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은 카일이 시킨 대로 최대한 노력했다.
일단 넬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평소처럼 하는 건 유지한다.
하지만 정말로 평소처럼만 하는 것은 또 절대 아니다.
그 평범함 속에서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변화를 준다.
이를테면 지나가듯 던져주는 부드러운 목소리처럼.
‘연애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거였다니.’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자신감이 급락하는 이안이었다.
카일이 하는 것만 보면 연애라는 건 정말 쉬워 보이는데.
정작 진짜 자신이 해보니 조심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데 무조건 하라니 답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안이 무엇보다 힘든 건 따로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레토에게서 느끼는 묘한 경쟁심과 적의.
“그리고 이 시기에, 어떤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까?”
“제국 대법전이 만들어져서 정식으로 반포되었다고 했습니다.”
“좋아요. 아주 잘 했습니다, 넬.”
저렇게 칭찬을 하거나, 그냥 이름만 부르는 것조차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든다.
넬도, 그리고 레토도. 딱히 이렇다 할 생각을 지니고 한 게 아닐 텐데.
그냥 저러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히 불편하고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해하고 싶다.’
문득 이런 생각까지 들자 이안은 스스로에게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하다하다 이런 마음까지 지니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이안은 이건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방해라니. 아무리 그래도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지금 레토는 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넬은, 귀족으로서 돌아가기 위한 첫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
그걸 방해한다니.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법이다.
이것은 마치 검술을 갈고닦는 이를 방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경우가 아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는 것이다.
‘참자. 참아야 해. 이런 걸로 흔들리면 안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서, 오늘의 수업은 끝이 났다.
오늘처럼만 한다면 부족한 부분은 빠른 시일 내에 전부 채울 수 있을 거라고.
그리 말하는 레토에게 웃어주는 넬을 보자니 이안은 절로 침음을 흘렸다.
나도 넬을, 저렇게 웃게 해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속으로 참 아쉽다고 생각하며 이안은 걸음을 옮겼다.
“이안님!”
저 뒤에서 갑작스레 넬이 달려와선 자신을 붙잡기 전까지 말이다.
“넬?”
“아까 제대로 말씀을 못 드린 것 같아서. 같이 공부를 하게 되어 좋습니다!”
“아… 그, 그래?”
“네. 실은, 저 혼자 하는 게 레토님께 죄송했습니다. 그 분도 하실 일이 있는데 저 하나 때문에 희생하시는 것 같아 불편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안님께서 이렇게 같이 와주시니 부담감도 적어지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분과 같이 학업에 더 박차를 가한다는 게 좋습니다.”
다른 건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좋다는, 그 말 한 마디만 이안의 귀에 박히고 또 박혔다.
한 번에 기분이 좋아진 이안은 바로 카일에게로 달려갔다.
그렇지 않아도 레토의 개인 과외가 끝나면 바로 오라고 했는데.
이 소식까지 같이 전한다면 분명 같이 기뻐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아유, 이 화상아. 진짜.”
하지만 돌아온 건, 카일의 무시무시한 등짝 스매싱이었다.
그것도 한 대가 아니라 여러 대에, 강도도 엄청나게 강하게 말이다.
“억! 왜, 왜 이러냐. 카일! 조, 좋은 거 아닌가?!”
“그딴 거에 두근거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요. 그리고 좋다는 게 당신 좋아서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냥 하는 말일 수도 있다고요. 지금 넬도 다 알고 있어요. 본인 두고 이안, 당신이랑 레토랑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거.”
그러니까, 제발. 좀 이상한 거에 풀어지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넬의 마음을 살 방법 좀 고민하라고.
진짜 나중에 ‘내가 더 좋아했는데.’ 라는 미래 보기 전에!
카일의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말에 이안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련 부분에서도 엄하고 무서운 카일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부드러운 면모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아예 존 나센 남작 수준으로 빙의해선 쉴 새 없이 몰아붙인다.
“후우우….”
겨우 카일에게서 벗어난 이안은 터덜터덜 걸음을 떼었다.
레토에게 넬을 내어준다는 건 정말 상상도 하기 싫고.
그러자니 레토와 친하게 지낸 시간만 1년이 가까이 다 되어서.
이제 와서 적으로서 규정하고 대하긴 또 그렇다.
연신 한숨만 푹푹 쉬며 길을 걷고 있는 와중인데.
“이안 형제님?”
저 앞에서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성녀님.”
눈치가 없는 이안도 이제는 다 알고 있다.
성녀는 나중에 카일과 연을 맺고 미래를 함께 할 것임을.
그 정도로 이들의 사이는 이제 공공연히 다 알려졌다.
때문에 더더욱 성녀를 대하는 데에 조심스럽다.
원래도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움이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그 카일의 연인. 그 존 나센의 미래의 며느리 아닌가.
실수 한 번 했다간 존 나센을 몇 번이나 맞이할지 모른다.
그런 연유로 이안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성녀를 대했다.
“어디 가십니까?”
“아, 네. 도서관에 좀 가보고 싶어서요.”
“도서관이라면… 이쪽 방향이 아닌데.”
“앗. 혹시 제가 잘못 온 걸까요?”
그냥 잘못 온 수준도 아니고 아예 반대로 왔다.
이쪽으로 가면 도서관 근처는커녕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녀가 상상 그 이상으로 길치라는데.
아무래도 그 말이 단순한 소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서관은 이쪽으로 해서….”
옳은 방향을 가르쳐주려던 이안은, 생각을 바꾸었다.
어차피 본인도 그 방향으로 가는 길이니 같이 가면 될 듯 해서.
이러다가 또 길을 잃으면 성녀에게 좋지 않은 일이니까.
“같이 가시죠. 저도 그 방향으로 가는 중입니다.”
“그런가요? 친절하셔라. 역시 이안 형제님은 좋은 분이시군요.”
좋은 분. 그 말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바로 방금 전에 카일한테 엄청 혼났던 순간이 떠오른 것이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그 한숨 소리를 성녀가 들은 모양이다.
살짝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사정을 묻는 성녀.
그에 이안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으음.”
하지만 상대는 성녀다. 눈치가 없는 인물이 아니다.
무엇보다, 바로 지금과 같이. 인물들이 고민을 품을 때 조언을 하던 캐릭터였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시는 분의 얼굴이 아닌데요.”
“정말 괜찮습니다. 저는….”
“안 되겠네요.”
갑자기 걸음을 멈춘 성녀가 옆의 벤치로 향한다.
그리고는 거기에 엉덩이를 붙이더니 제 옆을 툭툭 두드린다.
마치 이안더러 군말 말고 얼른 옆에 앉으라는 듯이.
항상 착하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모습만 보이던 성녀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나 단호한 모습을 보였던 적이 있나?
이안은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한 번도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얼른 앉으세요, 형제님.”
“…예. 성녀님.”
해서, 이안은 얌전히 성녀의 옆에 앉기로 했다.
“자. 말해보세요. 무엇이 우리 이안 형제님을 이렇게 힘들게 하나요?”
사실 성녀 입장에선 이안을 꼭 도와주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성녀가 보기에, 이안은 카일의 친한 벗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알게 모르게 계속 챙기고, 존 나센에도 데려가고.
같이 운동을 하며 땀을 흘리는, 그런 사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언젠가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누군가의 마음을 가지고 싶다면, 먼저 그 주변부터 공략하라고.
자신에 대한 좋은 평가는 상대방 본인이 내주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 주변 인물들이 해주는 경우도 있다고 말이다.
“…실은, 말입니다. 제가, 고민이 좀 있습니다.”
“그래 보여요. 형제님의 얼굴에 고민이 아주 가득하죠. 더 말씀해보세요.”
성녀의 재촉에 이안은 천천히, 하지만 전부를 털어놓았다.
자신이 넬을 좋아하는 것부터, 그건 레토도 마찬가지인 것을.
그러니까 본인과 레토는 이제 연적이 된 건데 또 적이 되는 건 싫다.
하지만 넬을 포기하는 건 더더욱 싫다. 그래서 굉장히 힘들다.
더해서, 넬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그것도 너무 어렵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나도 레토처럼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데 그걸 못 하겠다.
“그렇군요. 굉장히 힘드셨겠어요.”
이안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아주 집중해서 들은 성녀.
그녀가 가장 먼저 꺼낸 대답은 조언이나 질문이 아닌.
고생했다는 말. 이안을 위로해주는 한 마디였다.
“…으으음.”
이후, 성녀는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을 이안 형제님께 드리기, 굉장히 죄송하네요. 하지만 첫 번째 부분에 대해선 냉정한 대답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한답니다.”
후우. 숨을 내뱉은 성녀가 갑자기 이안의 손등을 찰싹! 때린다.
“엇. 성녀님?”
“그렇게 헛갈려하는 자세야말로, 넬 자매님께도. 그리고 레토 형제님께도 모두 미안한 일이랍니다. 마음을 정하셔야죠. 그래서 포기를 하든. 아니면 경쟁을 하든 하셔야 한답니다. 이도저도 아니면 이안 형제님 본인만 상처를 입을 뿐이에요.”
“…그렇습니까.”
성녀의 말에 이안을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자신이 생각해도 이런 어중간한 마음은 전혀 득이 될 게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넬 자매님을 대하는 게 고민이라면, 가장 먼저 이안 형제님이 가장 자신이 있는 걸 떠올려보세요.”
“제가 자신 있는 것… 말입니까?”
“네. 형제님께서 자신이 있는 건 뭔가요?”
“일단… 검술이긴 합니다만.”
“그렇군요. 그러면, 넬 자매님께 가장 중요한 건 뭐죠?”
“기사를 꿈꾸고 있으니 당연히 검술….”
라고 대답하던 이안이, 순간 ‘어?’ 하고 탄식을 흘린다.
요 근래 너무 레토와 넬의 관계에만 신경을 써서였을까.
가장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형제님은 최고의 선택지를 지니고 계시네요.”
“그, 그렇군요.”
“평소처럼 대하라. 그건, 아마도 이안 형제님이 지닌 최고로 강하고, 최고로 멋진 순간을 보여주라는 뜻 아니었을까요? 넬 자매님께선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이안 형제님의 모습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여기실 거라고, 저는 생각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