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이면 벌써 돌아가는 날이네요.”
“뭐에요. 혹시 아쉬운가요, 티샤?”
“조금은 그래요. 저는 고향이 북쪽이다 보니.”
“그것도 있지만 간만에 얻은 휴가라서 그렇겠지.”
황녀의 말에 티샤가 ‘앗, 들켰네요.’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아카데미의 첫 번째 학년을 마치고 겨울 방학이 되었다.
누구는 본가로 돌아가 푹 쉬면서 다음 학년을 준비하거나.
또 누구는 아카데미에 머물면서 부족했던 공부를 할 텐데.
티샤는 지금의 이 짧은 휴가가 끝나면 다시 귀환해야만 했다.
당장 주술 부분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내려지는 귀족 작위부터.
이젠 아예 본격적으로 주술 연구에 매달려야 했다.
“황제 폐하께서 꽤나 만족하셨어. 솔직히 마법이란 거, 결과물은 좋은데 과정이 너무 어렵거든. 거기에 마법사들만 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알게 모르게 고이기도 하고.”
“그런 부분에서 보면 주술이 좀 더 좋기는 하죠. 하지만 이게 또 퍼지면 분명 나쁜 목적을 지니고 사용하려는 이들도 생길 거예요.”
“그래서 티샤, 네가 대비하는 거잖아. 그리고 다른 주술사들도 마찬가지고.”
마법이 마나라는 흔적을 남기듯, 주술도 흔적을 남긴다.
요즘 티샤는 그 흔적을 쫓아 주술을 악용한 자들의 추적 연구를 생각하고 있었다.
“티샤 자매님은 잘 해내실 수 있을 거예요.”
방긋 미소를 지으며 티샤의 손을 꼭 붙잡아주는 성녀.
그에 당연하죠, 라고 대답하며 그 손을 마주잡아주는 티샤였다.
“그보다 의외네요. 아버님. 그러니까 존 나센 남작님이 신년하례식에 참석할 줄이야.”
전혀 예상도 못 했다는 목소리로 엘가가 중얼거린다.
그도 그럴 게, 존 나센이 신년하례식에 올 이유도 전혀 없고, 온 적도 없다.
모여서 하는 일은 한 해의 마무리, 그리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것.
그게 끝이냐고 묻는다면 물론 아니다. 그 다음이 진짜라 할 수 있다.
존 나센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술자리와 정계의 정신없는 눈치 싸움.
특히 황실 인사들이 모두 퇴장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진짜 정계 다툼이다.
창칼을 들고서 하는 싸움만이 전투의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단순해 보이는 가십거리와 소문이 창칼보다도 더 날카롭다.
바로 그런 자리에, 다른 누구도 아닌 존 나센 남작이 가겠다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오로지 카일의 결혼식을 생각해서 그러는 것뿐이다.
막내아들을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그 막내아들의 며느리들을 위한 것.
“그러고 보니, 우리들 너무 당장의 상황만 보는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이세요, 엘가 자매님?”
“이제 약혼도, 그리고 결혼도 기정사실이니 다음을 논해야죠. 이를테면 각자의 거처와 그 다음으로 자식들 계획이라던가.”
엘가의 말에 황녀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 보자면 일단 엘가 공녀, 너는 확실하네. 그대가 차기 리토리오 대공이고 그리 되면 자연스레 네 아이가 다음 대공이 되는 거잖아. 딱히 고민할 것도 없군.”
“음, 생각하니 그렇게 되네요. 해서, 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둘만 생각 중이에요. 너무 많으면 애들끼리 다툴 것 같고, 또 저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아서. 황녀 저하는요?”
글쎄다, 하고 황녀가 팔짱을 끼곤 잠깐 생각에 잠긴다.
“원래라면 황제가 되지 못 한 황실 인사들의 아이들은 조용히 지내는 게 맞아. 그래야만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잡음 자체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 성격을 생각하니 그건 힘들 것 같네.”
나름 냉정하게 본인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는 황녀였다.
덕분에 티샤와 엘가가 서로 큭큭, 하고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썼고 말이다.
“일단 카일과 맺어진다고 해도 제도를 떠나지는 않을 거야. 황태자 전하. 미래의 황제 시야에 들어가 있는 게 서로에게 안심을 줄 수 있으니까. 아이도 그곳에서 기를 거고.”
“아, 저 생각난 게 있어요. 황녀님. 예전에, 저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어요. 군부에서 활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이죠.”
제 말이 맞죠? 하며 성녀가 옆에 앉은 황녀를 바라본다.
그에 황녀는 확실히 그랬던 적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만 본인 성격에 가만히 있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서.
그리고 군부에서도 현 황제의 적녀인 자신을 부리는 걸 부담스러워해서.
결정적으로 제국 10강이라는 타이틀을 달아버리기까지 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군부에 있는 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하지만, 나랑 카일 사이에 나온 아이라면 다르지. 황제의 자식이 아닌 손자, 혹은 손녀. 그리고 조카니까. 무엇보다 그 ‘존 나센’ 의 핏줄이니 군부에서도 꽤나 궁금해 할 것 같아.”
“와아. 상상해보니 엄청 기대되긴 하네요. 제국 군부에서 활약하는 존 나센이라.”
괜한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엘가도 그런 상상을 하니 굉장히 궁금해졌다.
과연 그 아이가 아빠인 카일을 닮아서 어느 정도 상식과 말이 통할지.
아니면 엄마인 황녀를 닮아서 제멋대로인 성향을 그대로 받아갈지.
일단 후자가 된다면 사상 최강의 조카를 지니게 된 미래의 황제는 골치 좀 썩을 것이다.
“티샤는요? 티샤는 뭐, 똑같이 주술을 하라고 할 건가요?”
“글쎄요. 저는 상관없지만 과연 존 나센의 혈통이 그걸 보고 있느냐가 문제인데.”
“…하긴.”
이제는 카일의 행동 양식이나 생각 부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그 부분들을 티샤의 아이에 대입하여 대강의 예측을 해보았을 때.
아마 주술이 순수한 주술이 아닌, 이제 거기에 막 ‘물리적’ 인 부분이 붙지 않을까.
“성녀님은요?”
티샤가 자신에게 돌아온 질문을 슬그머니 성녀에게로 돌린다.
그러자 성녀는 에? 하고 반문하더니 ‘어어….’ 하고 침음을 흘렸다.
그런 부분에 대해선 전혀 생각한 적이 없다는 느낌이 역력했다.
“뭐예요. 성녀님은 아무 생각도 안 하신 건가요?”
“아, 그게… 저는, 그 아이보다는….”
“아이보다는요?”
“그게, 그러니까. 아직은 아이보다는 저와 카일 형제님, 둘에게만 집중하고 싶어서….”
어머나. 성녀의 말에 티샤가 입가를 가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건 엘가도 마찬가지였는데 무언가 깨달음까지 얻은 표정이었다.
“호오. 성녀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 보니 가장 앙큼했구나.”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황녀님! 제가 어디가 앙큼하다고요!”
“우리는 그저 순수하게 아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거기서 ‘아이는 되었고 그냥 한동안 카일과 진하게 즐기겠다.’ 라는 말을 할 줄은.”
“아니에요! 저는 그냥! 형제님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싶다는 뜻으로!”
열심히 반론하는 성녀였으나 황녀에겐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시치미 떼지 않아도 돼. 솔직히 나도 그러고 싶거든.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또 은근히 손자, 손녀 욕심이 많으시거든. 황태자 전하도 혼인을 올리시고 처음으로 들은 말이 그래서 황손은 언제 보여주실 거냐는 어겼어.”
“아, 진짜! 아니라고요!”
“아, 진짜. 제발 좀.”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얌전히 푸시업을 하고 있던 카일이 입을 열었다.
“제가 그냥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다들 뭐하는 겁니까. 네?”
“어허, 카일. 레이디들이 이야기 중인데. 이러면 안 돼죠.”
“안 되긴 무슨. 여기 정원이나 뒤뜰 아닙니다. 제 방이에요.”
그랬다. 네 명의 여인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던 이곳.
존 나센 성의 안에 위치한 공간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카일의 방.
그런 곳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여인들이었다.
당연히 카일 입장에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왜? 벌써부터 각방 쓰려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리고 황녀님. 우리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아직은 말이죠.”
“어차피 나중에는 부부인데, 지금부터 하면 되는 거지.”
“어머니 말씀 기억 안 나세요? 존 나센에서 벗어나면 하라고. 엄금입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여기선 쓸데없이 몸 피곤하게 하지 말라는 거다.
남녀 간에 있을 밤일, 사랑을 나누는 걸 막지는 않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참아라. 이곳은 성스러운 단련이 가장 중요시 여겨지는 곳이니!
“어차피 내일이면 돌아가는 날인데요, 카일?”
“그러니까. 티샤 말대로 내일이 돌아가는 날인데.”
내일부터 아주 본격적으로 들이댈 거라고 예고하는 이들이었다.
그 부분에 아주 살짝 걱정은 되었지만, 어떻게 잘 견뎌내지 않을까 싶다.
일단 혼자서 넷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은 적어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말은 저렇게 해도, 저들도 서로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을 거다.
아직 제대로 된 경쟁도 벌이지 않았는데. 이제 막 한 발을 떼는데.
거기서 과하게 스타트를 끊으면 순식간에 공적이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
‘다들 머리 하나는 좋으니까. 과하게 튀지 않는 게 이득임을 잘 알아.’
경쟁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군을 많이 만드는 것보다 적을 덜 만드는 것에 있다.
어차피 영원한 아군 따위는 없으니 최소한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차라리 낫다.
“…저기, 카일이 너무 여유만만해서 기분이 나쁜데. 그냥 우리끼리 순번 정해서 매일 해버리는 거로 할래? 그리고 먼저 아이 가지는 쪽이 일단 첫 번째 하는 걸로.”
“…황녀님?”
“솔깃하네요. 카일, 저 인간이 자꾸 저러는 거. 솔직히 좀 얄미웠는데.”
“자매님들!? 그, 그런 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성녀님께서는 불편하시다면 세 명이서 해도 되는데.”
이봐요들! 우리 순수한 성녀님께까지 그러지는 말자고요!
성녀님! 얼른 음란마귀에 씌운 불쌍한 자매들에게 기도를….
“아, 그… 그… 마, 맞아요! 따돌리기는 없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좋든 싫든 세 명이 아닌 네 명이 함께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절대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요!”
“….”
안 돼요, 성녀님. 성녀님까지 그러면 안 된다고요!
카일이 다급하게 손을 내젓자 황녀가 피식, 미소를 짓곤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합공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단련이라는 핑계도 결국 이곳을 벗어나면 무적이 아니라고.
부모님께서도 그 부분에 대해선 허락을 하셨으니 기대하라고 말이다.