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 끝났다! 드디어, 드디어 끝이 났어!’
강의실을 나서면서, 엘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드디어 오늘로서 길고 길었던 기말고사가 모두 끝이 났다.
참으로, 참으로 힘들고 지루했던. 이득이랄 것도 거의 없는 싸움이었다.
평민 학생들처럼 시험 성적에 따라 장학금을 받느냐, 안 받느냐도 아니고.
혹은 나중의 제국 공무원 시험 때 추가 점수가 될 우수 학생이 될 것도 아니고.
어차피 대공가의 후계자이니 졸업 후엔 그냥 대공 후계 수업만 받으면 끝.
그렇기에 딱히 시험을 잘 치를 이유도, 완벽한 학생 생활을 할 이유도 없다.
다만 문제는, 그런 식이라면 제국 귀족들의 ‘명예’ 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네가 알아서 잘 하겠다만, 그래도 말해두마. 네 오빠와는 다른 아카데미 생활을 보여라.”
제국에 단 셋뿐인 대공가의 후계자다.
언젠가 그 대공 자리에 앉을 미래의 여주인이다.
그런 사람이, 아카데미 생활을 엉망진창으로 한다?
심지어 시험에선 매번 하위권만 맴돌다가 졸업을 했다?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다. 말 그대로 ‘개망신’ 이다.
당장 평민 학생들도 이를 악물고 1, 2등을 하려고 애쓰는 판국인데.
모든 귀족들의 정점인 대공가가 그 평민 학생들에게 처참히 패배할 수는 없는 노릇.
설령 1등 자리는 뺏기더라도 그 근처에는 있어야 한다.
무조건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대공가의 명예는 지켜야만 했다.
‘덕분에 후계자 교육에, 소가주 업무에, 시험공부까지. 정말 죽을 뻔 했어.’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매일 새벽까지 시달렸다.
그나마 기본 체력이 받쳐주어서, 틈틈이 체력 단련을 해두어서.
그 힘으로 버틴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과로로 탈진했을 것이다.
‘대체 아버지께선 이런 과정을 어떻게 밟아 오신 거지.’
가문의 사용인들 이야기에 따르면, 그나마 엘가 같은 경우는 많이 줄어든 케이스란다.
전대 가주. 그러니까 엘가의 부친 경우만 해도 지금의 세 배는 더 업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서류만 보면 기절할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버틴 건지, 희대의 의문이었다.
아무튼, 오늘로서 그 고통스러운 일정 중 하나가 끝이 났다.
물론 후계자 교육과 소가주 업무는 그대로이지만, 그래도 시험이 없는 게 어딘가.
“엘가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엘가가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조금 전 막 강의실을 나섰던 티샤가 서있었다.
“시험은 잘 보셨나요?”
“다행스럽게도, 그런 것 같네요. 조금 힘들긴 했지만.”
“고생 많으셨어요.”
티샤의 말에 엘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번 1등도 눈앞의 저 여인이지 않을까 싶다.
본인 스스로 영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공부하는 머리는 저쪽이 더 위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리토리오 대공가의 특징답게, 상대방의 강점을 금방 파악한다.
그런 엘가가 보기에 티샤는 학문 관련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이해하고, 더 파고들고, 항상 궁금해 하는 자세가 최고 강점이다.
평소에는 조신하다가도 중요한 순간에는 저돌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니 바이엔 대공도 무언가 냄새를 맡고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것일 터.
‘솔직히 조금은 질투도 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니 후회도 없다.
서로가 지닌 강점이 있는 법이다. 그걸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이용해야 한다.
부족한 부분을 서로가 메워주고 손을 잡아 함께 이득을 취하는 것.
그게 리토리오가 대공 가문으로서 정적 하나 두지 않은 비결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티샤도 자신만큼이나 고생 중이라는 걸 알고 있다.
본인은 후계 교육과 소가주 업무. 티샤는 황실과 대공가의 지원을 받는 주술 연구.
둘 모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른 듯 하면서도 또 굉장히 비슷한 구석이 많다.
해서 묘하게 경쟁심을 느끼면서도, 또 둘은 서로를 잘 이해하는 사이였다.
“다른 학생들은 이제 다들 여유가 생겼다고 하는데, 우리는 아니겠죠?”
“아… 네. 실은, 이렇다 할 진전이 없어서 좀 답답해요.”
“마법도 순식간에 모든 원리가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주술도 그렇겠죠.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해요. 황실이 설마 그런 중요한 것에 대해 재촉을 할까 봐요.”
“하지만 부담이 좀 심해서요. 한쪽은 황실, 다른 한쪽은 대공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뒤에는 카일이 있잖아요. 그리고 그 뒤에는 존 나센이 있고.
라는 말이 엘가의 입 바로 안에까지 머물렀으나 그녀는 그걸 참아냈다.
혼자서 모든 걸 이루어가는 사람 앞에서, 뒷배 이야기는 썩 유쾌하지 않겠지.
어차피 자신도, 티샤도 카일과 이어지는 건 기정사실이라지만.
결코 그런 목적을 가지고서 미래를 꿈꾸고 약속한 것은 절대 아니니까.
“아무튼, 1년 동안 고생 많았어요, 티샤.”
“엘가님도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시간이 금방 흘렀는지.”
“내 말이요. 문득 드는 생각인데, 너무 허무하다 싶어요.”
분명 엄청나게 바쁜 1년이었는데, 모든 게 바뀐 너무나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이렇게 지나고 가서 뒤돌아보면 허무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오늘도 바로 연구실로 가는 건가요?”
“네. 요 며칠 좀 쉬었거든요. 재충전했으니 이제 또 열심히 일해야죠!”
“아쉽네요. 마침 오늘 파티가 있어서, 당신과 함께 갈까 했는데.”
“저를요? 카일은 어쩌고 왜 저를….”
“아, 그게요. 음….”
잠깐 침음을 흘리던 엘가는 솔직하게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물론 본인도 카일과 함께 파티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카일은 그런 자리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굉장히 싫어한다.
이미 몇 번이나 반 강제로 데려갔던 적도 있어서, 이제는 미안할 지경이다.
그리고 본인이 데려가면, 꼭 남들에게 이것 보라고 자랑하는 느낌도 든다.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이 사람과 진심으로 사랑해서 이어지고 싶은 것인데.
다른 이들이 보기엔 이득을 취할 게 있어서 그러는 걸로 보일까, 그게 걱정이다.
완벽한 힘의 균형을 이루는 세 개의 대공가.
그 중에서 조금이라도 더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카드로서.
존 나센을 택하고 오로지 이득만을 위한 셈법으로 말이다.
이상이, 엘가가 티샤에게 털어놓은 이유들이었다.
“…굉장히, 복잡한 이유네요. 저 같은 평민으로선 살짝 어렵군요.”
“여기서 평민 이야기가 왜 나와요. 그리고 내가 보기에 당신도 조만간 작위를 얻을 것 같은데. 설마 황제 폐하께서 주술 연구의 선구자를 평민으로 두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엘가님도 머리가 아프시겠네요.”
두 사람의 대화는 이후로 조금 더 이어졌다.
*
아카데미의 모든 공식적인 일정이 끝나고, 마음 놓고 참여한 파티.
누군가는 혼자서, 누군가는 친구와 함께, 또 누군가는 파트너를 대동한다.
어떻게 오든 그건 본인의 선택이다. 누구도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엘가 같은 경우에는 살짝 미묘하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카일과 대놓고 같이 다니는 게 몇 번이나 포착되었다.
그리고 존 나센도 세 개의 대공가 중 리토리오와 특히 친한 모습을 보였다.
해서 귀족들에게 엘가와 카일의 관계는 공공연한 것이 된 상황.
덕분에 썩 유쾌하지 못 한 말들도 조금씩 돌아다녔다.
리토리오가 존 나센의 힘을 업고서 도약하려 하는 건 아니냐는.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대공가가 더 큰 권력에 욕심을 내는 게 아닐까, 하고.
당연히 리토리오 대공가는 매우 불쾌하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할 말이 있고 하지 않을 말이 있는 법인데, 심지어 그 대상이 대공가인데.
하지만 엘가는 너무 과한 반응은 보이지 말자는 뜻을 내놓았다.
충분히 그리 오해할 만도 하고 어차피 시간이 가면 다 잊을 것이라고.
나중으로 가면 오히려 부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라고 말이다.
아무튼, 오늘 이 자리에는 엘가 혼자서 왔다.
저들이 당연히 생각하던 파트너, 카일 없이.
그러면 저기 있는 귀족들은 또 어떻게 생각하느냐?
‘뻔해. 혹시 나와 카일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하겠지.’
아마도 입들이 근질근질할 거야? 상대가 대공가이니 눈치를 보는 것 뿐이지.
속으로 한숨을 내뱉은 엘가는 그냥 잔만 비워낼 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오지 말 걸 그랬나?’
이젠 정식으로 후계자도 되었으니 외부 활동을 이전과 같이 할 필요는 없다.
다음부터는 그냥 적당하게 얼굴만 비추고 나가야지, 라고 생각하며.
엘가가 다시 한 번 잔으로 손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웬 과음이랍니까. 적당히 마셔요.”
“…카일?”
두 눈을 의심했다. 전혀 예상치 못 한 인물이 나타났으니까.
이런 자리는 시끄러워서, 시간만 아까워서, 차라리 운동을 하겠다고 해서.
그 이유들로 절대 오지 않을 거라고 여겼던 카일이 바로 옆에 서있었다.
“뭐, 뭐예요? 당신이 왜 여기에….”
“왜요. 제가 뭐 못 올 곳이라도 왔습니까?”
카일의 그 물음에 엘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릴 뻔 했다.
이런 파티 자리를 누구보다 싫어하는 당신을 아는데.
운동 시간이랑 겹친다고 질색을 하던 모습까지 기억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에?”
갑작스러운 대답에 당황한 엘가가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카일이 제 손가락으로 엘가의 입술을 슬며시 막아버린다.
그리곤 다른 손으로 귀족들이 서있는 곳을 가리킨다.
“…아아.”
그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알아차린 엘가였다.
엘가 본인이 카일과 함께 왔다면 이득 관계를 위한 거라고 떠들 사람들인데.
카일의 그 한 마디에 로맨스 소설을 보는 독자들이 되어버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