 중이지.’

황제의 앞에서 사실을 공개한 이후.

다행히도 큰 죗값은 치르지 않은 넬이었다.

처벌이라고 해봤자 방학에 황실 기사단에서 지내는 것인데.

기사를 꿈꾸는 이들 입장에선 오히려 엄청난 포상이다.

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받지 못 할 벌이니까.

아무튼 자신이 여자임을 밝히고 지내고 있기는 한데….

‘엘가나 티샤처럼 막 꾸미는 수준은 아니잖아.’

기사를 꿈꾸는 것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남자로 지낸 시간이 길어서 그런 것인지.

넬은 여전히 남자로 위장할 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지내고 있었다.

싹둑 잘라낸 머리는 아직 제대로 자라지 않아 여자들 단발에도 훨씬 못 미친다.

다른 여학생들처럼 괜찮은 옷을 걸치고 다니지도 않는다.

항상 흙투성이 훈련복, 아니면 실내 연무장에서 입을 단출한 운동복. 이게 전부다.

물론 남자로 위장했을 때도 남자라는 느낌이 잘 안 들 정도의 외모가 있다.

아마도 잘만 꾸미면 어지간한 여성 귀족들은 찍어 누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어떠냐, 카일. 이 정도면, 나 넬을 좋아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일단… 네. 그런 것 같기는 하네요.”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설마 이안과 넬이라니.

그러다가 문득,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넬은요.”

“어?”

“넬을 좋아한다면서요. 그러면 넬은, 이안 당신 마음을 알아요?”

“좋아한다곤 했다.”

“정말로요? …아니, 잠깐.”

잊으면 안 된다. 이 자식은 원래 눈치가 없어도 극악무도할 정도로 없는 놈이다.

정말 넬이 좋아한다는 말을 그 뜻으로 한 게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넬이 당신더러 좋다고 했다고요.”

“그렇다.”

“언제, 어느 순간에 그런 말을 했는데요.”

카일의 물음에 이안이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입술을 뗀다.

“며칠 전 검술 훈련을 봐주었을 때. 최대한 열심히 도와주었다. 그러니까 나중에 정말 고맙다면서. 나중에 꼭 은혜를 갚겠다면서. 역시 스승님은 좋은 분이라고 했어.”

“….”

진짜 한 대 때릴까. 이 자식.

이마를 감싸 쥔 채 카일은 진심으로 그런 고민에 빠졌다.

“이안.”

“듣고 있다.”

“그건 당신을 남자로서 좋아해서 말한 게 아니잖아요.”

“좋아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이 인간아. 내가 너보고 좋다고 하면 나랑 사귈 거니?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일과, 사람으로서 좋아하는 건 다르죠.”

“아… 다른 건가. 그렇군. 거기까지는 몰랐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애써 참으며 카일은 일단 이안더러 따라오라고 했다.

연애 상담은 상담이고, 지금 당장은 운동하러 갈 시간이다.

이후 실내 연무장에 들어선 두 남자는 사이좋게 루틴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좋아요?”

먼저 입을 연 건 카일 쪽이었다.

“무슨 말이지?”

“넬 좋아한다면서요. 그러면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자꾸 떠오른다.”

자꾸 떠오른다. 저 정도면 결론은 이미 나왔다.

“중증이네요.”

“그 정도로 심각한 건가?”

“아주 심각하죠.”

이런 전개는 예상을 전혀 못 했는데.

카일이 스쿼트를 하는 사이, 이안은 원판을 정리하며 말했다.

“혹시, 조언 같은 걸 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

“조언이요?”

“그래. 지금 카일, 네가 워낙 유명하니까.”

“유명하다뇨. 그거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데요.”

그러자 이안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바로 말을 잇는다.

“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얻을 여자를, 그것도 넷이나 쥔 놈이라고 하던데.”

“….”

무언가 짜증이 좀 나는데, 그게 죄다 진실이라 차마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조언보다는, 도와주는 게 더 확실할 것 같네요.”

“도와준다고?”

“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승부 가죠.”

다른 이들이라면 잠깐! 이라고 외치거나.

아니면 너무 시기상조 아닐까?! 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안은 그런 이들과는 조금 다른 부류였다.

“나쁘지 않군. 역시 카일, 너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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