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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247화 (247/318)

대공가는 역시나 그 클라스가 남달랐다.

유람선이라고 해서 그냥 적당하게 사람 좀 타는 배를 상상했던 이들.

하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건 마스트만 4개가 있는 거대한 범선이었다.

“와아… 이, 이걸 타고 나간다고요?”

“네. 아쉽게도 이것보다 더 큰 배가 있는데, 현재 그 배는 수리 중에 있어서요.”

심지어 이 배도 가장 크고 화려한 배가 아니란다.

새삼 리토리오 대공가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엘가가 왜 굳이 남쪽으로 가자고 설득을 했는지 알 것 같다.

같이 지내다보니 다들 잊은 것 같은데, 리토리오가 이 정도로 대단한 곳이라고.

그러니까 본인과 경쟁할 거라면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으음….”

카일은 걱정이라는 듯 티샤와 성녀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경쟁해야 할 엘가가 어떤 가문의 주인이 될지 둘도 다시 느꼈을 것이다.

티샤는 원래부터 평민이었으니 당연히 신분적 부담감을 느낄 것이고.

성녀 또한 카일을 택하면 자동적으로 성녀 자리는 내놓게 된다.

여전히 교단의 사람이라곤 하지만 이전만큼의 지위는 보장되지 않는다.

즉, 둘 모두 엘가에 비해서 나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다는 뜻.

‘혹시 막 불편해하거나 초조해하는 건 아닐까 싶은데.’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숨긴 채 일단 티샤를 바라본다.

“대단하네요. 아, 혹시 시간이 된다면 저 돛들을 제가 좀 봐도 될까요?”

“갑자기 왜 그러죠. 티샤?”

“주술 중에 물건에 행운을 깃들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있거든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성공만 한다면 어디서든 순풍을 가득 받을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우였던 모양이다. 오히려, 교묘하게 빈틈 공략을 하고 있다.

주술의 실용성을 더 알리는 계기로서 리토리오 대공가를 이용하는 것이다.

역시나 영리한 여자라고. 괜히 마녀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고.

카일은 그리 생각하며 성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단하네요… 정말 대단해요. 너무 멋져요! 엘가 자매님! 엘가 자매님과 제가 이런 가까운 사이라는 게 너무 좋아요!”

“아… 그, 그런가요?”

저쪽은 그냥 순수함으로서 숨겨진 의도를 완전히 깨부수는 데에 성공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경쟁자들이 전혀 기죽은 모습이 아니다.

그에 살짝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엘가는 바로 그걸 털어냈다.

어차피 이게 아니더라도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부분은 많다.

“자, 그러면 선장님. 아까 말씀해주신 해로로 해서 한 바퀴 돌아볼까요?”

“알겠습니다. 공녀님. 출항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장이 출항을 외치자 선원들이 재빠르게 자리로 이동한다.

돛을 펴고, 닻줄을 감고, 온 사방에서 힘을 내는 악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카일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 잠시만요.”

카일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캡스턴을 운용하고 있던 선원들이 있는 장소.

막 닻줄을 감아올리려던 선원들이 일제히 카일을 바라본다.

“이건 제가 할 테니까 가서 다른 준비하세요.”

“예?! 아닙니다. 손님 분들께서 이런 일을 왜….”

“도와주는 건 아니고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요.”

“안 됩니다! 이건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캡스턴은 저 크고 무거운 닻을 순수 인력人力으로 당길 수 없어서.

해서 도르래를 이용하여 최대한의 효율을 내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순수 인력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쉬워진 작업.

그럼에도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야 할 정도로 닻이라는 게 무겁다.

한데 갑자기 나타난 손님이 대뜸 이걸 혼자 하겠다고 나서니.

바다에서 수십 년을 지낸 선원들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다.

“여러분. 걱정 마시고 다른 일들 하도록 하세요.”

하지만 엘가가 나서니 선원들도 캡스턴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건 정말 안 될 것 같은데. 라는 눈길은 거두지 못 했지만 말이다.

“여기까지 와서 꼭 운동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선원들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일은 엘가의 말에 당연하죠, 라면서 캡스턴의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곧 탄식을 한 번 흘리더니 다시 손을 뗀다.

혼자서는 역시 무리일 것 같아서? 설마. 그럴 리가.

“음… 느낌이 좀 이상한데.”

라고 중얼거린 카일이 제 짐이 있던 갑판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그 사이에서 은빛의 반짝이는 무언가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기어코 그걸 가져왔어요?”

“없으면 불안해요. 설령 운동은 안 한다고 해도 꼭 가지고 있어야 하더라고요.”

손잡이 대신 끼운 것은 항상 들고 다니던 봉 한 자루.

이 정도면 좀 된 것 같다며 카일이 흡! 하고 힘을 주었다.

끼기기기긱―

그러자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캡스턴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냥 천천히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어, 어어어?”

“저게, 저게 무슨 광경이야.”

숙련된 선원 여럿이 달려들어도 겨우 돌릴까 한 캡스턴이다.

그걸, 저 청년 혼자서.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은 채.

말 그대로 엄청난 속도로 돌리고, 또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 다음에 일어났다.

“역시 이건 좀 아닌 것 같네요. 엘가님.”

“네?”

“도르래 원리가 있어서 크게 자극이 안 돼요. 이러면 하나 마나죠.”

라고 말한 카일이 선원들을 자신 쪽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것 좀 잠깐 붙잡고 있으라며 한 마디를 한 후.

“흡.”

아예 닻줄을 직접 손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

“….”

저게 도대체 무슨 괴물이야, 라는 말이 선원들 입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바깥으로는 내뱉을 수가 없었다.

*

“히야아아아!! 엄청 빨라요, 넬 자매님!”

“그러게 말입니다, 성녀님. 저는 이 커다란 배가 이렇게 빠를 줄 몰랐습니다.”

“크흠. 아무래도 돛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은데.”

“마침 바람도 순풍입니다. 이 속도라면 먼 바다도 금방 나갈 것 같군요.”

무척 신이 났는지, 성녀와 넬의 두 눈동자가 마구 반짝거린다.

아무래도 이런 거대한 배나 너른 바다는 처음 마주하는 모양.

“엄청 신이 나셨네요.”

티샤의 말에 카일은 그런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항구를 나선 배는 순식간에 섬들 몇 개를 지나쳐 진짜 바다로 들어섰다.

하늘은 구름 한 점도 없이 푸르고, 햇볕은 딱 적당하게 따스하다.

파도가 그리 높지 않아 멀미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도 없고.

무엇보다 주변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구경하게 된다.

“하늘이 축복을 내리신 것 같아요. 원래 이렇게 맑은 날을 찾기가 힘든데.”

옆에는 엘가가 제법 능숙하게 키를 돌리고 있다.

본인 말로는 시간이 될 때마다 남쪽으로 와서 배를 몰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엄청 헤맸지만 지금은 이런 거대한 범선도 충분히 몰 수 있다나.

미래의 대공이 별 걸 다한다고 생각하며 카일은 다시 바다로 눈을 돌렸다.

‘고향과는 좀 다르네. 거기 바다는 파란색이 아니라 시커먼 색이었는데.’

지금처럼 따스하고 청량한 느낌을 주는 곳? 아니다.

카일이 기억하는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무저갱 같은 곳이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과,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위험천만한 곳.

누구는 바다에서 상어를 걱정한다지만 북쪽은 그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상어 따위는 진작 얼어 죽어서 바닷속 깊은 곳에 가라앉았을 테니.

그 바다를 고향 사람들은 하하! 웃으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영했다.

몸에서 열이 나는데 이 차가운 바닷물 덕분에 식힐 수 있다나 뭐라나.

물론 카일도 나중에는 ‘역시 찬 물이 최고지!’ 라고 외치게 되었다.

더운 물에서 수영을 하면 그보다 불쾌한 일은 없을 것 같다.

“…어. 잠시. 잠깐만요? 카일, 저거 보여요?”

“네?”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티샤가 갑자기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그에 카일이 티샤의 곁으로 다가갔으나 이렇다 할 보이는 게 없었다.

“왜요, 티샤. 뭐 봤어요?”

“분명 무언가를 본 것 같은데… 저 수평선 너머에서요.”

“신기루 아닐까요? 수평선 쪽으로는 그런 게 가끔 보이곤 하거든요.”

키를 돌리며 엘가가 지나가듯 한 마디를 한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곁에 있던 선장도 엘가의 말을 거든다.

“아… 그런가요? 미안해요, 카일. 제가 잘못 본 것 같아요.”

“미안하다고 할 것도 없어요, 티샤. 신기루는 자연 현상이에요. 사람이 자연의 속임수를 어떻게 간파하겠어요. 나도 몇 번이나 속았던 걸요. 그렇죠, 선장님?”

“공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티샤 님께서 사과를 하실 일은 아닙니다.”

알게 모르게 아군 관리를 아주 잘 하고 있는 엘가다.

덕분에 카일은 그냥 웃으면서 어깨만 한 번 으쓱거리고 말았다.

“…어?”

하지만 잠시 후. 티샤가 또 다시 수평선 쪽을 가리키며 입술을 뗀다.

“저기, 저기요! 카일! 이번엔 진짜예요! 진짜로!”

또 신기루를 본 거 아닐까, 싶은 마음을 애써 감춘 채.

카일은 티샤의 말에 ‘왜 그래요?’ 라고 반응하며 수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번에도 역시나 신기루가….

“…신기루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저거. 엘가님. 저것 좀 봐보세요.”

“뭔데 그래요?”

선장에게 키를 넘겨준 엘가가 카일 바로 옆에 와서 수평선을 살핀다.

“어…. 확실히, 뭔가… 있네요? 저게 뭐지?”

일단 배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런데, 당연히 자리하고 있어야 할 돛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배의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시커먼 연기들이었다.

‘…잠깐만.’

저게 당최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의 엘가와 티샤를 두고서.

카일은 속으로 어? 하고 탄식을 흘리곤 다시 한 번 저 물체를 자세히 살폈다.

‘저거… 혹시, 기선이야?’

이게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야. 라고 생각할 무렵.

이번에는 저쪽 갑판에서 아앗! 하고 성녀의 감탄이 터져 나온다.

“카일 형제님! 저기, 저기 사람이 날아다녀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사람이 날아다닌다니.

근처에 마법사라도 있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비행 마법은 굉장한 고난이도 마법인데?

급히 성녀 쪽으로 달려간 카일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정말로 하늘 위에, 사람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날고 있는 게 보였다.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게 꼭 비행 슈트라도 입은 것 같다.

희미하게나마 마력이 느껴지는 것이 비행 원천이 마석일 수도 있겠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도대체.’

로맨스 판타지. 그래서 이곳 세상은 순수 판타지 그 자체였다면.

아무래도 갑작스레 등장한 저들은, 판타지에 과학이 접목된 이들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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