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71화 (271/318)

한 학년을 마치는 종업식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이제 내일만 지나면 겨울 방학을 맞이한다. 1학년이 끝나는 것이다.

‘참 다사다난한 1년이었지. 이렇게 길 줄은 몰랐어.’

그리 생각하던 카일은 뭔가를 생각하곤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된 게 아카데미에서 생활한 것보다, 그 바깥에서 있던 일들이 더 기억이 난다.

서쪽으로 가서 왕국 연합의 약쟁이들을 잘근잘근 밟아놓은 것부터.

그 약쟁이들이 튀었다는 남쪽 독립 영주들을 찾아가 친 제국화 시켜놓고.

이후에는 동쪽까지 가서 유목 부족들을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했다.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기억? 글쎄. 해봤자 강의 들은 거랑.

또 꼽자면 아마도 아주 커다란 규모의 헬스장을 만든 것 정도일까.

‘이쯤 되면 학생으로 온 건지 아니면 용병으로 온 건지 헛갈릴 지경인데.’

헛웃음을 흘린 카일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면 자신의 생각보다는 좋은 거라고 여겼다.

최소한 레아처럼 아카데미를 때려 부숴서 쫓겨나지는 않았으니까.

“카일.”

저 앞쪽에서, 얼굴이 반쪽이 된 엘가가 힘없이 인사를 건넨다.

요즘 들어 점점 더 많은 업무가 들어오다 보니 정말 혼이 다 나간 모양이었다.

당장 축 처질 듯 내려온 다크 서클부터 대공 자리는 절대 좋은 게 아님을.

한 번 맡는 순간 절대 탈출할 수 없는 지옥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엘가 님.”

“조금은요.”

“조금?”

“…솔직히, 좀 많이 힘들어요. 그래도, 카일 덕분에 버티고 있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대답이었다.

서류만 봐도 이젠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지긋지긋하다.

그 상황에서 버틸 수 있는 건 ‘체력’ 이 뒷받침 되어서다.

만약 체력이 입학 당시와 비슷했다면 진작 아웃이었다.

“요즘 들어서, 왜 우리 리토리오가 알게 모르게 무武 에 힘을 썼는지 알 것 같아요.”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죠. 진짜… 뭘 하든. 결국 몸이 따라주어야 되는 것 같아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기지개를 켜는 엘가.

그러다 말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슬쩍 귓속말을 한다.

“혹시 말이에요. 레토한테 무슨 도움이라도 주었어요? 그게 아니라면 협박을 했나?”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카일의 반문에 엘가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답했다.

“얼마 전부터 갑자기 검술에 엄청 매진을 하더라고요. 본인은 아무래도 검술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한동안 검을 내려놓았던 레토였는데 말이죠.”

“…제가 봉을 잡으라고 협박한 적은 있어도 검을 잡으라고 협박한 적은 없습니다.”

애당초 ‘검술’ 에 대해서는 카일 본인도 문외한이다.

검을 휘두를 수 있게 해주는 신체 구성이라면 또 모를까.

“그래요? 이상하네. 갑자기 얼마 전부터 진짜 열심히 하던데.”

“전 오히려 엘가님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레토한테 무슨 큰 도움이라도 주었냐고.”

“내가요? 글쎄요. 그냥 넬에게 학업 관련 도움을 주라고 한 게 전부인데요.”

그게 전부라고 보기엔, 레토의 기분이 요즘 굉장히 좋아보였단 말이지.

카일이 레토의 표정을 떠올리며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카일. 엘가 님.”

반대편에서 굉장히 화사한 얼굴을 한 티샤가 다가왔다.

퀭한 엘가와는 굉장히 대조되는 부분이라고 할까.

“…뭐예요. 왜 티샤는 멀쩡해 보여요?”

“네? 저요? 어, 오늘도 밤새고 나온 건데.”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멀쩡해 보이는데요.”

엘가의 물음에 티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아마도 밤새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보다.’ 라고 답했다.

“맞아. 카일. 혹시 이안한테 무슨 일 있나요?”

“에?”

“아까 오는 길에 잠깐 봤는데, 표정이 엄청 좋아 보이던데.”

“어… 글쎄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대로 영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래요? 이상하네. 저는 당연히 카일이 무언가 도움을 주어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 말에 카일, 티샤, 그리고 엘가. 이 셋이 서로를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분명히 서로 응원하고 또 밀어주고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한데.

이상하게도 그 대상자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변화를 맞이했다?

“일단 서로가 넬하고 무슨 진전이 있어서 그러는 건 맞는 듯 한데요.”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고.”

미행이라도 한 번 해볼까요? 하고 묻는 엘가.

하지만 카일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가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잠시 이안과 레토, 그리고 넬에 대해서 더 대화를 나누던 남녀는 화제를 바꾸었다.

“소식 들으셨죠? 이번 종업식 때 5황녀님이 오신다는 거.”

“그래서 놀랐죠.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는 분이 대뜸 축하사라니.”

“왜요. 다음에는 2학년 종업식 때도 오실 텐데 말이죠.”

장난스러운 엘가의 말에 카일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자신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지.

다행이라면 1학기, 2학기 나누어서 종업식 안 하는 것 정도일까.

제국의 황녀가 이리 가벼우면 안 되는 법인데.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 찾아오는 거라지만, 그게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명색이 황녀인데 그녀의 고귀한 모습은 있는 게 좋지 않을까.

“무슨 생각하는지 대충 보이는데, 포기하세요. 카일.”

그런 카일의 걱정을, 엘가는 단박에 깨부쉈다.

“황녀님 스타일 아시잖아요. 카일을 위하는 거라면 황녀 자리도 때려치울 분이세요.”

“제발 부탁인데 그런 무서운 말 좀 하지 마요. 벌써부터 무섭네.”

그랬다가 황제가 찾아와서 황녀 좀 말려보라고 할까 겁난다.

딱히 황실을 겁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황제이지 않은가.

혹시나 ‘기어코 황제까지 무릎 꿇게 만든 존 나센’ 타이틀은 얻고 싶지 않다.

겨우 되찾은 존 나센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이 죄다 사라질 수도 있으니.

부디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카일이 다른 화제를 꺼낸다.

“둘 다 알고 있죠? 이번 방학 때.”

“저야 이미 주술 연구 쪽은 얼추 마무리를 해서요. 한동안은 여유로워요.”

“…부럽네요. 나는 아무리 없애고 없애도 끝이 안 보이는데.”

둘 모두 자신의 할 일에 충실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일단 티샤에게는 어찌 되었든 끝이라는 게 보이고 있었고.

무엇보다 얼마 전 황제에게 결계 주술의 완성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에 황제가 아주 흡족해하며 박수를 쳐준 것이나.

연신 감탄하며 직접 ‘마법에 충분히 견줄 수 있다.’ 라고 언급한 부분.

덕분에 주술에 대한 입지가 공식적으로 안정화되었다.

이제부터는 정말 본격적으로 주술 붐이 일 준비가 되었다는 뜻.

따라서 티샤는 슬슬 나타나 줄 후배를 기다리면 되었다.

하지만 엘가는 오히려 본인이 일종의 후배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차기 대공 준비를 했다곤 하지만.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면서 해야 할 일이 몇 배로 늘었다.

비교가 안 되는 건 당연하다.

가신들이 있다고 하지만 대공 스스로의 능력 또한 매우 중요하다.

아무리 가신들이 뛰어나도 대공의 능력이 떨어진다면.

가신들에게 끌려 다니는, 그저 결재 도장만 찍는 이가 될 수도 있다.

“그건 걱정하지 마요. 그저 부모님께서 얼굴 좀 보고 싶어 하는 거고, 전하실 말씀도 있고 하다니까. 저번처럼 길게 붙잡는 건 아니니 걱정할 거 없어요. 상황 설명도 다 해두었고.”

각자의 삶이라는 게 있다. 자신이 존 나센이라고 하여 남도 존 나센이 아니다.

누군가는 주술 연구를, 누군가는 차기 대공직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걸 알기에 이쪽에서도 일주일 정도만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 저기. 넬 아닌가요?”

“그러네요. 저쪽에서는 이안에, 그 반대편에서는 레토 등장이고요.”

“잠깐만. 이거 굉장히 긴장되는 순간 아닌가 싶은데.”

한 여자를 둔 두 남자의 조우라니.

심지어 그걸 바로 앞에서 보게 될 줄은!

카일도, 티샤도, 그리고 엘가도.

모두가 걱정을 하면서도 막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짓는 찰나였다.

“형제자매님들? 뭐하고 계신 건가요?”

뒤쪽에서 나타난 성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들 옆으로 다가선다.

그리곤 똑같이 시선을 옮겨, 이내 이안과 레토. 그리고 넬을 바라보게 되었다.

“아하.”

“성녀님?”

걱정과 긴장, 그리고 흥미로움을 지닌 세 남녀와는 다르게.

성녀의 얼굴에는 그저 잔잔한 웃음만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티샤와 엘가가 무언가 있다는 걸 찾아냈다.

성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실은 저 두 형제분이 최근에 고민거리를 털어놓으신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저는 그에 대해서 성심성의껏 대답을 했고 말이죠. 크게 도움이 되었을까 했는데, 그래도 웃고 계시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작게 박수를 치는 성녀.

그녀를 바라보며 카일은 ‘역시, 성녀님이었군.’ 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해보니, 원래의 주인공들이 헤맬 때도 성녀가 도와주었으니까.

이후 티샤와 엘가도 상황을 얼추 알아낸 모양이었다.

성녀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은 것이다.

“성녀님이 도와주셨군요?”

“글쎄요? 저는 그냥 두 형제분께 말씀만 좀 드린 게 전부랍니다.”

“그 간단한 대답이 저나 티샤의 조언보다 훨씬 나았던 모양이에요.”

앞으로 모든 고민은 성녀님이 맡는 걸로 하죠!

라는, 상당히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엘가였다.

“카일 형제님. 이번 방학 때 존 나센 남작령에 방문하라고 하셨잖아요.”

“네. 성녀님. 그리 말씀드렸죠.”

“갈 때 교단의 형제자매 분들도 동행할 수 있을까요?”

예전의 교단이었다면 바로 칼 같이 거절했을 것이다.

어디 감히 존 나센의 영역에 운동의 ‘ㅇ’ 자도 모르는 이들이 오냐고.

하지만 이젠 아니다. 1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현재 교단의 많은 이들은 건강함 내지는 튼튼함 단계를 넘어섰다.

비로소 존 나센에서 ‘음. 운동을 그래도 조금 했군.’ 수준이라고 할까.

“네. 얼마든지요. 고향 분들도 꾸준한 노력으로서 합당한 결실을 얻은 분들은, 언제나 환영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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