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학년을 마무리하는 종업식, 이라곤 하지만.
사실 별 거 없다. 그냥 교수가 나와서 ‘고생했다.’ 하고 끝이다.
졸업식도 아니고,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몇 달 뒤에 또 보게 된다.
그러니 특별하게 진행될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이번 종업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에, 그러면 다음으로. 5황녀 저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예정에도 없던 사회자를 맡은 교수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말한다.
어디 잘 나가는 귀족 가문의 영애가 올라와도 부담스러운 상황인데.
자그마치 황실 인사가. 그것도 현 황제의 적녀가 나타났다.
심지어 그 황녀는 그냥 황녀도 아니고 제국 10강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멀쩡한 이가 있다면 그건 둘 중 하나다.
정신이 나갔거나, 아니면 미쳤거나. 혹은 하나일 수도 있겠고.
“황녀 저하.”
과거에는 하나의 학생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스승과 제자? 그것도 어느 정도가 있는 법이다.
황녀. 제국 10강. 어떤 타이틀을 달아도 교수 입장에선 부담이다.
해서 교수가 쩔쩔 매며 황녀를 안내하는 장면을.
카일은 단상 아래서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교수님. 하지만 참으세요.’
나에게 험난한 조별 과제를 내려준 벌이랍니다.
“아아. 잘 들려?”
교수의 안내를 받아 단상 위에 오른 황녀.
그런데 시작부터 다짜고짜 반말을 박아버린다.
아무리 황녀라지만, 그래도 존대를 쓰는 게 좋을 텐데.
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본인 이미지 관리에 엄청 신경을 쓰는데.
우리의 황녀님은 그딴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겠고. 후배님들, 1년 동안 고생 많았어. 과제 지옥에, 잊을 만하면 쪽지 시험에. 아, 혹시 어떤 교수님이 조별 과제 많이 내주었니? 내가 혼내줄게.”
그러자 장내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된다.
딱 한 명, 황녀를 단상 위로 안내한 교수만 빼고 말이다.
‘본인도 찔리는 거지. 교수님! 당신 죄를 당신이 알렸다!’
조별 과제를 많이 준 교수, 바로 당신 옆에 있습니다!
카일이 소리 없는 눈짓으로 열심히 교수를 가리킨다.
다만, 황녀가 있는 단상과는 거리가 멀어서 모를 확률이 높았는데.
“으응? 아, 이 교수님이야?”
그걸 또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황녀가 옆의 교수를 지목한다.
덕분에 장내는 또 다시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왜 그랬어.”
“화, 황녀 저하?!”
“조별 과제를 왜 그렇게 많이 내주는 거야. 이미 충분히 바쁘다고.”
“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하면 종업식이 교수의 눈물 똥꼬쇼가 될 듯 하다.
해서 황녀는 ‘농담이야. 교수의 재량권은 제국 법으로 보장되잖아.’ 하고 물러섰다.
“아카데미에서 너희들이 보낸 시간은 오늘로서 끝이야. 그리고 조금만 더 지나면, 이번 한 해도 전부 끝나겠지. 끝.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굉장히 거북한 말이네.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 앞으로 한 달 후면 새로운 한 해가 오고, 또 몇 달 후면 새로운 학년이 될 거야.”
평소의 황녀답지 않은, 굉장히 진중한 어조.
어쩌면 저게 잘 보여주지 않던 황녀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끝이라고 해서 슬퍼하지도, 아쉬워하지도 마렴. 끝은 다만 또 다른 시작일 뿐.”
웃음바다가 되었던 장내도 어느 순간 조용해진다.
황녀가 내어주는 저 짧은 축사가, 예상 외로 큰 울림을 전해주었다.
“원래는 이것보다 좀 더 길게 하려고 했는데. 카일?”
갑작스레 불리는 제 이름에 카일이 고개를 든다.
저요? 아니, 갑자기 저는 왜 불러요.
“나는 여기까지 하고, 카일. 네가 대표로 올라와서 한 마디 해줘.”
“저, 황녀님. 저 같은 일개 학생이 굳이 그런 일까지….”
“올라와. 솔직히 이번 축사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하는 게 맞아.”
그러자 옆에 서있던 티샤와 엘가, 그리고 성녀까지.
여인들이 어서 나가보라는 듯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덕분에 어어, 하고 떨려나간 카일은 결국 단상 앞에 서고 말았다.
‘아니, 하아….’
한숨을 내뱉은 카일은 일단 단상 위로 올라섰다.
곧이어 아카데미 학생들의 시선이 카일에게로 쏟아진다.
맨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도 지금과 비슷했었다.
다만, 그 때는 호의적인 시선보다는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이 더 많았다.
“자꾸 왜 이러십니까. 또 저 난처하게 만들고 싶으세요?”
“아니? 정말로, 진심으로. 나보다는 네가 더 어울려. 이번 한 해에 너보다 더 대단했던 아카데미 학생이 있니? 혹시 이견이 있는 사람 있으면 손들고 말해봐. 내가 혼내줄게.”
“에?”
“아니. 내가 칭찬해줄게.”
황녀의 협박. 아니, 황녀의 제안에 손을 드는 학생은 없었다.
협박이 들어갔다고 하기보다는, 그냥 정말로 황녀의 말에 동의해서가 이유였다.
다른 거 다 필요 없이, 그냥 그 ‘존 나센’ 남작가의 직계인데.
그거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상대는 그냥 깔고 뭉갤 수 있는데.
요 1년 사이에 카일이 벌인 일은 가히 미쳤다고 볼 수 있었다.
원래라면 훈장이든, 아니면 따로 작위를 받든 해야 한다.
다만 카일 본인도. 그리고 존 나센에서도 그건 싫다고 해서.
제국이 어쩔 수 없이 포상을 하지 못 하는 상황이었다.
“없다네? 그러면 다들 찬성인 거잖아. 그렇대, 카일. 그러니까 얼른.”
“아니… 황녀님이 축사하러 와놓고 갑자기 저한테 떠넘기시면….”
“내가 할 건 다 했어. 내 축사는 끝났고, 이제 네가 축사를 해주는 거지.”
그렇게 말한 황녀가 단상 아래로 내려간다.
그리고는 학생들 사이에 앉아서 얌전히 카일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침음을 한 번 내뱉은 카일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이후 물끄러미 학생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지금 굉장히 갑작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이상한 말을 해도 양해 좀 부탁 드립니다.”
황녀가 나름 재치 있게 해둔 부드러운 분위기를 잇기 위한 농담.
본인 딴에는 괜찮은 농담이라고 여겼는데, 아니었던 걸까.
학생들은 무슨 강의를 듣는 것 마냥 집중해서는 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일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열심히 안 듣는다고 뭐라 안 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카일의 말에 몇몇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거기서 왜 안도를 하는 건데. 당신들 뭘 상상한 거야.
당장 이마를 짚고 본인이 한숨을 내뱉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낸다.
“일단 황녀님 말씀대로, 1년 동안 정말 고생들 많이 했습니다. 저도 1년 아카데미 생활을 해봐서 알지만, 이게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쓸 수밖에 없는 성적하며, 잊을 만하면 들어오는 과제에, 이곳을 졸업하는 분들이 진짜 대단한 분들입니다.”
단순히 있는 자들을 위한 사교계 모임 장소가 아니다.
제국 아카데미는 분명한 인재 양성소. 따라서 만만할 수가 없다.
그러니 카일이 이리 말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학생들도 수긍하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1년 버텨냈습니다. 이 기세로 다음 학년도 잘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음, 이렇게 말하니 황녀님 말씀이 맞다는 생각이 드네요. 끝은 다만 시작에 불과할 뿐.”
처음 아카데미에 오던 순간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운동 지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보고자 했던 행동으로 시작되었던 그 순간.
그러다 어쩌다보니, 원작 주인공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민을 좀 많이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내가 하는 언행이 혹 내용을 망치는 건 아닐까 말이다.
하지만 곧 결정할 수 있었다. 어차피 원작 내용도 제대로 모르는데.
내가 굳이 그 흐름을 지켜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고.
주인공을 밀어주는 게 아니라 그냥 본인이 주인공이면 되는 일이었다.
이후론 일사천리였다. 사건사고를 대하는 마음가짐도.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여인들을 상대하는 일도.
역시 사람은 마음먹는 거에 따라 완전히 달라지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다들 너무 풀어지지 마시고, 새로운 한 해를 마주한 다음. 내년에 다시 봅시다. 그 때는, 내일의 시작에는 오늘의 끝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되어 있기를 바랍시다.”
카일의 말에 황녀가 웃으면서 박수를 친다.
뒤이어 티샤와 엘가, 성녀까지 박수를 치니 학생들도 똑같이 따라한다.
저 정도 축사면 나름 괜찮은 거라고 볼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단련에서도 끝은 결국 시작에 불과합니다. 새벽에 가볍게 유산소 좀 하고, 그게 끝이 나면 루틴을 돌리는 거죠. 그렇게 해서 끝이냐? 아닙니다. 루틴을 다 돌렸다면 비로소 시작인 겁니다. 한 걸음 더 강해질 수 있는, 진짜 단련의 시작 말입니다.”
으응? 황녀가 살짝 당황해서는 카일을 바라본다.
잘 나가다가 왜 갑자기 대화 주제가 저렇게 나가는 거지?
“앞에 있는 여러분들 중 몇몇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또 몇몇은 여기 남겠죠. 그런 분들을 위해 실내 연무장은 열어두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다만, 기구 사용하고 정리는 반드시 해주셔야 합니다. 가끔 운동만 하고 가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면 안 돼요.”
“카일?”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시는 분들. 제가 말씀드렸죠. 끝은 시작일 뿐이라고. 한 학년의 끝은 방학의 시작이고, 방학의 시작은 새로운 단련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풀어지면 안 됩니다. 원래 추운 날에 더 움직여야 해요. 사람이 열을 낼 때 에너지 소모가 발생합니다. 이 때 더 열심히 해주면 평소보다 더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예요.”
“….”
쟤 갑자기 왜 저래. 라는 속뜻을 머금은 채.
황녀가 고개를 돌려서는 티샤와 엘가, 성녀를 바라본다.
“아하하.”
그에 세 여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매일 운동을 하면서 단련하기 싫다고, 귀찮아 죽겠다고 하는 카일이지만.
사실 누구보다 단련을 사랑하는. 그야말로 뼈 속까지 존 나센인 사람이었다.
*
“자, 그러면 가볼까요?”
아카데미에서의 1년을 마무리하는 순간.
겨울 방학을 맞이해 카일은 다시 한 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만, 이번에는 단순히 단련만을 위한 귀환이 아니었다.
아마도 자신과 뒤의 여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앞으로의 계획을 새로이 짜는 가족 간의 회의가 될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