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이쪽 제국 분들의 자비를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고국마저 등지고 떠난 이들입니다. 아주 작은 자비만 베풀어주신다면, 결코 해가 되지 않도록 할 겁니다.”
망명을 청하는 이들이 간절한 어조로 제국 특사를 설득한다.
이대로 제국이 자신들의 신병을 인도하면, 남는 건 오직 죽음 뿐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놈들이 자신을 가만히 두려 하겠는가?
이전 정책들의 실패를 전부 이쪽 탓으로 몰아서 정리하려 할 것이다.
덤으로 왕실의 마지막 혈통까지도 전부 끊을 것이고 말이다.
“으음.”
제국 특사가 난처하다는 기색으로 볼을 긁적거린다.
그 속내를 읽은 것인지 추격대 대장, 가이가 나선다.
“이쪽 대륙 분들께는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국의 변절자들이 이곳까지 도망치는 바람에 부득이 병력을 이끌고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급박한 상황이라 오판한 아국이 무례를 저지르기까지 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건 맞다는 듯 제국 특사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우연히 이곳에 건국절 연휴를 보내기 위해 와있던 리토리오 대공가의 공녀.
그녀가 증언하기를 저 추적대가 먼저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다행히도 일행 중에는 카일 존 나센이 있었다.
그렇다. 그 카일 존 나센. 맨손으로 서쪽, 남쪽, 동쪽을 평정한 청년.
그 무시무시한 존 나센 가문의 막내이자 가족들의 사랑을 받는 인물.
황실 특사는 당연히 황실 직속 봉신 중 하나이다.
따라서 황실에서 도는 소식을 빠르게, 그리고 비밀리에 들을 수 있다.
딱히 타인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존 나센.
하지만 막내에게는 왜인지 모르게 많은 신경을 쓴다고 했다.
즉, 카일을 건드리면 존 나센 전체를 적대한다는 것인데.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정말 어지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제국과 황실은 무조건적으로 카일의 말과 행동을 지지할 것이다.
즉, 이번 카일의 선공 부분은 제국이 전적으로 나서서 방어해야 한다는 뜻.
“당연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먼 곳에서 온 손님이여. 그대들이 공격을 하려고 했던 곳에는 우리 제국의 차기 대공과 존 나센 남작가의 자제 분이 승선해있었으니 말입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여, 이런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 망명자들을 내어주신다면 최대한 빠르게 이 땅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 제국이 자비를 베풀겠다고 한다면?”
“저희에게는 당장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국이 안정화되면 반드시 이번 일을 짚고 넘어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제국 특사가 하! 하고 가소롭다는 웃음을 흘린다.
“지금 제국을 협박하는 겁니까?”
“아뇨.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희 또한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어차피 숙청당할 몸입니다. 해서 더더욱 냉정하게 현 상황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가이의 말에 제국 특사는 끄응, 하고 침음을 내뱉었다.
당장 이웃한 나라도 아니고 바다 건너 아주 먼 세상이다.
그곳에서 찾아온 망명자들로 인해 제국의 안정에 위협을 받는다면.
당연히 제국으로서는 그 여지를 없애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망명자들은 받아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저들은 망명자를 받지 못 할 시 어떤 식으로든 다시 찾아올 것이다.
‘공녀님의 말씀에 따르면 처음 보는 병기와 배를 지녔다고 했었다.’
받아들이기 싫은 부분이지만, 기술 부분으로는 저들이 우위에 있다.
당장 카일이 직접 나포했다는 배만 봐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저 큰 배에 마스트가 없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바람을 받지 못 한 채 어떻게 노만 저어서 움직일 수 있다는 건지.
하지만 저들은 마력석이라는 걸 이용하여 그걸 해결했다.
이 땅에는 전혀 나지 않는 자원이 저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제국의 열세가 바로 드러난다.
그 상대들이 이번 일에 반감을 품고 대규모로 쳐들어 온다면.
아무리 방어자의 입장이 유리하다고 해도 제국 입장에서 퍽 난감해질 수 있다.
‘망명자를 받아들이는 건 이래서 조심스러운 일이다.’
워낙 중대한 사안이니만큼 황제에게 다시 상황을 알려야 할 듯 싶다.
어지간하면 특사 선에서 결정을 할 수 있지만 이번 일은 다르니까.
“….”
제국 측 특사가 침묵하니 파르달 섬 영주가 슬쩍 나선다.
“그대들이 그냥 찾아와서 부탁을 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먼저 적대적 행위를 했다면 제국 입장에서도 자존심이 있으니 쉽게 넘어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은근히 제국 편을 들어주면서 뭐라도 어떻게 해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가이 입장에서도 난처한 게, 뭐 협상을 걸어볼 게 하나도 없다.
제국 쪽을 무력으로 진압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역으로 밀렸다.
당장 자신들 배는 한 달 넘게 수리를 해야 할 정도로 망가졌다.
더군다나 마력석들까지 망가져서 돌아갈 때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그것도 문제.
‘그래도,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지 않으면 가족들이 전부….’
가이는 그렇게 생각하니 답이 보이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마력석이 없다면 가동이 불가능한 것들이 있지 않은가.
“사죄의 의미 겸 아국 배에 실린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마법 대포와 비행 슈트까지 말입니다. 아국의 최고 기술이 집약된 것으로 제국에 결코 무의미한 선물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마법 대포, 그리고 비행 슈트.
전부 처음 듣는 단어에 제국 특사도, 파르달 섬 영주도 놀란 얼굴이 되었다.
마력석이라는 것도 처음 듣는데, 거기에 대포에 슈트까지.
제국에서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단어들이었다.
“물론 슈트는 제국이 지닌 것에 비해선 초기 형태에 불과하지만, 부디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제국이 지닌 슈트라니요.”
특사가 이건 또 무슨 소리냐며 가이를 바라본다.
그러자 가이는 당연한 걸 묻고 있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국 배로 들어온 그 남자 말입니다. 거의 옷과 동일한 슈트를 입고 있던 게 아닙니까?”
“…그런 물건은 제국에 존재하지도 않습니다만.”
“예? 아니, 아. 기밀이라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기밀이고 뭐고를 떠나서 그딴 게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특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도 가이는 두 눈만 껌뻑거렸다.
“대체 사람이 어떻게 맨몸으로 강철 외벽에 구멍을 뚫는단 말입니까.”
“그거 가능하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합니까, 진짜.”
대답은 막 열린 회의실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카일이 모습을 드러내자 제국 특사와 파르달 섬 영주가 동시에 일어선다.
어찌나 다급하게 일어서는지, 누가 보면 상관이라도 온 줄 알 정도다.
“카일님.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일 존 나센.”
“파르달 섬 영주님은 오랜만이고, 특사 분은 고생이 많으시고, 거기 당신은.”
가이의 앞으로 걸어간 카일은 굉장히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대체 아까부터 이것들은 슈트인지 뭔지 자꾸 언급을 하고 있다.
그걸 입지 않고서 어떻게 사람이 그런 위용을 내뿜을 수 있냐고.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 왜 사람이 그걸 못 할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다. 그럴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다.
그리고 단 한 번이라도 간절한 마음속에서 단련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
“슈트인지 뭔지, 받을 생각 없습니다.”
“예?”
“그렇지 않습니까, 특사님? 슈트인지 뭔지, 제국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분명 제국 대표는 저 특사인데, 갑자기 나타난 청년이 그 특사를 압박하고 있다.
황자도 아니고, 일개 귀족으로 보이는 자가 저래도 되는가 싶은데.
“역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께는 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히려 특사가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그 말을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 당신. 자꾸 슈트, 슈트 소리를 하는데 상당히 불쾌합니다.”
“예? 아,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왜 자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슈트에 빌리려고 하는 건데요.”
카일이 손짓을 하자 이안이 고개를 끄덕거리곤 뭔가를 가지고 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들이 가지고 오는 게 바다에 가라앉았던 2호기 슈트임을 깨달았다.
안에 타고 있던 비행병까지 실종되었는데, 대체 저걸 어떻게 건졌단 말인가?
“저건… 저걸, 대체 어떻게?”
“내가 건졌습니다.”
“무게가 상당할 터인데, 이곳에 혹시 슈트 구난 장치라도 있습니까?”
“내 손으로 직접 건졌는데요.”
당당히 말한 카일은 이안이 끙끙거리며 가져온 슈트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걸 한 번 꾸욱, 누르니 와직! 하고 슈트가 뭉개진다.
“이렇게 부실해서 뭘 할 수 있다고.”
차라리 마력 증폭제가 나을 지경이다. 이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슈트를 입어야만 강해진다면 차라리 안 입는 게 나을 지경이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광경만으로도 가이 입장에서는 충격과 공포.
마법 대포조차 견딜 수 있는 비행 슈트가, 사람 악력에 뭉개지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영주님!”
한데 더 충격적인 건 그 다음 일어났다.
“근처 섬들에서 급보가 전해졌습니다. 수평선 너머로 저들이 타고 온 배와 비슷한 선박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보고에 모두가 난리가 났다.
일단 망명자 쪽은 추격대가 더 있다는 사실에 기절초풍을 하고.
제국과 남쪽 섬들 측은 대대적인 공격이라도 되는 건가 걱정을 하고.
마지막으로 가이 쪽은 자신들도 모르는 추격대에 당황한 것.
“…이안.”
그 사이에서 여전히 무덤덤한 건, 역시나 카일이었다.
“그, 챙긴 짐에서 존 나센에서 보낸 봉 있죠.”
“있긴 하지. 그런데, 왜?”
“새로 보내달라고 할 테니까 좀 빌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